자료실

상락연표4 (1396-1644) (2005. 6. 30. 태영(군) 제공)

페이지 정보

관리자 작성일11-10-26 16:03 조회1,130회 댓글0건

본문

1396년 근정전에서 과거를 보았다. 이때 김익정이 1등으로 장원급제 하였다.

1398년 김승(金陞)을 동지중추원사로 삼았다. 제1차 왕자의 난(戊寅靖社). 태조가 왕세자           방과(芳果)에게 선위(禪位), 정종(定宗)즉위. 이때 김철(金哲)등은 함경도 단천으로          피신 하였다.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芳幹의 난). 방원(芳遠)을 왕세자로 책봉. 정종이 방원에게 선위. 태종(太宗) 즉위.

1401년 증광문과(增廣文科) 실시. 신문고(申聞鼓) 설치.

1402년 무과의 과거 실시. 호패법(號牌法) 실시.

1403년 계미자(癸未字) 주조(鑄造). 명나라에서 고명(告命)․인장(印章)․조칙(詔勅)을 보내옴.

1405년 김사렴(金士廉)이 사망하다. 고려가 망하자 청주에 은퇴하였다.

1408년 김고(金顧)가 문과에 급제하다.

1411년 문서응봉사(文書應奉司)를 승문원(承文院)으로 고침. 오부학당(五部學堂)을 운영. 동북면지방으로 양전(量田)을 실시.

1413년 도(都)․군(郡)․현(縣)의 칭호 개정.

1414년 김전(金塡)이 문급제 하였다. 노비소산한품속신법(奴婢所産限品贖身法)을 제정. 무과(武科)에 삼장통고법(三場通考法) 적용.

1415년 시장세와 상인세를 저화(楮貨)로 징수. 장인세(匠人稅)를 신설.

1417년 명빈(明嬪)김씨의 아버지 김구덕(金九德)을 지돈령부사로 삼았다.

        김돈(金墩)문과에 급제하다. 각 도(道)에 잠소(蠶所)설치. 의흥현(義興縣)에서《향약          구급방》 중간.

1419년 이종무(李從茂),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 정벌. 제주에 양전(量田) 시행.

1420년 집현전(集賢殿) 설치. 경연청(經筵廳) 설치.

1423년 한성의 남산에 봉수대 축조. 불교를 선교(禪敎) 양종으로 정리. 조선통보(朝鮮通寶)          주조.

1426년 김맹헌(金孟獻)이 문과에 급제하였다.

1428 년 김돈(金墩)이(세종 10) 왕명으로 《서한이하역대보계도 西漢以下歷代譜系圖》를 찬         진하였다. 김구덕(金九德)이 사망하였다. 시호를 안정(安靖)이라 했다.

1429년 정초(鄭招),《농사직설(農事直說)》저술. 경상도․충청도에서 양전사업(量田事業)진행.

1431년 김고(金顧)가 사망하였다.

1432년 맹사성(孟思誠) 등이 《신찬팔도지리지》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편찬. 《세종실록지리지》를 편찬. 설순 등이 여연군(閭延郡)에 침입한 여진기병을 격퇴.

1433년 압록강변의 여진족을 토벌. 화포전(火砲箭)을 발명.

1434년 갑인자(甲寅字) 주조, 갑인자로 《자치통감(資治通鑑)》을 간행. 북동․북서에 6진(鎭)을 설치. 장영실 등이 경복궁에 자격루(自擊漏)를 설치.

1435년 화약무기인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발명. 함길도에 목화를 심게 함.

1436년 김익정(金益精)이 사망하였다. 대사헌을 거쳐 예조참판을 역임하였다.

       납활자 병진자(丙辰字)를 주조.

1437년 물시계인 행루(行漏)․앙부일구 등을 제조, 간의대(簡儀臺)를 설치. 승지 김돈(金墩)이         서문을 지음.

1438년 성천도호부사 김명리(金明理)가 사망하다. 왜선의 삼포평균분박(三浦平均分泊) 엄수         를 지시. 장영실, 자동물시계 옥루(玉漏)를 제작.

1440년 인순부윤 김돈(金墩) 사망이 사망하였다.

1441년 장영실 등이 세계 최고(最古)의 측우기(測雨器)를 설치하고, 양수표(量水標)를 세움.

1442년 김전(金塡)을 예문관 직제학으로 임명.

1443년 통신사와 대마도주가 계해조약(癸亥條約) 체결. 세견선(歲遣船)을 5척으로 약정.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

1444년 양전산계법(量田算計法) 제정. 무과삼관법(武科三官法) 실시.

1446년 수양대군이 《석보상절(釋譜詳節)》을 편찬. 훈민정음 반포(頒布).

1447년 보문각 직제학 김전(金塡) 사망.《용비어천가》의 주해 완성.

1450년 동활자 경자자(庚子字) 주조. 정음청(正音廳)을 설치.

1451년 국방강화를 위해 군사(軍士)를 늘림. 문종이 창안한 화차(火車)를 제작하여 배치. 김종서(金宗瑞) 등이 《고려사》 136권을 개찬.

1452년 김종서 등이 《고려사절요》 편찬. 《동국정운(東國正韻)》을 과거과목 신설.

1453년 계유정난(癸酉靖難). 수양대군이 김종서․황보 인 등을 죽이고 정권장악. 안평대군(安平大君) 사사(賜死)됨. 이징옥(李澄玉)의 난.

1455년 김질(金礩)이 장인인 의정부 우찬성 정창손(鄭昌孫)을 통하여 모의를 고변

1456년 사육신(死六臣)사건.

1457년 단종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 영월로 유배. 노산군(단종) 죽음.

1460년 하삼도민(下三道民) 4,500호를 평안․강원․황해도에 이주시킴.

1461년 간경도감(刊經都監) 설치.

1463년 김수녕(金壽寧)이. 양성지(梁誠之)·서거정(徐居正) 등과 함께《동국통감>을 편찬하          였다. 홍문관(弘文館) 설치.

1464년  김뉴(金紐)가 문과에 급제 하였다. 전폐(箭幣)를 주조.

1466년 과전법(科田法)을 폐지하고 직전법(職田法)을 실시.

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난. 규형(窺衡)과 인지의(印地儀)를 이용한 삼각측량법을 발명.

1468년 김질(金礩)이 좌의정에 오르고 원상이 되었다. 남이(南怡)․강순(康純) 등이 반역으로          사형됨.

1469년 세조실록을 수찬하는데 공조참판 복창군 김수녕(金壽寧), 예문관 직제학 김뉴(金紐)등          이 참여하였다.

1473년 복창군 김수녕(金壽寧)이 사망하였다. 시호는 문도(文悼)이다.

1474년 개찬한 《경국대전》과 《속록》을 반포.

1477년 김수동(金壽童). 김작(金碏)이 문과에 급제하였다.

1478년 우의정 원상(院相) 김질(金礩)이 사망하였다.

        김뉴(金紐)가 대사헌으로 군비확충을 위해 전라도 지방에 석보를 쌓았다.

1481년 서거정(徐居正) 등이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50권을 찬진(撰進).

1483년 김석정(金石精)이 문과에 급제하였다. 후에 이조정랑이 되었다.

        김연수(金延壽)가 문과에 급제 하였다. 후에 대사헌을 역임 하였다.

1484년 성균관에 학전(學田) 400결(結)을 줌. 서거정 등이 《동국통감(東國通鑑)》을 찬진.

1487년 김작(金碏)이 형조판서에 올랐다.

1488년 김작(金碏)이 사망하였다. 시호는 효소(孝昭)이다.

1489년 유교(儒敎)의 전적(典籍)을 각 향교(鄕校)에 배포.

1490년 김뉴(金紐)가 이조참판이 되었다. 글씨와 거문고 그림을 잘그려 삼절로 불리웠다.

        울산․거제․동래․남해 등지에 축성. 순천에 전라좌수영을 설치.

1491년 북정(北征)을 결의. 두만강 방면의 여진족 정벌.

1492년 김성동(金贖)이 문과에 급제하였다.

1493년 성현(成俔) 등이 《악학궤범(樂學軌範)》 9권을 완성.

1495년 부사 김성동(金贖)이 사망하였다.

1496년 무오사화(戊午史禍). 유자광(柳子光) 등의 무고로 김일손(金馹孫)․권오복(權五福) 등이 처형되고, 김종직(金宗直)을 부관참시(剖棺斬屍)함.

1498년 김수동(金壽童)이 성절사로 명나라에 가서《성학심법 聖學心法》4권을 구하여 왔다.          상평창(常平倉) 설치.

1501년 철원부사 김곤(金坤)이 사망하였다.

1502년 하삼도(下三道)의 주민 1,600호를 평안․함경․황해도에 이주시킴.

1503년 김감불(金甘佛)․김검동(金儉同)등이 연철(鉛鐵)에서은(銀)을 분리하는 제련법을 발명.

1504년 김수동(金壽童)이 이조판서에 올랐다. 갑자사화(甲子士禍).

1506년 김공망(金公望) 문과에 급제 하였다. 중종반정(中宗反正).

1507년 이과(李顆) 등이 반란을 꾀하다 발각되어 옥사.

1510년 김수동(金壽童)이 영의정에 올랐다. 삼포왜란(三浦倭亂), 황형(黃衡)․유담년(柳聃年)           등이 이를 평정.

1512년 영의정 김수동(金壽童)이 사망하였다. 김적(金磧)의 아들로 상락군 김사형의 후손으로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를 문경(文敬)이라 하였다. 일본과 임신조          약(壬申條約) 체결하여 세견선(歲遣船) 및 세사미(歲賜米)를 반감함.

1513년 김공예(金公藝)가 장원으로 급제 하였다.

1515년 을해동활자(乙現活字) 주조.

1517년 김안국(金安國)이 《여씨향약(呂氏鄕約)》을 간행하여 반포.

1518년 소격서(昭格署)를 혁파하고, 소장한 그림을 도화서(圖畵署)에 이장(移藏).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

1520년 제주의 한지(閑地)에 군량을 마련하기 위해 둔전(屯田)을 설치.

1526년 경상관찰사 김희수(金希壽)가 사망하였다. 글씨에 능하였으며 이가서법을 남겼다.

        영상 김수동비문등 많은 유필을 남겼다. 동궁에 작서(灼鼠)의 변이 일어남. 4월, 최          세진(崔世珍)이 《훈몽자회(訓蒙字會)》를 지음.

1528년 김공망(金公望)이 사망하였다.

1530년 이행(李荇) 등이 《신증동국여지승람》을 편찬.

1532년 조정관리의 녹봉을 감하여 구황(救荒)에 충당.

1538년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지 않는 사찰을 폐지함.

1539년 김주(金澍)가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1543년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건립.

1544년 4월, 사량진왜란(蛇梁鎭倭亂).

1545년 김충갑(金忠甲)이 문과에 급제 하였다. 조광조 복관(復官)되고, 현량과 다시 실시. 왕대비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가 섭정. 8월, 을사사화(乙巳士禍).

1547년 첨지중추부사 김노(金魯)가 사망하였다. 글씨에 뛰어나 조정의 전책(典冊)을 모두 썼         다. 정미사화(丁未士禍). 대마도주(對馬島主)와 정미약조 체결(수호조약을 개정).

1549년 이홍윤(李洪胤)의 옥 일어남.

1550년 백운동서원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의 편액을 하사함(사액서원의 시초). 12월, 선교양종(禪敎兩宗)을 다시 둠.

1551년 양종선과(兩宗禪科)를 설치하고 시경승(試經僧)에게 도첩(度牒)을 발급.

1552년 김억령(金億齡)이 문과에 급제하였다.

1553년 김제갑(金悌甲)이 문과에 급제 하였다.

1555년 을묘왜변(乙卯倭變).

1559년 황해도에서 임꺽정(林巨正)의 난 일어남(~1562). 이황(李滉)과 기대승(奇大升) 사이에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에 관한 서신왕래 시작(~1566).

1560년 이황, 예안(禮安)에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세움(75년에 사액).

1561년 10월, 이정(李楨)이 경주에 서악서원(西岳書院)을 세우고 설총(薛聰)․김유신․최치원을 향사(享社). 이지함이 《토정비결》을 지음.

1562년 임꺽정의 난을 평정.

1563년 화산군(花山君) 김주(金澍)가 사망하였다. 시호를 문단(文端)이라 하였다.

1567년 명종 죽고(1534~), 선조(宣祖) 즉위(~1608).

1572년 이이(李珥)와 성혼(成渾) 사이에 사단칠정론에 관하여 서신 왕래 시작(~1578).

1573년 김수(金睟)가 급제하였다.

1574년 안동에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세우고 이황을 향사(75년에 사액).

1575년 김충갑(金忠甲)이 사망하였다. 구암집이 전한다. 대마도주(對馬島主)가 왜국이 조선침략을 위해 전선을 건조하고 있음을 통지. 7월, 심의겸(沈義謙)․김효원(金孝元)의 동서당론이 일어남.

1577년 이이, 《격몽요결(擊蒙要訣)》 간행.

1580년 김억령(金億齡)이 안동김씨 최초의 족보 서문을 쓰다.

1583년 김흠(金欽)이 문과 급제하였다. 이이,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을 건의함.

1588년 김시헌(金時獻)이 장원급제 하였다.

1589년 관찰사 김억령(金億齡)이 사망하였다.

        김성립(金誠立)이 문과에 급제하였다.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 일어남.

1590년 김대래(金大來)가 급제하다.

1592년 김시민(金時敏), 김성립(金誠立), 김제갑(金悌甲), 김흠(金欽)등이 사망. 김수(金睟)는 청백리에 녹선. 임진왜란(壬辰倭亂) 시작. 일본침략군 21만이 부산포에 상륙. 옥포해전에서 왜선 26척을 대파. 명(明)나라의 1차원군 압록강을 건너옴. 한산도대첩(閑山島大捷). 명나라의 2차원군 4만이 압록강을 건너옴.

1593년 왜군이 철수 시작. 선조가 한성으로 귀환.

1597년 김치(金緻)가 문과에 급제하다. 제정유재란(丁酉再亂), 약 20만의 왜군 상륙. 원균(元均) 휘하의 수군이 칠천(漆川)․고성(固城)에서 대패.

1598년 이순신(李舜臣)이 노량해전(露梁海戰)에서 전사. 왜군 철수.

1601년 정랑 김정일(金鼎一)이 사망. 한성에 동묘(東廟) 건립.

1603년 이광정(李光庭)과 권희(權憘)가 연경에서 마테오 리치가 제작한 《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를 가져옴.

1604년 유정(惟政)을 쓰시마섬과 일본에 보내어 그곳 사정을 알아보게 함.

1605년 김시양(金時讓)이 급제하였다. 유정이 포로 3,000여 명을 데리고 일본에서 귀국.

1608년 직제학 김대래(金大來)가 사망하였다. 선조 죽고, 왕세자 즉위(광해군).

1610년 허준(許浚)이 《동의보감》 25권 찬진.

1612년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이 역모하였다고 사사됨.

1613년 영창대군의 관작을 삭탈하고 서인으로 함. 폐모론 일어남.

1615년 영중추부사 김수(金晬)가 사망하였다. 경상관찰사. 한성부판윤 지중추부사가 되고           시호는 소의(昭懿)이다. 김언(金言)이 문고에 급제. 강화부사 정항(鄭沆)이 영창대군을        죽임.

1618년 인목대비의 호를 삭탈하고 서궁(西宮)이라 칭함. 대북파 정권 장악.

1619년 김응하(金應河) 명나라에 1만 명의 원군 파견할때. 좌영장으로 출전 심하싸움에서          전사하였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명나라 신종(神宗)이 요동백(遼東伯)으로 추봉           하고 경원의 충렬사와 선천의 의렬사에 제향하였다.

1623년 김자점.이귀.김류 등이 광해군을 폐하고 능양군(綾陽君) 추대, 인조반정을 주도함.

1624년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킴.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