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함벽루 창건자명 정정 요청 자료(4-終)

페이지 정보

김항용 작성일05-06-10 09:28 조회1,368회 댓글3건

본문

 

다. 함벽루 창건자 김영돈 확인 기념 행사 실시

 지난 2005년 4월 10일(일) 오전 10시, 안동김씨 대종회 내의 연구단체인 안.사.연(안동김씨 사이버 학술 연구회)과 합천 향토역사연구가 여러분들은 상호 연락을 하여 함벽루의 창건자가 김영돈임을 확인하고 이를 기념하는 행사가 아래와 같이 있었다. 안.사.연은 서울에서 전일인 4월 9일 오후, 승합차로 합천으로 이동하여 1박을 한 다음 10일 만남을 가졌다. 이날 행사에서 양 단체는 앞으로 상호 긴밀히 협조하여 함벽루의 창건자가 김영돈임을 널리 알리고, 문화재 관련 각 기관의 홈페이지와 각종의 문헌 등에 창건자명을 김영돈으로 기술되게 하는 데 적극 힘쓸 것을 약속하였다. 또한 안사연에서는 이날을 기념하는 기념타올을 제작하여 배부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안동김씨 홈페이지(andongkim.net) <사이버연구회>란에서 볼 수 있음.

hambyuk0008.jpg

        <기념행사시 함벽루 누각에서의 토론 장면>


   1) 일시 : 2005. 4. 10(일). 오전 10:00-12:00

   2) 장소 : 경남 합천군 합천읍 합천동 함벽루 내

   3) 참석자 :13명

     가)안사연(안동김씨사이버 학술 연구회) : 9명(무순)--김상석, 김윤만, 김태우, 김태영, 김항용, 김발용, 김환묵, 김행순, 이명희 

     나. 합천향토사학자 : 4명(합천신문사 사장 박태환, 합천문화원 부원장  이호석, 향토사학자 2인)           


라. 함벽루 창건자 문숙공 김영돈(文肅公 金永暾)에 대하여

김영돈(金永暾) 1285년(충열왕11)---1348년(충목왕4)

 자(字)는 휘곡(輝谷). 호(號)는 균헌(筠軒) 또는 구봉(龜峰)이다. 충렬공 김방경(金方慶)의 孫이고, 문영공(文英公) 김순(金恂)의 子이다. 장경공(章敬公) 정해(鄭土皆)로 부터 사사(師事)하였다. 1305년(충열21) 문과에 제 3등으로 급제하여 강릉부 녹사(江陵府 錄事)가 되었다. 1321년(충숙8) 지합주사(知陜州事)가 되었고, 1340년(충혜왕 복위1)에는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이공수(李公遂) 등을 시취하였다.

 1342년(충혜왕 3) 공은 조적(曺頔)의 난을 평정할 때 아우인 상락후(上洛侯) 영후(永煦)와 함께 이에 대비하는 상소를 올렸고, 성병의상찬일등공신(誠秉義翊贊一等功臣)에 추천되기도 하였다. 그 교서의 글에 이르기를 "적신 조적이 난을 꾸미고 난 후에 과인이 수도로 가라는 명령을 내렸을 때 간신 여당이 거짓말로 날조하여 사람을 모아서 국가의 난을 모의하였지만 시종하는 신하들은 시종 절의를 지켜 과인을 보좌하고 협조하였는 바 그 공은 너무도 막대하고 커서 잊을 수가 없도다. 그것으로써 그대 등을 일등공신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충혜왕이 원나라의 재상인 국노(國老)에게 붙잡히매 공은 왕의 죄를 사면해 달라는 상서를 올리려 하자 많은 사람들의 논의는 같지 않았다. 공은 말하기를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함을 청함은 마땅하고 급한 일이다."고 하였다. 이는 고려사와 여지승람에 보인다.

 충혜왕때 삼중대광첨의사사(三重大匡僉議司事)에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해지고 1346년(충목왕2)에 찬성사(贊成事)로 원나라에 가서 의복과 옷, 음식 등을 보내준 데 대해 사례하였다.

 이듬해 왕후(王煦)와 함께 귀국하여 원나라에서 왕의 실덕을 묻자 소인들의 장난이라 변명하니 이를 정리하라는 원나라의 명을 받았다는 사실을 보고하였다.  

  충목왕 때(1347년)에 좌정승 판정치도감사(左政丞 判整治都監事-정치도감의 長 . 整治都監-1347년 충목왕 3년에 지방 토호족들이 과도하게 소유한 田土를 개량하기 위하여 임시로 설치했던 관청으로 이듬해 없어짐)를 지냈다. 이때 지방 토호들의 과도한 토지 소유를 없애고 국가 재정의 확충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여러 반발 세력들과 기황후(奇皇后-원나라 순제의 제2황후)의 4촌 아우(奇三萬-기황후의 배경을 믿고 횡포가 심하자 고려에서 옥에 가두어 죽임)을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어 죽게 한 사건으로 인해 원나라로부터는 치하를 받았으나, 정동행성이문소(征東行省理問所)의 심한 반발에 부닥쳐 구금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원나라의 지지로 곧 석방되었다. 결국 공은 의도한 목표가 좌절되자 화병을 앓다가 충목왕 4년 7월 13일 64세로 몰하였다.

 시호는 문숙(文肅)이고 묘는 풍덕(豊德) 앙동산(仰洞山)이나 실전하여 충남 천안시 병천면 백전(栢田)에 설단(設壇)했다.

  출전 : 안동김씨 홈페이지(andongkim.net)와 디지털 한국학(정.문.연) 자료 종합.


5. 앞으로의 과제와 요청사항

 상기에서 밝힌 바와 같이 경남 합천에 있는 함벽루의 창건자는 1321년(충숙왕8) 당시 합천의 목민관이었던 지합주사 김영돈(知陜州事 金永暾)임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이제 함벽루와 관련한 모든 소개 자료에 창건자명을 김영돈으로 정정하여 기록하는 과제가 남았다고 생각한다. 이에 합천군청, 경남도청, 문화재청, 문화 관광부 등의 문화재 관련 각 기관에 이 사실을 알림과 동시에 함벽루 현지 해설판 및 지방과 중앙의 문화재 관련 각종 관청 홈페이지와 문헌에 속히 <함벽루는 고려 충숙왕 8년(1321), 安東人 金永暾이 창건한 것>이라고 올바로 수정, 기록되길 간절히 요청하며 아울러 그 결과가 하루 속히 나타나길 고대한다.  


 

댓글목록

김행순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행순
작성일

  좋은 소식이 전해져 오길 간절히 바랍니다.

김은회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은회
작성일

  잘 되리라 생각합니다.

김정중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정중
작성일

  대구종친회 회장단연석회의(6.10)에서도 함벽루 창건자 문제를 거론하며 모두들 안사연 활동에 찬사를 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