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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열전 김방경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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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02-02-21 19:16 조회1,76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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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흔은 문음(門蔭)으로 산정 도감(刪定都監)의 판관으로 임명되었는데 세 번 조동되어 장군이 되었으며



아버지를 따라 탐라적(耽羅賊-삼별초 폭동군)을 토벌하여 승리하게 되자 대장군으로 임명받았다. 얼마



후에 사재경(司宰卿)으로 고쳐 임명되고 또 일본 정벌에 종군하였다가 귀환한 후에 진주(晋州)목사가 되



었었다.



충렬왕 5년에 독로화(禿魯花-볼모)로 원나라에 들어갔는데 당시에 우리나라 사람들이었던 유주가 황제



에게 말하기를



“외국인으로서 외국인을 공격케 하는 것은 중국의 형편상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니 고려와 만자(蠻子-



중국 남방의 이민족들)로 하여금 일본을 정벌케 하고 몽고 군대는 파견하지 말도록 하며 또 고려로 하여



금 군량 20만 석을 준비하도록 하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더니 황제가 그렇게 하자고 허락하였다. 여기



서 김흔은 유주더러 말하기를



“너는 유검필(黔弼), 유자량(資諒)의 후손이 아닌가? 그런데 자기의 고국을 이다지도 못쓰게 만들려고 하



는가?”라고 한 즉 유주가 대답하기를



“너의 왕은 진흙으로 만든 부처와 같다. 윤수(尹秀), 이정(李貞), 원경(元卿), 박의(朴義), 양선대(梁善



大) 등이 백성들을 착취해 내는 것만을 가지고도 군량을 마련하기 충분하다. 그러니 나는 나쁜 신하들을



없애고 삼한(고려)을 다시 바로잡으려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후 김흔은 아버지의 관직을 계승하여 금호부(金虎符)를 띠게 되고 따라서 소용 대장군 관 고려군 만호



(管高麗軍萬戶)로 되었으며 진국 상장군(鎭國上將軍)의 관계를 더 받았고 여러 번 조동되어 첨의 참리로



되었다.



15년에 황제는 해도(海都)의 군대가 변강 지방에 침범하여 왔다고 하여 고려에 사신을 보내 군대를 징발



하게 되었는데 왕은 김흔으로 하여금 군사를 인솔하여 요양에 가게 하였다.



합단(哈丹)이 습래하여 왔을 때 김흔은 환가현의 경계 지방에 주둔하여 그들을 방어하게 되었다. 적들이



장차 철령(鐵嶺)에 이르려 할 때 방수(防守) 만호 정수기(鄭守琪)는 겁을 먹고 도망쳐 버렸다. 그런데 철



령의 길은 좁아서 겨우 한 사람이 다닐 수 있을 뿐이었으므로 적들은 말에서 내려 고기를 꿰미에 꿴 것처



럼 하나씩 줄을 지어 올라왔다. 이때 적들은 심히 굶주리고 있었는데 정수기가 내버리고 간 식량을 얻게



되자 며칠 동안 실컷 먹고 기운을 내어 북을 울리면서 전진해 와서 영을 넘어 교주도(交州道)에 깊이 침



입하였다. 김흔이 역시 달아나서 적들과 싸우기를 피하였으므로 양근성(楊根城)이 마침내 함락되고 말았



다.



이때 황제는 설도간을 보내 합단적들을 토벌케 하였는데 김흔은 우군장(右軍將)으로 설도간과 함께 목주



(木州)에 주둔하고 있었더니 나졸(邏卒) 고문려(高文呂)가 보고하기를 적들이 연기현(燕岐縣)에 주둔하



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목노적(木奴赤) 등 28명을 고문려와 함께 보내 정찰하게 하고 밤중에 제군



(諸軍)이 목주를 떠나서 동이 틀 무렵에 연기에 이르렀다. 적들은 정좌산(正左山) 아래에 진을 치고 있었



는데 제군이 갑자기 포위하자 적들은 크게 놀라 험준한 곳에 의지하여 싸울 예정으로 산으로 올라갔다.



우리 군대들이 양쪽에서 협격하니 적들은 정면과 후면에서 제압 당하여 말을 버리고 숲속 나무 사이에 숨



었다. 우리 군대의 선봉으로 나가던 자 두 명이 화살에 맞게 되니 군사들이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전



진하지를 못하였다. 김흔이 꾸짖고 명령을 내리기를 “감히 후퇴하려는 자가 있으면 베어 죽이겠다”라고



하였더니 이에 보병 5백 명이 앞을 다투어 올라가서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게 되었다. 이석(李碩), 전득현



(田得賢) 등이 돌진해 나가서 적의 선봉으로 나왔던 장대한 군사 2명을 베이고 그 승리한 기세로 크게 부



르짖으면서 대군의 힘을 합하여 공격하니 적들은 형세가 궁하게 되어 무너져 달아나게 되었다. 이것을 추



격하여 공주강(公州江)에 이르렀는데 적의 시체가 30여 리 사이에 깔리었고 물에 빠져 죽은 자도 심히 많



았다. 적들 중 정예 부대인 기병 천여 명이 강을 건너 도망치니 그들이 데리고 다니던 부녀자들, 가지고



다니던 의복, 안장, 보물 그릇 등을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노획하였으며 사람을 시켜 왕에게 승리를 보고



케 하였다. 왕은 또 김흔을 죽전(竹田)에 보내 남은 적들을 추격, 토벌케 하고 판 밀직 사사의 벼슬을 주



었으며, 황제는 그에게 활, 화살, 안장, 옥띠, 은 1정(錠)을 주었다.



전공에 대한 표상이 있게 되자 그를 판삼사사로 승직시켰으며 얼마 후 지 도첨의사사로 임명하였다.



중일영(日英)이 한희유가 반역을 음모한다고 무고하였을 때 김흔은 인후(印候)와 더불어 군대를 출동시



켜 한희유를 붙잡아다가 좌승(左丞) 합산(合散)에게 고발하여 문초케 하였다. 그러나 한희유 등은 죄행



을 시인하지 않았고 일영도 또 달아나 버렸으므로 인후, 김흔 등이 장차 원나라로 가서 황제에게 하소하



려 하였는데 왕이 말리었으나 그 말을 따르지 아니 하였다. 그래서 왕도 사신을 원나라에 보내 한희유의



죄가 무고임을 판명케 하였다. 때마침 대사령이 내렸으므로 김흔 등도 죄를 면하게 되었고, 아버지가 죽



었으므로 귀국하여 복상을 마치고 다시 원나라로 갔다.



당시에 한희유가 재상으로 있었으므로 김흔은 고려로 돌아오려 하지 않고 연경에서 대략 7년간이나 머물



러 있었다. 한희유가 죽고 난 뒤에 김흔을 찬성사 자의(咨議) 도첨의사사로 임명되고 삼중 대광(三重大



匡)의 작위를 더하여 받았으며 아버지의 뒤를 이어 상락공(上洛公)으로 봉하였으므로 본국으로 돌아오



게 되었다. 그런데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만호의 관직은 사양하여 형의 아들 김승용(承用)에게 주었다.



충선왕이 즉위하자 교서를 내려 이르기를



“대덕(大德) 3년(1299년)에 우리 나라에서 무뢰한들이 반란을 일으키려고 하였을 때 김흔은 만호 인후와



더불어 능히 미리 그 사실을 알고 난을 평정하게 하였으니 그 공로를 포상하여야 할 것이며 그를 특별히



높은 관직에 등용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충선왕 원년에 나이 59세로 죽었다. 김흔은 성품이 활달하고 인



자하였으며 특히 친척 가운데 곤궁한 자를 잘 구제하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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