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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희안신도비 원문 및 번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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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5-05-05 07:47 조회1,835회 댓글5건

본문

출전 : http/www.yangju.gyeonggi.kr/ 

 

[원 문]

有明朝鮮國秉忠奮義決策翊運靖國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春秋館藝文館觀象監事兵曺判書昌山府院君忠定公成公神道碑銘幷序

崇政大夫議政府右贊成兼知經筵事判義禁府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成均館事申用漑

朝散大夫行議政府檢詳兼春秋館記注官承文院校理金希壽

天之生俊傑也不虛將以降大任也旣眷聖人爲神民主以付亨屯之重必賚忠智才德者爲之先後然後功易成而德易流此天之

所以啓我聖而忠定公應運而生者也公姓成諱希顔字愚翁昌寧人高祖諱士達推忠協理功臣重大匡藝文館大提學昌山君諡文孝是生僉知中樞府事諱溥贈資憲大夫兵曺判書判書生司直長同正諱孝淵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贊成生敦寧府判官諱瓚贈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春秋館藝文館觀象監事昌川府院君自判書以下皆贈爵從公勳秩也昌川聘德泉君厚生女爲配爵封貞敬夫人德泉卽恭靖大王之子也以天順辛巳正月甲子生公臨産母夫人夢一神來授杖曰可携此令爾家福祿興昌旣生啼視異凡知識聰悟機警已有弘毅致遠之氣常遊戱自稱大將布陣申令以指揮兒皆趨順無敢違未知讀書學文漸益能將調翰夙成中成化庚子生員試登乙巳科拜藝文館檢閱兼春秋館記事官尋選入弘文館爲正字轉陞副修撰時成廟右文重儒士公以新進驟侍經幄備顧問多所裨益成廟甚器重之弘治辛亥丁內憂廬墓三年每於朝夕朔望節日必親其奠饌無少怠嘗與弟希雍採薯谷裏將以供薦適疲共睡巖石上夢先考公呼有賊驚覺見巨虎已近前卽擲石走之人謂孝誠所感服拜禮賓寺主簿成廟召至閣門曰爾終制平善良用慰喜因賜鷹曰聞爾有老母甘旨不可闕玆用特賜之俄拜司諫院正言遷侍講院司書弘文館修撰轉陞至校理쫤쫤以漢語吏文質正官赴師還其欽賜衣錦不敢自私獻于母夫人爲諸妹婚嫁之資丙辰拜兵曺正郞戊午陞司贍寺僉正還漢城府庶尹廣興倉守時治吏獄嚴急善人多非辜柳子光鞫其事招羅織猶恐綱疎公爲郞僚多有解赦子光惡其右善聲紙責至指公爲黨欲陷之公慷慨辨解辭氣正直諸推官皆是公子光竟不能行臆歷副禮賓軍器兩寺正轉拜內贍寺正庚申夏朝廷憂南道飢甚遣公賑恤公往盡心救濟民賴全活還授軍器寺正辛酉琉球國遣使來聘公爲宣慰使應接合宜得使者之心一日於慰宴使者語押宴官領議政韓致亨曰宣慰使之賢宜居宰相而官位尙卑其敬服如此壬戌冬特拜刑曺議階通政癸亥夏以謝恩使赴京師秋還遷禮曺議甲子夏陞拜刑曺判階嘉善俄進嘉靖爲吏曺判兼五衛都摠府副摠管見燕山主荒暴失道憂形于色主嘗出遊楊花渡之望遠亭令扈駕宰樞各賦詩以進公詩有規諷語主盛怒譴讓甚峻人懼不測公遯辭以對主稍霽威貶公副司勇處

西班末職三年不調遷時姦臣任士洪逢長主心虐日甚盡括公私倡樂選有姿貌者爲興淸天科運乎等號列置諸院日夜荒宴大興土木傾竭府庫環京都立梁撤民家舍田土爲馳騁遊獵之場禁人出入犯者輒斬又徵聚四方拘馬花卉珍禽奇獸追罪論諫之人誅竄無虛日無賴之徒稱內嬖族親姿行攘奪遍于中外雖士族之家皆被侵轢遷移先聖先師之主空其廟爲虎圈廢三年之喪立偶語之禁賦役繁重法綱深入皆搖手觸罪朝野側足度日如年民窮怨起變亂將生廊廟大臣相視咨嗟無如之何公雖閑居散地常憂念時事忘身許國挺然懷伊之志密與朴元宗柳順汀謀戴 聖主以安一世乃於丙寅九月初二日倡忠奮之士擧義廢昏大小之臣軍民之衆咸來趨赴不謀而同進潔慈順王大妃上告 宗廟降封主爲燕山君翊今上于私邸入卽寶位頒大赦盡還流竄之人追爵枉死之魂革亂政復奮章萬姓鼓舞宗社載寧策勳 賜秉忠奮義決策翊運靖國功臣之號階超正憲拜刑曺判書封昌山君十月進階崇政兼判義禁府事時國步初正人情危疑獄事屢起公平心靜鎭務從寬簡衆賴以安尋進秩輔國崇祿昌山府院君兼領經筵事吏曺判書五衛都摠莩摠管自上卽位諸誥命于帝者再皆未蒙允丁卯九月命公往請遂得命而還特賜土田藏獲賞其勞是開史局修燕山日記以公摠裁遂監春秋館事己巳秋拜議政府右議政階加大匡餘如舊庚午夏兼兵曺判書以軍國事重南倭又叛制邊之機倍緊平時也壬申冬轉左議政癸酉春進領議政上眷倚益重公懼盛滿思欲退休乞解職事者屢而未蒙允兪愈懷兢夏感疾痼復上書辭退上賜批答不允續遣中使問疾又賜冠服珍寶仍御書以示憂念之意公益增感激因付奏求退之情甚切以久病曠職爲憂勅家人勿受祿上知之敦諭然後乃受至七月癸巳疾移于正寢上聞危甚遣承旨馳問所欲言對曰願聖上用賢納諫而已中使繼至示御書曰今聞卿證予甚痛惻卿子特陞堂上資以示予罔極之情時公幾屬見御書僅出聲曰官爵當愼重聖恩寧宜至此中使踰而公卒壽五十三噫公之勳庸德量高出一代衆方仰其陶甄而年쫝過知命仁不得壽慟哉公資通明氣宇宏豁仁厚忠孝以立其本剛毅果斷而勇於行治經史通貫體用與人交以忠信相勉勵不友不善其學問切磋之功所以自得之者大而深遂能充養志氣成就德性發而措諸事建諸議明白正大不爲威休不爲私撓立朝三十年所皆著聲績卒建不世之勳以濟屯蹇曆國祚於盤石眞古人所謂社稷臣也治家簡不殖貨利不廣田園雖位冠台鼎而不有富貴常以淸素自守事慈親色養無違日定省不怠誠孝純至敦恤宗族疎遠咸得其恩好賢樂士人有一長若已有接引後進開布心復未嘗外爲顔面自燕山多殺論諫之臣士心沮至聖朝初直氣猶未振或有盡言論不諱者公每奬進又勸 上優容諫官雖身被彈章不爲怒唯冀其公論之復伸士亦以此恃賴咸思自效及纏疾心氣已遇賓戚侯問猶以國事爲言略不及私及歿訃聞上震悼轍朝三日遣中使以吊賻祭特厚易名曰忠定公쫝公卿以下咸造門喪事殯成乃退雖窮巷愚稚莫不哀傷痛惻百司之祭殯者繼踵嗚呼天旣

生之運其忠義才智之用以寧濟時艱何不壽其仁厚宏大之氣留相我聖君久布其德政而奪之速耶然隆功盛德及人者深口誦而耳傳將永世不泯豈依違自保虛負名位者比倚乎哉是爲不亡也夫越十月辛酉官葬具于楊州治西西山里亥坐巳向之原先考公塋兆之內公娶贈

司憲府掌令趙益祥女生一男三女男靖國功臣歷官尙衣院僉正女皆幼副室有二男一女亦幼娶宗室德津君濊之女生二女幼葬克襄嗣子哀慕追號而不及旣無可更爲則願樹石勒銘表揚幽墟謂用漑於公相信有舊分請爲文記實以詔後噫公之勳德在太史不須碑然無是不足以示廣大遂爲銘曰

國步机陷天命斯去維臣及庶靡所莫處不有聖作宗社何賴天眷睿智轉否爲羽翼鱗實仗忠賢斡天整地功孰公先大厦之傾公爲柱石生靈胥溺公作舟楫棒日乘軋功高伊藿滌昏明寬以代虐心恢河海德氣內充垂紳廟廊相業外隆忠義之經綸之手蘊深發大有爲有守夷吾一匡仁而器小姚元通名德獨少公心事高邁古賢殷有阿衝闕美奚專國倚樑棟人仰龜彼蒼何心而以遺有仁無壽愚智同丘惟德與功名永長流楊有西山是公幽堂刻石載德以告無疆

 

 

[번역문]

 

유명 조선국 병충 분의 결책 익운 정국 공신 대광 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 경연 춘추관 예문관 관상감사 병조 판서 창산부원군 충정공 성공 신도비명 병서

숭정대부 의정부 우찬성 겸 지경연사 판의금부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춘추관 성균관사 신용개(申用漑)는 글을 짓고,

조산대부 행 의정부 검상 겸 춘추관 기주관 승문원 교리 김희수(金希壽)는 글을 쓰다.

하늘이 큰 사람을 낼 때는 그 사람에게 큰 일을 맡기려는 것이다. 이미 성스러운 임금을 내려고 할 적에 무겁고 험한 직위(職位)를 지게 하셨다. 반드시 충성된 슬기와 재덕(才德)이 있는 자를 주어 앞뒤가 제대로 된 연후에 공(功)을 이루기 쉽고 덕을 펴기가 쉬우니 이는 하늘이 우리 성군(聖君)을 내어 충정공(忠定公) 같은 분이 나왔도다.

공의 성은 성(成)이요 이름은 희안(希顔)이요 자는 우옹(愚翁)이니 창녕(昌寧) 사람이다. 고조 할아버지의 이름은 사달(士達)이니 추충 협리 공 신 중대광 예문관 대제학 창산부원군이요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이분이 첨지중추부사 부(溥)를 낳으셨는데 자헌대부 병조 판서를 증직받으셨고, 판서공이 사온 직장 동정 효연(孝淵)을 낳으셨는데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을 증직받으셨다. 찬성공이 돈녕부 판관 찬(瓚)을 낳으시니 순충 적덕 병의 보조공신 대광 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 춘추관 예문관 관상감사 창천부원군을 증직받으셨다.

판서공 이하모두 증작(贈爵)된 것은 공의 훈질 때문이다. 창천군은 덕천군 후생(厚生)의 딸을 아내로 삼았는데 작호는 정경부인이니 덕천군은 곧 공정대왕(정종)의 아들이다. 천순 신사년(1461, 세조 7) 정월 갑자생이니 공이 태어날 때에 어머니가 꿈을 꾸매 노인이 지팡이를 주면서 말하기를 “이것을 받으면 집에 복과 재산이 흥창하리다” 하였다. 이미 나셨을 적에 범상치 않았다. 총명하고 바탕이 시원하며 너그러운 기상이었다. 어려서 장난할 적에 자칭 대장이라 하고 포진하고 명령을 내려 아이들을 지휘하니 아이들이 다 따르고 어김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글읽을 줄을 알아 학문이 점점 진취하여 문사가 숙성하였다. 성화 경자년(1480, 성종 11)에 생원시를 하고 을사년(1485, 성종 16)에 과거를 하여 예문관 검열 겸 춘추관 기사관이 되었고, 곧이어 홍문관 정자와 부수찬이 되었다. 그때에 성종이 글을 좋아하여 선비를 중히 여기매 공이 신진으로 발탁되어 경학의 고문이 되어서 많은 보좌를 하니 성종이 중히 여겼다. 홍치 신해년(1491, 성종 22)에 어머니상을 당하여 여묘 3년을 하였는데 아침 저녁·초하루 보름 제사와 명절 제사에 몸소 전을 올려 조금도 꺼리는 바가 없고, 일찍이 아우 희옹(希雍)과 더불어 산채를 뜯어 공양하고자 할 때 마침 몸이 피로하여 바위에 누웠는데 꿈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도적이 온다고 소리치므로 깜짝 놀라 깨어보니 큰 호랑이가 가까이 오는지라 곧 돌을 던져 쫓으니 사람들이 이르기를 “효성으로 인함이라” 하였다. 복을 벗으매 예빈시 주부로 배하시고 성종이 합문까지 불러 말씀하시기를 “그대는 상중에도 부모를 봉양함이 효성스러웠다” 하면서 이에 사냥매를 하사하면서 말하기를 “내 들으니 그대는 노모에게 맛있는 음식 올리는 것을 빠뜨리지 않았다하니 특별히 이것을 하사하노라” 하였다. 얼마후 사간원 정언을 배하였고, 시강원 사서로 옮겼다가 홍문관 수찬이 되고 교리로 승직을 시켰다. 한어 이문 질정관(漢語吏文質正官)으로 중국에 갔다가돌아올 적에 비단옷을 주시매 감히 입지 않고 모부인에게 바쳐 동생 혼수로 쓰셨다. 병진년(1496, 연산군 2)에 병조 정랑을 배하고 무오년(1498, 연산군 4)에는 사섬시 첨정으로 승직을 시키고 한성부 서윤 광흥창 수로 옮겼고, 때로 옥사를 다스리는데 너무 엄하여 착한 사람이 비명에 갈 때에와 유자광이 국문을 할 때 거짓 법망에 걸리는 사람이 많은 지라 공이 달래며 구원해 주기를 많이 하였다. 유자광이 그를 시기하여 큰소리로 공을 가리켜 딴 무리라 하여 공을 궁지로 몰아넣고자 하는지라 공이 변론하매 정직하여 모든 따르는 관리들이 다 공이 옳다고 하였다. 유자광이 마침내 억지를 행하지 못하게 하였다.

예빈·군기시 정을 지내고 또 내섬시 정을 배하였다. 경신년(1500, 연산군 6) 여름에 조정이 남도에 흉년든 것을 걱정하여 공으로 하여금 구휼하게 하니 공이 진심으로 백성을 구제하여 모두를 살리니 군기시 정 벼슬을 다시 배하였다. 신유년(1501, 연산군 7)에 유구국1)에서 사신을 보내올 적에 공이 선위사로서 응접하여 사신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였는데 하루는 압연관(押宴官 : 연회를 주관하는 관리) 영의정 한치형이 잔치에 참가한 사신들에게 말하기를 “선위사의 어짐은 마땅히 재상자리에 앉을 사람인데 관이 나보다 낮습니다” 하니, 사신들이 공경하여 마지않았다. 임술년(1502, 연산군 8) 겨울에 형조 참의와 통정대부를 배하시고 계해년(1503, 연산군9) 여름에 사은사로 중국에 가서 가을에 돌아오시니 예조 참의가 되었다. 갑자년(1504, 연산군 10) 여름에 형조 참판 가선대부가 되시고 얼마 안되어 가정대부 이조 참판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이 되었다. 때에 연산주가 포악하여 도를 잃으매 매일 이것을 걱정하였다. 연산주가 양화도 망원정에 나와 여러 신하를 데리고 글을 지으라 하니 공이 연산주를 풍자하는 글을 지었는데 연산주가 노여워하여 꾸짖어 나가라 하니 다른 사람이 크게 불측한 화를 만날까 두려워 하였다. 공이 대답을 하고 나오니 부사용의 서반 말직으로 좌천되었다. 그리하여 3년 동안 부르지 않았는데, 때에 간신 임사홍이 연산주를 유혹하니 연산주의 마음이 날로 음란하고 사나워 공사를 불문하고 방탕하여 향락에 흥청거려, 마치 그 모양이 마른 하늘에 여러 관청을 세워 놓고 큰 소리로 그 등급을 부르는 것 같았다. 낮과 밤으로 황음연을 베풀고 토목공사를 크게 벌려 국가 재정을 탕진시키고 서울에 다리를 놓는다고 민가를 헐고, 또 전답은 말달리고 노는 곳으로 만들었으며, 또 사람의 출입을 금하고 어기는 사람을 그 자리에서 목을 베었다. 또 사방에서 말과 개, 화초 등 진귀한 짐승들을 모아놓고 자기를 간하는 자는 죽이고 귀양을 보냄은 물론 무뢰배를 부르고 족친에 대하여 음란한 행동을 하고, 내외 사대부 집안의 처자와 재물을 빼앗음은 물론 선성·선사의 사당을 유희장으로 만들었으며 3년복을 입는 자와 수군대는 사람에게 중벌을 가하여 부역은 번잡하고 법과 기강은 추락되었으며, 사람마다 손만 흔들어도 죄를 당하니 조야가 내일을 예측할 수 없었다. 백성들은 기근이 들어 원망이 쌓여 변란을 일으키는 데도 조정의 대신들은 서로 바라보기만 할 뿐 어찌 할 바를 몰랐다. 공은 비록 한가롭게 거처하면서도 항상 나라를 걱정하여 때때로 몸둘 곳을 모르고 이곽의 뜻2)을 품고 은밀히 박원종(朴元宗)·유순정(柳順汀)과 같이 성주 추대하기를 상의하여 병인년(1506, 연산군 12) 9월 초2일에 거사하여 혼미한 군주를 폐하니 대소의 신하와 백성들이 호응하였다. 때에 자순왕대비에게중종을 추대하고 연산주를 폐할 것을 아뢰었다. 그 다음날 중종을 사저에 모시고 보위에 오르시게 하였다. 대사령을 내리고 귀양간 사람과 원통히 죽은 사람을 후대하였다. 이에 만백성이 만세를 불렀다. 중종께서 병충 분의 결책 익운 정국공신의 호를 주시고 정헌대부 형조 판서를 배하시고 창산군을 봉하였으며, 10월에는 숭정대부 겸 판의금부사로 승급시켰다. 이때는 혁명초기라 인정이 의심이 나서 마음이 불안하여 옥사가 많으매 공이 너그럽게 사람을 대하여 죄를 가볍게 다스리니 백성이 비로소 편안하였다. 얼마 안있다가 보국 숭록대부 창산부원군 겸 영 경연사 이조 판서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제수받았다. 중종이 명나라 황제에게 반정(反正) 사실을 고하고 정묘년(1507, 중종 2) 9월에 인준을 받아 돌아오니 임금이 특별히 그 노고에 대한 보답으로 전토를 하사하시었다. 이해에 공으로 하여금 좬연산일기좭 편찬을 주관케 하였다. 기사년(1509, 중종 4) 가을에 의정부 우의정을 배하시고 또 대광 보국으로 올랐다. 경오년(1510, 중종 5) 여름에는 병조 판서로서 군국사를 통할하였으며, 남왜(南倭)가 또 배반하니 군대를 독찰하여 평정하였다. 임신년(1512, 중종 7) 겨울에는 좌의정으로 전위하시고 계유년(1513, 중종 8) 봄에는 영의정을 제수받았다. 임금이 더욱 후대하니 공이 너무 과분함을 두려워하여 향리로 돌아가고자 하나 임금이 허락치 않고 더욱 중히 여겼다. 여름에 감기로 병환이 나서 또 임금에게 사퇴서를 올리니 승낙치 아니하시고 중사(中使 : 왕명을 전하는 내시)를 보내어 문병하고 관복과 귀중품을 하사하고 글을 보내어 위로하니 공이 더욱 감격하여 또 임금에게 물러가기를 상소하였다. 병이 더욱 중하여 직책을 감당치 못하여 또 상소를 하시고 가인으로 하여금 녹을 받지 않게 하였는데 임금이 이것을 알고 재차 보내니 비로소 받았다. 그해 7월 계사에 병이 위중하여 세상을 떠나셨다. 임금이 병이 심하다는 말을 듣고 듣고 승지를 보내어 유언을 물으니 “성상은 어진 사람을 등용하시고 간하는 소리를 잘들어 주시오”라고 하였다. 중사가 보고하니 임금이 어서로 가로되, “경의 병이 위중하다 하니 내가 매우 슬프다. 경의 아들 율()을 특별히 당상에 올려서 나의 망극한 정을 표시하노라” 하였다. 때에 공이 이미 운명지경에 어서를 보고 말하기를 “관작은 마땅히 신중히 해야 되는바 성은이 이에 이르렀다” 하시면서 운명하였다. 향수는 53세이다.

  슬프다! 공의 훈공과 덕행이 높아서 일대에 우러러보고 그 재량이 훌륭한데 수를 못하니 슬프다. 공의 자품이 통명하고 기우가 넓고 어질고 충성되고 효를 하여 근본을 세워 놓고 굳세고 과단성이 있어 다스리고 행하는데 용맹스럽고 경전과 사서에 두루 통하고 사람과 사귈 때는 충성되고 믿게 하였으며, 그 학문과 연마하는 공은 스스로 얻은 바 크고 넓어 능히 지기(志氣)를 충실히 기르고 이루어놓고 일은 견실히 하고 의논은 명백하고 정대해서 사사로이 흔들림이 없었다. 입조한 지 30여 년에 그 맡은 바가 다 성취되어 세상 사람들이 못하는 공을 세워 어렵고 고난한 일은 다 처리하고 나라를 반석에 올려 놓았으니 참으로 예전에 이른바 사직을 받든 신하라고 할 만하였다. 집안을 다스릴 때에는 검소하고 재물을 생각치 아니하시고 전토를 넓히지 아니하고 지위가 비록 영의정에 이르렀음에도 부귀에 탐내지 않고 항상 청렴결백하시고 어버이 섬김에 항상 혼정성신의 자세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원근 종족을 구휼해서 다들 은혜를 알았다. 어진 사람을 좋아하시고 사람의 한 가지 장점만 있어도 자신의 일처럼 좋아하였다. 후진을 일깨워주시고 한 번의 안면이 없는 사람도 친절히 대해서 나와 같이해주셨다. 연산군이 간하는 신하를 많이 죽이니 선비들이 꺾이고 막혔으나, 중종초에는 곧은 기개는 있으나 오히려 떨치지 못했거나 혹은 능력은 있으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선비들을 공은 매양 장려하였다. 또한 임금에게 권하여 간관을 우대하게 하고 공이 비록 몸으로 탄압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노하지 않고 오직 공론이 돌아오길 기다렸으며, 선비들 또한 공을 믿고 따랐다. 자신의 몸이 아픈데도 불구하고 가난한 친척을 만나면 오히려 문후를 물었다. 나라의 일로 이야기할 때에는 집안의 일은 생략하였다. 임금이 부음을 듣고 놀라고 슬퍼하여 3일 동안 조회를 열지 않고 중사를 보내어 조문을 하시고 특별히 충정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조정 대신으로 하여금 다 빈소에 조상케 하고 비록 항간의 초목동자라도 슬퍼하지 않는 바가 없었다. 슬프다! 하늘이 충성되고 훌륭한 재목을 내셨는데 훌륭한 기로 임금을 도와 덕정을 펴도록 할 때 어찌 세상을 그렇게도 빨리 뜨셨는가. 그러나 그 높은 공덕이 사람에게 미친 바 널리 입으로 전해졌으며 그 공이 영세불멸하니 어찌 헛되이 보냈다고 하리오. 10월 신유에 관에서 비용을 대어 양주 치소의 서쪽 서산 마을에 장사지내니 장지는 동남향 언덕의 선영 안이다. 공의 부인은 증 사헌부 장령 조익상(趙益祥)의 딸이다. 1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율()이니 정국공신으로 참가하여 상의원 첨정을 지냈다. 딸은 어리고 부실에 2남 1녀를 두니 또한 어리다. 율의 부인은 종실 덕진군 예(濊)의 딸이며 2녀를 두었으나 어리다. 사자 율은 슬퍼하여 비를 세우고 친분이 있는 나에게 비문을 청하므로 사실을 기록하여 후대에 널리 알리노라. 슬프고도 슬프다. 공의 훈덕이 나라 역사에 실려있는데 비문이 꼭 필요치 않으나 그 광대한 것을 알리매 이에 비명을 하노라.

나라가 위태로움에 하늘이 공을 명해서

여러 신하와 관민이 우러러 높이지 않는 자가 없더라.

성군이 나지 않았으면 종사가 어떻게 되었겠는가.

하늘이 밝고 뛰어난 지성을 내고 또 날개를 더했도다.

하늘을 방패삼고 땅을 정돈했는데 공이 주춧돌이 되었도다.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는데 공이 배가 되었도다.

나라가 기울어져 가는데 그 공은 이곽(伊)보다 더 높더라.

마음이 하해같고 덕이 천지에 미치더라.

종묘사직을 받들고 충의는 천지에 차도다.

경륜하는 수완은 천지에 쌓였도다.

관중이 천하를 밝혀 어질기는 하나 그릇은 적고

요원은 사물에는 밝으나 덕은 적더라.

공의 심사를 생각하면 옛 선현보다 높으도다.

은나라의 하구는 그 아름다운 일을 어찌 혼자 다 하였던가.

공은 나라의 대들보요 사람으로는 기구(龜 : 경륜과 식견이 뛰어난 노인)같이 우러러 보더라.

저 푸른 하늘은 무슨 마음으로 수를 적게 내리셨는가.

인은 있어도 수가 적으니 어리석은 사람이나 지혜로운 사람이나 죽음은 같더라.

오직 덕과 공은 길이 유전하도다.

양주 서산에 장사하였으니 공의 유택이로다.

비에 재덕을 새기나니 길이 무강하소서.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항용
작성일

  현 자료는 금일 9시 이전에 올린 것이고, 신도비 원문 전체와 번역문을 수정하여 10:00시경에 다시 올렸는데, 금일 오후 2시 경 서버사의 데이터 베이스에 이상이 발생, 서버 비상근무자에게 이를 알려, 금일 9시 기준 백업 자료를 오후 4시 30분 경에야 다시 복구되었습니다.
 때문에 9시 이전 자료가 올라와 있습니다.
밖에 있습니다. 다시 올리겠습니다.

상석님의 댓글

profile_image 상석
작성일

  오후 두시 무렵 게시판만 접속이 안됐어요!.혹시 무슨,사태가 있는가?,불안이 잠시 엄습했습니다.다행입니다.주 중에 끼어 있는 모처럼만의 달콤한 휴일에 이런일이,수고하셨습니다.

김행순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행순
작성일

  2시쯤 게시판 접속 안 되기에 지난 산행 때 발용님께서 주신 "양주향통사자료총람" CD를 열어봤어요. 운동 후 졸립던 차에 잠이 확~ 깼어요.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김항용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항용
작성일

  다시 정상의 자료를 올렸습니다.

솔내님의 댓글

profile_image 솔내
작성일

  성희안 신도비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