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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벽루 창건자명 정정 요청 자료(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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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5-06-10 08:25 조회1,507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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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함벽루 창건자명 수정 및 확인 과정

 가.문화재청 홈페이지의 수정 요청 과정

  1)문화재청에 수정 건의문 요청 내용 (2004. 5. 25. 안동김씨 사이버학술연구회 김윤만님 이메일 건의 내용)

 <전략>

지금까지 함벽루(涵碧樓)를 창건하신 분이 ‘상락공(上洛公)의 아드님 김군’이라 하여 상락공(上洛公)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커다란 오류(誤謬)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역주 고려묘지명집성(하)>(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간. 김용선. pp725~731)의 문영공(文英公) 김순(金恂) 묘지명을 살펴보니 문영공(文英公)의 장남이신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영돈(金永暾)께서 충숙왕 8년(1321년)에 지합주사(知陜州事)였음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고, 문화관광부에서 제공하는 함벽루(涵碧樓)에 대한 자료에도 분명히 함벽루(涵碧樓)의 창건자는 ‘고려 충숙왕 8년(1321)에 합주 지주사 김모가 지었다’고 되어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부 간본 아정유고 제3권 기(記) 가야산기(伽倻山記)에도 ‘함벽루를 지은 사람은 여러 대 훈신(勳臣)이었던 상락군(上洛君)의 맏아들 김후(金侯)였다 한다’고 되어 있어 <상락군=문영공 김순, 맏아들 김후=장남 상락부원군 김영돈>이 일치하고 있음을 습니다.

 따라서 함벽루(涵碧樓)를 창건하신 분은 충숙왕 8년(1321년) 그해 합주지사를 지내신 상락부원군 김영돈(金永暾)이 분명하다고 판단됩니다.

 공사다망하신줄 알고 있으나 이러한 사실을 한번 확인해 주시기 바라오며 제 주장이 바르다면 향후 함벽루(涵碧樓)에 대한 안내문에 합주지사 '김모(金某)'가 아닌 안동인(安東人) ‘김영돈(金永暾)’ 으로 바로잡아 주실 것을 건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 문화재청 회신 내용 (2004. 6. 2. 문화재청 문화재 정책과 박희웅님 회신 내용)   

  안녕하십니까? 문화재청 문화재정책과에 근무하는 박희웅입니다.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깊은 관심과 연구에 감사드립니다.

  우리 청 홈페이지상의 시도지정문화재에 대한 설명 자료는 문화재의 지정관리권자인 당해 지방자치단체로부터 관련 자료를 제출받아 게재한 것이며, 우리 청은 현재 시·도로부터 관련 자료를 제출받아 홈페이지상의 오류 및 누락부분에 대한 수정 보완 작업을 추진하고 있으나 자료가 방대하여 늦어지고 있음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질의하신 내용에 대해서는 동 문화재의 지정관리권자인 경상남도에 통보하여 경상남도의 검토의견이 도착되는 즉시 수정 보완을 하겠사오니 이점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앞으로도 우리문화유산에 대한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2004.     6.     2.

                    문화재정책과 박희웅 (042-481-4816)



나. <합천신문>의 함벽루 관련 연재 기사내용과 확인과정

 1)) 2004. 8. 26. 기사.

 함벽루』김방경의 손자 金永暾이 세웠다

 碑文발견 확실,

(구)안동김씨대종회 김항용씨가 본사에 알려와 지금까지 함벽루(涵碧樓)를 창건하신 분이 상락공의 아들 김흔이 아니라 손자 김영돈(金永暾)으로 명명백백하게 밝혀졌다. 지난 21일 안동김씨 대종회 김항용(金恒鏞, 안동김씨 홈페이지 운영자)씨가 밝혀 온 바에 의하면 함벽루를 창건한 분은 ‘상락공(上洛公)의 아드님 김군(김흔)’이 아니라 다른 아들 문영공 김순(金恂)의 아들 김영돈(金永暾)임이 확실하다고 전해 왔다.

꼼작 못하는 근거로 문영공(文英公) 김순(金恂) 묘지명을 살펴보니 문영공(文英公)의 장남이신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김영돈(金永暾)이 충숙왕 8년(1321년)에 지합주사(知陜州事)였음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또한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부 간본 아정유고 제3권 기(記) 가야산기(伽倻山記)에도 ‘함벽루를 지은 사람은 여러 대 훈신(勳臣)이었던 상락군(上洛君)의 맏아들 김후(金侯)였다 한다’고 되어있어 <상락군=문영공 김순, 맏아들 김후=장남 김영돈>이 일치하고 있다.’고 증언했다. 따라서 함벽루(涵碧樓)를 창건하신 분은 충숙왕 8년(1321년) 그해 합주지사를 지내신 상락부원군 김영돈(金永暾)이 분명하다.

 김순(金恂) 묘지명에는

 --<전략>-- 장남 영돈(永暾)은 지금(☞충숙왕 8, 1321) 도관직랑 지합주사(都官直郞 知陜州事)이고, 차남 영휘(永暉)는 지금 흥위위 보승별장(興威衛 保勝別將)이며, 3남 사순(思順)은 머리를 깎고 자은종(慈恩宗)의 대덕(大德)이 되었으며, 4남 영후(永煦)는 사헌지평(사헌지평)이 되었다.

  (문화부=박환태발행인)


  2) 2004. 9. 2. 기사.

 함벽루와 金永暾과 安震을 말한다1 -합천군향토사학회 學山 朴 煥 泰

 합천신문사의 역사는 내년이래야 10년이 된다. 그러나 비교적 日淺한 역사에 비해 그동안 우리 신문사가 발굴한 향토사로 地理名士 杜士忠, 가야산 만수동, 야로 쇠평의 가야시대 야철지, 李屹선생의 피난지 莫愁洞, 吾道山 智谷寺址, 쌍백 森里 고려장터 등 수도 없이 많다. 그중에서도 제일로 손 꼽는다면 涵碧樓를 창건하고 樓名을 지은 累世 功臣 上洛公의 令胤이 金永暾 知陜州事임을 밝힌 것이다.

 햇수로 치면 2년정도 되었는가 보다. 함벽루상의 시를 연재하면서 함벽루를 세운 태수가 상락공의 영윤이라고 安震의 기문에 나와 있어 잘 하면 700년동안 찾지 못했던 창건자를 찾을 수 있다는 생각에 연구에 착수했다. 먼저 上洛公의 上洛이란 말이 경북 尙州의 고호임을 밝혔다. 그다음 上洛公이 그 유명한 고려의 명장 김방경(舊안동김씨 중시조)上將軍임을 밝힐 수 있었다.

 上洛公 김방경을 찾았으니 그 아들 찾기는 식은 죽 먹기로 알았다. 김방경의 아들은 선, 흔, 순, 론, 돈 등 5형제를 두었다. 그중 知陜州事를 지낸 아들만 찾으면 700년 동안 찾지못한 함벽루 창건자를 내가 밝힌다는 생각에 알 수 없는 희열과 감격으로 몸이 다 떨릴 정도였다.

 그러나 다섯아들을 다 찾아보아도 합천태수를 지낸 사람은 없었다. 아니 정확한 기록이 없다고 해야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 둘째 아들 김흔이 知晋州事를 지낸 사실을 밝혔다. 그래서 합주와 진주는 붙어 있으니 김흔외에는 지목할 사람이 없었다. 바로 이것이 큰 誤謬를 범한 것이다.

문제 해결의 열쇠는 역시 대마도 정벌의 고려 名將 김방경의 문중인 舊안동김씨들이 밝혀 냈다. 인터넷에서 우리 합천신문의 홈페이지를 검색했던 모양이다. 우리 신문 홈페이지를 검색하기 전에는, 함벽루를 자기들 선조가 세운 줄 몰랐으리라. 우연히 김방경을 검색하다 우리 신문의 『함벽루는 태수 김흔이 세웠다』는 글을 보고 연락을 해 왔다.

함벽루를 창건하고 함벽루라 명명한 김영돈은 김방경 상장군의 세째아들 金恂의 아들이다. 그러니까 元祖 상락공 김방경의 손자인 셈이다. 김방경의 세째아들 김순은 4형제를 두었다. 김순이 逝去할 당시<충숙왕 8년, 1321> 장남인 永暾은 都官直郞 知陜州事이고, 차남인 영휘(永暉)는 興威衛 保勝別將이며, 3남인 사순(思順)은 머리를 깎고 慈恩宗의 大德이 되었으며, 4남 영후(永煦)는 司憲지평이었다.

 그러면 함벽루를 창건한 김영돈의 아버지 제2대 상락공 김순은 누군인가 부터 설명해야 겠다. 김순<金恂, 1258(고종 45)∼1321(충숙왕 8)>은?고려의 문신으로 자는 귀후(歸厚), 金方慶의 3子이다.??1279년(충렬왕5. 22세) 文科에 급제하고 이듬해 重試에서 趙簡의 榜下에 2등으로 들어 郎將이 되었다. 그 후 學士로 추천되어 直講이 되었다.??충렬공이 일본 원정을 나갈때 공도 종군하고자 했으나 충렬공은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공은 몰래 배에 올라 종군하고 돌아왔고 殿中侍御史가 되었다. 여러번 밀직부사에 추천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297년 左副丞旨, 이듬해 左丞旨를 거쳐 密直副使로 있다가 사퇴했으나 같은 해 光政副使·承旨·成均祭酒를 거쳐, 右承旨 寶文閣學士 知民曹事에 이어 三司 左辭에 올랐다. 1312년(충선왕4) 重大匡 上洛君에 봉해졌고, 1321년(충숙왕 8) 判三司事가 되었다. 그 해 8월 24일 졸하였고 수는 64세이며 시호는 文英公이다.

  공은 성품이 관대하고 후덕하였으며 隸書를 잘 썼다. 만년에는 소리하는 기생들을 키웠으며, 나날을 현악기와 관악기 연주로써 낙을 삼았다. 이런 사적은 고려사 列傳과 여지승람에 보인다. 익재 이제현이 부인의 묘지를 찬하였는데 東文選에 보인다. 1942년 봄에 지석이 구묘지인 경기도 개풍군 임계면 가정리 마산 뒷산 언덕에서 발견되어 1943년 봄에 경기도 안양시 관양동 뒷산 艮坐에 遷奉하였다.

 문영공 金恂의 필적인 1298년(충렬왕24년 무술)에 세운 <대구 팔공산의 동화사 홍진국사비>, 1314년(충숙왕1, 연우1) 2월에 원나라 강절행성 항주로에 위치한 고려 혜인사에 세운 비문 高麗國僉議贊成事元公捨大藏經記와 1306년(충렬왕26, 대덕10)에 강원도 淮陽府 금강산에 세운 高麗國大藏移安記가 있으나? 현재까지 그 소재를 찾지 못하고 있다.(계속)


  3) 2004. 9. 9. 기사

함벽루와 金永暾과 安震을 말한다2 -합천군향토사학회 學山 朴 煥 泰


 이제 꼼작할 수 없는 증거인 김순<1258(고종 45)∼1321(충숙왕 8)>의 묘갈명을 보자.

.....(前略) 그 달 21일에 노환으로 자택에서 별세하시니 향년 64세이다. 공은 성품이 敦厚하고 剛直하고 內柔하시며 孝悌와 忠信은 천하에 出衆하였다. 아깝도다! 공의 才德으로 만일 몇 해만 더 사셨더라면 국가의 이익과 혜택이 어찌 萬民에 미치지 않았으랴, 명예와 지위도 어찌 이에서 그칠 뿐이랴?

.....(中略) 配는 匡靖大夫 僉議中贊 修文殿太學士 監修國史 判典理司事 世子師 贈諡 文敬公 許珙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4남3녀를 낳으셨는데 장남 永暾은 현재 도관직랑 지합주사(都官直郞 知陜州事)로 있고 2남 永暉는 현재 興威衛 保勝別將으로 있고 3남 斯順은 삭발하고 자혜종 대덕이 되었고, 4남 永煦는 사헌부 지평으로 있다.

.....(中略) 장녀는 入內侍 中正大夫 親禦軍大護軍 정책에게로 출가하고 2녀는 大匡 上黨君 백이정에게 출가하고 3녀는 원나라 左丞相 阿忽反의 아들인 舍人 別里哥不花에게로 출가하였다.

.....(中略)大元至元 元年 辛酉(1321년) 十월 十四일 宣授 朝烈大夫 翰林直學士 三重大匡 檢校 僉議政丞 右文館 大提學 監春秋館事 여흥군(驪興君) 민지(閔漬)가 撰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목은 밑줄친 “장남 永暾은 현재 도관직랑 지합주사(都官直郞 知陜州事)로 있고”와 민지公이 비문을 찬한 “大元至元 元年 辛酉 十월 十四일”이란 날짜다. 前者는 2대 상락공이며 김영돈의 부친인 김순이 서거할 당시 知陜州事로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後者는 辛酉年에 합천태수로 있었으니 신유년 前後에 함벽루를 창건하였음을 示唆하고 있다.

 그러면 함벽루는 언제 세웠을까? 여기에는 최초의 記文을 지은 安震의 기문을 연구해야 한다. 기문의 첫머리에 “지난 丁巳年 가을에 장차 중국에 과거를 보러 갈 때 평양을 지나다가 永明寺와 浮碧樓를 보았고 그후 오년만에 진양군수가 되어 또 龍頭寺와 狀元樓에 올라 스스로 말하되 평생에 보던 바 남북에 뛰어난 경치가 이 두개의 누각을 지남이 없다고 하였더니 작년에 나라일로 강양(합천의 옛이름)을 지날때 길 가운데서 바라보니.....” 라는 말이 나온다.

 안진이 진양군수가 되었을 때는 정사년에서 5년 후이니 壬戌年이 된다. 그렇다면 김영돈이 지합주사로 있었던 충숙왕8년 辛酉年(1321) 前後해가 함벽루를 창건한 해로 유추할 수 있다. 문헌으로 봐 김후가 합주태수로 오래 있지 않았기 때문에 신유년이 유력한 창건해일지 모른다.

 유감스럽게도 김영돈 지합주사가 합천을 몇년간 다스렸는지 기록에 나와 있지 않다. 정확하게 안 나와 있기는 기문을 지은 안진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안진이 진양군수로 있을 때인 충숙왕9년(1322)에 촉석루를 재건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니 함벽루보다 촉석루가 먼저 창건되었다는 사실이다. 또 기문에 나오는 龍頭寺와 壯元樓가 바로 진주의 촉석루라는 사실도 알아 내었다.

 이제 함벽루를 창건한 누세공신 상락공의 영윤 김영돈 지합주사가 누군인지 알아보자.

知陜州事 金永暾1285년(충열왕11)---1348년(충목왕4)의 ?字는 휘곡(輝谷). 號는 균헌(筠軒) 또는 龜峰이다. 章敬公 정해(鄭土皆)로 부터 師事하였다. 1305년(충열21) 문과에 제3등으로 급제하여 江陵府 錄事가 되었다. 1340년(충혜왕 복위1)에는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이공수(李公遂) 등을 시취하였다.?

 1342년(충혜왕 3) 공은 조적(曺由頁)의 난을 평정할 때 아우인 上洛侯 영후(永煦)와 함께 이에 대비하는 상소를 올렸고, 성병의상찬(誠秉義翊贊) 一等功臣에 추천되기도 하였다. 그 교서의 글에 이르기를 ¨적신 조적이 난을 꾸미고 난 후에 과인이 수도로 가라는 명령을 내렸을 때 간신 여당이 거짓말로 날조하여 사람을 모아서 국가의 난을 모의하였지만 시종하는 신하들은 시종 절의를 지켜 과인을 보좌하고 협조하였는 바 그 공은 너무도 막대하고 커서 잊을 수가 없도다. 그것으로써 그대 등을 일등공신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계속)?


  4)2004. 9. 16. 기사

함벽루와 金永暾과 安震을 말한다3 -합천군향토사학회 學山 朴 煥 泰


 충혜왕이 원나라의 재상인 國老에게 붙잡히매 공은 왕의 죄를 사면해 달라는 상서를 올리려 하자 많은 사람들의 論意는 달랐다. 공은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함을 청함이 마땅하고 급한 일이다¨라고 말했다. 이는 고려사와 여지승람에 나온다.

 충혜왕때 三重大匡僉議司事와 上洛府院君에 봉해지고 1346년(충목왕2)에 贊成事로 원나라에 가서 의복과 옷, 음식 등을 보내준 데 대해 사례하였다. 이듬해 왕후(王煦)와 함께 귀국하여 원나라에서 왕의 失政을 묻자 소인들의 장난이라 변명하니 이를 정리하라는 원나라의 명을 받았다는 사실을 보고하였다.

  충목왕 때(1347년)에 左政丞, 判整治都監事(整治都監:충목왕 3년에 지방 토호족들이 과도하게 소유한 田土를 개량하기 위하여 임시로 설치했던 관청)를 지냈다. 이때 지방 토호들의 과도한 토지 소유를 없애고 국가 재정의 확충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여러 반발 세력들과 奇皇后(원나라 순제의 제2황후)의 4촌 아우 奇三萬을 巡軍獄에 가두어 죽게 한 사건으로 인해 원나라로부터는 치하를 받았으나, 征東行省理問所의 심한 반발에 부닥쳐 구금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원나라의 지지로 곧 석방되었다. 결국 공은 의도한 목표가 좌절되자 홧병을 앓다가 충목왕 4년(戊子, 1348) 7월 13일 64세로 몰하였다. 시호는 文肅이고 묘는 豊德 仰洞山이나 실전하여 충남 천안시 병천면 栢田에 設壇했다.

  安震이 찬한 文肅公 金永暾의 碑銘에 의하면 『-前略- 지합주사로 나갔는데 □□위엄이 있고 은혜로우니 고을이 편안해 하였으며,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그 덕을 노래하고 있다. 공의 이름은 영돈(永暾)이고, 자는 휘곡(暉谷)이며, 그 선대는 新羅王 金傅(敬順王)로부터 나왔다. -중략- 상락공 김방경의 막내인 순(恂)은 벼슬이 판삼사 보문각대제학 상락군에 이르렀는데, 바로 문숙공의 아버지가 된다.

  부인 申氏는 판도사랑 汝岡,(이천君)의 딸로 2녀 1남을 낳았다. 장녀는 통례문판관 吳元敬에게 시집갔으나 공보다 먼저 죽었고, 둘째 딸은 삼사판관 윤식(尹湜)에게 시집갔다. 아들 진(縝)은 장복직강인데 우대헌 柳甫發의 딸과 결혼하였다. 공이 일찍이 나(안진)에게 말하기를 ¨내가 만년에 아들 하나를 얻었는데 장차 家業을 일으킬 만합니다.¨ 라고 하였다.

  김영돈 묘지석은 조선조 순조8년(1808, 술진)에 발견되었는데 탈락된 부분이 여러 군데 있으며, 현재 족보에 수록된 銘文 가운데에도 오탈자가 몇 군데 있다고 한다. 金永暾의 역사기록은 고려사의 김방경전에 부전되어 있고 고려사에는 김영돈이 金永旽으로 표기되어 있다.

  앞의 설명에서 보는 것처럼 아이로니컬 하게도 김영돈의 묘지명은 그의 조부 김방경의 행장을 찬하였던 安震이 찬하였다. 말하자면 안진은 상락공 김방경家와 3대에 걸쳐 교류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함벽루 기문을 지은 안진∼1360(공민왕 9)>은 고려 말의 문신으로 본관은 順興, 호는 常軒이였다. 1313년(충숙왕 즉위년)급제하여 1317년에 藝文檢閱, 1318년에는 원나라 制科에 급제하여 고려로 돌아와 예문응교에 임명되었다. 1344년(충목왕원년)밀직부사로서 書筵官이 되고, 安山君으로 봉해졌으며, 1346년에는 李齊賢등과 더불어 충렬,충선,충숙 3朝의 실록을 찬수하였다.

  공민왕 즉위 후 원나라에서 왕을 잘 보좌한 공으로 일등공신이 된 趙日新이 정권을 장악하자, 그의 일파가 되어 政堂文學이 되었다. 1353년(공민왕 2) 조일신이 제거되자 그 일파가 모두 처형되었는데,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곤장을 면하는 대신 銅을 바치게 하였다.

  이상이 지금까지 밝혀진 안진에 대한 행장(行狀)이다. 앞으로 학자들의 연구와 파묻힌 비석의 발견을 통해 더 상세한 기록이 밝혀 질 것을 기대하면서 우리의 주인공 김영돈公이 1347년(충목왕3) 좌정승으로 있을 때 왕을 호종하고 백마산에 올라 지은 시를 소개함으로써 나의 책무를 완수코져 한다.

  翠保行尋蒼海上  玉簫吹送白雲間

  紅塵一片飛難到  萬点螺分雨靑山

-취보를 받들고 임금을 모시어 창해 위를 찾아오니, 흰구름 사이로 옥퉁소 불어 보내네, 한 티끌의 홍진도 날아오기 어려운데, 만점의 푸른 소라요 비 갠 뒤의 청산만 벌여 있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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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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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