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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재공께서 부산 동래의 낙안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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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5-06-02 13:08 조회1,578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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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재공(휘 希壽)의 위패가 부산 동래의 <樂安書院>에 배향되어 있다는 정문연의 <디지털한국학>기록을 확인하기 위하여 부산의 여러 곳을 찾다가 부산 동래의 충렬사와 안락서원을 함께 소개하고 있는 홈페이지(http://www.busanurim.org/)를 찾았습니다.

아마 安樂을 樂安으로 잘못 기술한 것이 아닌가 해서입니다.

그런데 이 서원은 임란때 공훈이 있는 분들을 배향하고 있는 곳으로서 소개자 명단에 우리 선조님은 없었습니다.  

이에 전화(동래 향교)로 물으니 분명 金希壽란분이 낙안서원에 배향되어 있답니다. 놀라 본관을 물으니 김해김씨 경파 후손이라고 합니다. 아마 정문연에서 동명이인을 확인하지 않은 실수였던 것 같습니다.

 약간은 실망했습니다만 정문연의 한 실수가 우리 홈페이지를 비롯하여 그동안 얼마나 많이 확장돼 있을지 모르며 국가적으로 운영하는 홈페이지나 문헌의 기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일단 종전 우리 홈의 내용중 상기 <낙안서원> 배향 내용은 삭제하겠습니다.

 

*종전의 유연재공 소개 내용

 

김희수(金希壽) 1475(성종6)∼1527(중종22).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몽정(夢禎), 호는 유연재(悠然齋).
할아버지는 감사 자행(自行)이며, 아버지는 숙연(叔演)이다. 1507년(중종 2) 참봉(
參奉)으로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뒤 이듬해 검열 권벌(權벌), 봉교 이희증(李希曾)·김영(金瑛), 대교 윤인경(尹仁鏡) 등과 함께 무오사화에 대해 논계(論啓)하고 김종직(金宗直)의 억울함을 풀어주기를 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또, 왕은 천륜에 따라 덕치정치를 행하여야 하는데, 이를 위하여 측근의 신하들이 필요하고 간언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충언하기도 하였다. 그뒤 1509년에 정자·박사가 되고, 이어 지평
(持平)·검상이 되었다.
1514년 장령
(掌令)을 지냈으며, 1517년 집의·참찬관 등을 거쳐 1520년 우부승지, 이듬해 좌부승지가 되었으며, 1524년 도승지(都承旨)를 거쳐, 이듬해 대사헌과 경상도 감사로 나갔다. 그때 그곳의 사송(詞訟)이 적체되었다 하여 중앙에서 문제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1527년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동래(
東萊)의 낙안서원(樂安書院)에 제향되었다. 글씨에 뛰어났는데 특히 해서(楷書)에 능하였다. 글씨로는 〈계주문 戒酒文〉·〈영상 김수동비 領相 金壽童碑〉·〈영상 성희안비 領相成希顔碑〉등이 있다.

 

댓글목록

김재이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재이
작성일

  잘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