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애일기(陰崖日記) - 김수동(金壽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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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 작성일05-04-01 20:19 조회1,660회 댓글1건본문
음애일기(陰崖日記)
○ 3월에 도리(桃李)꽃이 피지 않고 모진 바람이 여러 번 불었으니, 정월부터 비가 오지 않고 가물 징조가 이미 나타났었다. 이에 명하여 더욱 술을 금하는 것을 엄하게 했다. 5일에 영의정 박원종(朴元宗)이 굳이 사직할 것을 청하니, 김수동(金壽童)을 영의정으로 삼았다. 박원종은 호귀(豪貴)한 집안에서 태어나고 무거(武擧)로 발신하여 청현(淸顯)의 벼슬을 역임하여 이름과 행검에 구애하지 않았다. 그 난리를 만나서도 기회를 틈타서 처리하기를 마땅히 하여 드디어 세상에 드문 공을 이루니, 비록 나무하는 아이나 소치는 총각까지도 그의 성명을 알게 되었다. 그 대배(大拜)함에 이르러 스스로 인망(人望)에 만족하지 못할 것을 생각하여 절조를 꺾어 겸손하고 공경하여 공론(公論)을 받아들이기를 힘썼으나, 배우지 못하고 꾀가 없어 거칠고 사나운 기운이 생각지 못하는 사이에 나타나므로, 비록 임금의 앞에서도 의논을 하는 자가 한번 그의 뜻을 거스르면 역시 얼굴빛에 드러내어 스스로 억제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천품이 확실하고 거취에 구애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힘써 사양하니, 당시 의논이 아름답게 여겼었다. 김수동은 단아하고 신중하며 지혜가 많아서 선비가 됨으로부터 대상(大相)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능히 그 시비를 의논하지 못했다. 연산(燕山)의 흉잔(凶殘)한 때를 당해서 사랑을 받고 정승이 되었으나 역시 능히 때를 따라 처리하여 위로 임금에게 죄를 짓지 않고, 아래로 능히 사람들을 살리니, 진신(搢紳)의 선비들이 많이 힘입어 온전했다. 당시 벼슬에 있던 자들이 다투어 집을 수리하여 지극히 화려하고 사치함을 힘써서 선사하는 물건으로 저자를 이루어 문 앞이 들끓었으나 수동만은 그렇지 않았다. 의거(義擧)하는 날에 성희안(成希顔)이 그 집으로 찾아가 말하였는데, 간사하게 따르지도 않고 조급히 움직이지도 않아 조용히 살피고 헤아린 뒤에 행하니, 사림(士林)들이 그의 도량에 감복했다. 이때에 이르러 수상(首相)에 제배하니 인정이 차츰 흡족하여졌다.
○ 8월에 나라의 법으로 봉상시(奉常寺)에서 시호(諡號) 의논하는 일을 주장했는데, 중흥(中興)한 이래로 시호 의논하는 것이 바르지 못하므로 특별히 홍문관 응교 이상에게 명하여 이 의논에 참여하게 했다. 이때 김수동(金壽童)의 시호를 경(頃)이라 하고, 유순정(柳順汀)의 시호는 무안공(武安公)이라 했는데, 정부에서는 이것을 명분과 실상이 맞지 않는다 하여 봉상시로 하여금 고쳐 의논하게 했다. 이즈음 시호를 의논할 적에는 그 자손들이 분주히 간청해서 반드시 아름다운 시호를 얻고 나서야 그만두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뜻에 맞지 않으면 문득 다시 고쳤으므로 의논하는 바가 모두 바름을 얻지 못했다. 이때 무관(武官)으로서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참여한 장정(張珽)이란 자가 죽었을 때, 안팽수(安彭壽)가 봉상정(奉常正)이 되었는데 그들의 청을 받고 시호를 충렬공(忠烈公)이라고 결정하니, 이로부터 시호에 충(忠)과 문(文)의 두 글자가 없으면 사람들이 모두 괴상히 여겼다.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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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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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귀중한 문서들이 속속 발견됩니다. 놀랍습니다. 감사합니다. 음애일기는 어느 문헌 속에 있는 것인가요. 아니면 단행본인가요. 자세한 출전을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