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동고공(휘 노) 필적---한세환(韓世桓) 신도비

페이지 정보

김태서 작성일05-05-15 11:18 조회1,532회 댓글3건

본문

有明朝鮮國資憲大夫吏曺判書兼五衛都摠莩摠管  贈諡恭簡公神道碑銘幷序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兼領  經筵事監春秋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

成均館事李荇  撰

及第金魯  書
(後略)

유명 조선국 자헌대부 이조 판서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 증시 공간공 신도비명 병서

대광 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 겸 영 경연사 감춘추관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성균관사 이행(李荇)은 글을 짓고,

급제 김노(金魯)는 글을 쓰다.
(후략)


【성 명】 한세환(韓世桓)
【생몰년】 1470(성종 1)∼1522(중종 17)
【본 관】 청주(淸州) 한(韓)
【자·호】 공서(公瑞)
【시 호】 공간(恭簡)
【저서·작품】 《성종실록(成宗實錄)》
【시 대】 조선 중기
【성 격】 문신

1470(성종 1)∼1522(중종 17).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공서(公瑞)로 한운(韓運)의 아들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492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3년 후 증광문과의 병과에 급제하여 정언(正言)을 제수받았다. 1499년에 봉교(奉敎)로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이 되어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하였으며 지평 · 부응교를 거쳤다. 1507년에 대사간이 되었으며 1516년 7월 16일에는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 이듬해 7월 28일과 1519년 3월 15일에는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취임하였다. 기묘사화 직후 추죄(追罪) 때에는 좌참찬(左參贊)을 지냈고 곧이어 이조 판서(吏曹判書)가 되었다. 이 무렵 대사헌 이행(李荇)이 문종비(文宗妃)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을 세조(世祖)가 파릉(破陵)한 것을 복구한다는 여론을 반대하였는데 성종이 대사헌을 경질토록 명을 내리자 그는 여론과 상관없이 묵묵히 이행한 후 당진군(唐津郡) 면천면(沔川面) 창택리(滄澤里)의 전답을 관리하는 노복으로 하여금 수확량의 절반을 근처에 있는 이행의 집으로 보내놓고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공손하고 신중하며 꿋꿋한 자세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1522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재임중 사망하였다. 시호는 공간(恭簡)이다.

【참고문헌】 燕山君日記, 中宗實錄, 國朝人物考, 龍泉談寂記, 己卯錄續集, 己卯錄別集, 新增東國輿地 勝覽
【관련항목】 한두(韓數)

댓글목록

김은회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은회
작성일

  감사합니다.

김항용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항용
작성일

  묘소가 어디에 있는지---

김태서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태서
작성일

  ▲한세환(韓世桓,1470-1522)묘 양주군 장흥면 삼상리 산59-9 훈이농장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청주(淸州)  시호 공간(恭簡)
성종23년(1492) 사마시에 합격한이후 춘추관 기사관으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고 중종2년(1507) 대사간을 거친후 이조와 호조의 판서 및 함경도 경상도 관찰사를 거쳐 중종 15년에 左贊成에 올랐다가 지중추부사로 있을 때 세상을 떠났다.


♠송질(송질,1454-1520)묘 양주군 은현면 선암리 능골(능동)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여산(礪山)  시호 숙정(肅靖)
      자 가중(加仲)
성종8년(1478)에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참판 경기도관찰사등을 역임하고 중종8년(1513)에 우의정 뒤에 영의정에 올랏다.
1506년 중종반정때는 정국공신3등이 되고, 여원부원군(礪原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영의정이 된 이듬해에는 탄핵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