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캠프자료---김흔 장군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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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5-06-27 14:10 조회1,539회 댓글1건본문
4) 아버지 무고사건에 연루되어 백령도에 유배
(28세) 1277년 북쪽 변방이 소란해지자 출정하였고,
(29세) 1278년 아버지 김방경이 무고를 입어 대청도(大靑島)로 유배될 때 백령도에 유배되었으나, 충렬왕의 변호로 풀려났다.
《고려사》 제28권 - 세가 제28 > 충렬왕 1 >
충렬왕 무인 4년(1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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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인일에 왕이 봉은사에 가서 흔도, 홍다구와 더불어 김방경과 그 아들 김흔을 문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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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병진일에 왕이 흔도, 홍다구를 흥국사에 모이게 하고 김방경을 문초하였으나 죄를 시인하지 않았으므로 김방경을 대청도에, 김흔을 백령도에 귀양 보내었다.
경신일에 왕이 궁궐 내에서 친히 기도를 드렸다.
계해일에 장군 인후를 원나라에 파견하여 김방경을 귀양 보낸 것을 보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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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인일에 황제가 해동청(매) 한 연(連-한 쌍)과 부마 금인(駙馬金印)과 말 안장을 주었다. 왕이 동궁(東宮)에서 전송연의 술을 마시었다.
계묘일에 왕이 하직하고 귀국하게 되었는데 황제는 겁설(숙위의 뜻) 단안(丹安), 독구(禿丘)로 하여금 북경까지 전송하게 하였다.
또 탈탈아 등 세 명의 관원을 보내 동문 밖에서 전송하게 하였으며 김방경에게 명령하여 왕을 따라 귀국하라 하였다. 황태자 역시 사람을 보내 전송하였으며 황자 탈환(脫歡), 황녀 망가대도 모두 이르렀다. 여러 관원들이 달달(達達)의 노래와 춤으로 왕을 위로하면서 술잔을 권하니 왕은 홀적 가운데서 노래를 잘 하는 자를 시켜 감황은곡(感皇恩曲-은덕을 감사하는 곡조)을 불러서 답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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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김방경열전
위득유는 더욱 더 김방경을 원망하게 되어 날마다 노진의, 김복대 등과 더불어 음모를 꾸미어 김방경을 모해하였다. 그리하여 김방경의 죄상을 기록한 고발장을 가지고 흔도에게 참소하기를 ꡒ김방경이 그의 아들 김흔, 사위 조변, 의남(義男) 한희유 및 공유(孔愉), 나유(羅裕), 안사정(安社貞), 김천록(金天祿) 등 4백여 명과 더불어 왕, 공주 및 달로화적을 없애 버리고 강화도에 들어가서 반역하려고 음모하고 있다. 또 일본 정벌 이후 군사 기자재들은 모두 응당 관가에 납부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김방경과 그의 친속들은 모두 자기 집들에 무기를 감추어 두었으며 또 전함을 건조하여 반남(潘南), 곤미(昆湄), 진도(珍島) 3현에다 두고 무리를 모아 반역을 음모하고 있으며 자기 집이 달로화적의 숙소와 가깝기 때문에 고류동(孤柳洞)으로 이사를 갔으며 국가에서는 때마침 여러 섬들의 인민들에게 육지 깊이 들어와서 살 것을 명령하였는데 김방경의 부자(父子)는 그에 복종하지 않고 인민들을 해변에 살게 하였으며 동정 당시 수전(水戰)에 익숙하지 못한 자들로 하여금 초공(梢工-키잡이) 수수(水手-뱃군)로 되게 하여 전투에서 불리한 결과를 초래케 하였으며 아들 김흔을 진주(晋州)의 수령으로 삼고 막객(幕客) 전유(田儒)를 경산부(京山府)의 수령으로 삼고 의남(義男) 안적재(安迪材)를 합포(合浦)의 수비장(守備將)으로 삼고, 한희유에게는 병선(兵船)을 장악하는 일을 맡게 하여 정변을 일으킬 때 곧 보조를 맞추어 일어나게끔 준비하였다ꡓ라는 등의 여덟 개의 조항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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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다구(茶丘)는 자기의 조국인 고려에 대하여 오랜 악감을 품은 자였으므로 무슨 짬이라도 있는가 하고 엿보고 있다가 화를 전가시킬 궁리를 하고 있었는데 김방경의 사건을 듣고는 중서 성에다 자기를 고려에 보내 문초하도록 할 것을 요청하였다. 또 흔도 역시 이보다 앞서 그의 아들 길대를 보내 위득유의 말을 황제에게 보고하도록 한 바 있었으므로 황제는 글을 보내 국왕과 공주가 함께 문초에 참가하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왕이 흔도, 홍다구와 함께 다시 김방경과 김흔을 문초하게 되었다. 홍다구는 쇠줄로 김방경의 목을 둘러 죄고 못이라도 박을 듯이 하였으며 또 형장 가진 자를 꾸짖어 그의 머리를 치게 하였으며 종일토록 알몸뚱이로 세워 놓았다. 날씨는 극히 추워서 그의 피부는 얼어서 먹을 뿌려 놓은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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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홍다구의 말을 믿기도 하고 또 고문받는 정상을 차마 볼 수가 없어서 김방경에게 이르기를
ꡒ황제가 어질고 거룩하신 분이니 장차 그대의 실정을 밝혀주고 죽이지는 아니 할 것인데 어째서 그런 고통을 받고 있느냐?ꡓ라고 한즉 김방경이 대답하기를
ꡒ왕은 어떻게 이런 말을 합니까? 저는 병사의 몸으로 출세하여 직위가 재상에까지 이르렀으니 저의 간과 골이 땅바닥에 구르게 된다 하더라도 나라의 은혜를 다 갚지 못하겠거늘 어찌 일신을 아끼어 근거 없는 죄명을 둘러쓰고 국가를 배반하겠습니까?ꡓ라고 하면서 홍다구를 돌아다보며
ꡒ나를 죽이려거든 죽여라! 나는 부당한 일을 가지고 굴복하지는 않겠다!ꡓ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드디어 갑옷을 감추어 두었다는 죄를 논하여 김방경을 대청도에, 김흔을 백령도(白翎島)에 귀양 보내고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였다.
김방경이 귀양 가게 되자 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가 가는 길을 막고 울면서 그를 보내었다. 홍다구는 사람을 보내 황제에게 무고하기를 ꡒ김방경은 양곡을 저축하고 선박을 건조하였으며, 많은 병기, 갑옷을 감추어 두고 불칙한 짓을 하려고 꾀하였으니 왕경(개경) 이남의 지리 상 중요한 지대를 골라서 방수군을 두며 또 여러 주와 군에도 모두 달로화적을 두며 김방경과 그 아들, 사위 기타 일가 권속들은 모조리 수도(북경)에 압송하여 노예로 만들고 그 소유지는 몰수하여 거기서 나오는 수입을 군량에다 충당하도록 하기를 바랍니다ꡓ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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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도 역시 장군 노영(盧英)을 원나라에 보내 대변케 하였다. 평장 합백(哈伯)이 말하기를
ꡒ이런 것은 황제께 아뢸 만한 일이 못된다. 그대도 귀국해서 국왕 자신이 직접 와서 보고하도록 하라!ꡓ고 하였다. 그래서 왕이 드디어 원나라로 떠나 가게 되었는데 도중에 황제의 지시로 김방경의 부자와 위득유, 노진의 등도 왕을 따라서 오도록 하라고 하였으므로 왕이 장순용을 보내 김방경을 소환하였다.
김방경과 김흔이 귀양 갔던 섬에서 되돌아 오니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고 그들의 손을 만지면서 ꡒ오늘 또다시 시중(즉 중찬)부자의 얼굴을 볼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도 못하였다ꡓ고 말들 하였다. 노진의는 요가채(姚家寨)에 이르러 혓바닥이 헐어서 갑자기 죽었는데 임종시에 말하기를 “나는 위득유 때문에 이 지경이 되고 말았다 ”라고 하였다. 위득유가 이 말을 듣더니 잠도 자지 못하고 음식도 먹지 못하고 항상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한숨만 지을 뿐이었다.
황제는 왕에게 말하기를 “김방경을 고발한 자들은 모두 죽었으니 이미 상대해서 송사를 진행할 만한 대상이 없을 뿐더러 나도 이미 김방경의 죄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라고 하면서 그 길로 김방경을 용서해 주고 왕을 따라 귀국하라고 하였다.
5) 뚤루게(禿魯花, 볼모)로 원나라에...
(30세) 1279년(충렬왕5) 대방공 징(帶方公 ○)이 원나라에 갈 때 원부(元傅)의 아들 정(貞) 등 의관(衣官)자제 25인과 함께 뚤루게(禿魯花)로 다녀왔다.
《고려사》제29권 - 세가 제29 > 충렬왕 2 >
충렬왕 기묘 5년(1279)
3월
정사일에 대방공 왕증이 독로화를 데리고 원나라로 출발하였는데 김방경의 아들 김흔, 원부의 아들 원정, 박항의 아들 박원굉, 허공의 아들 허평, 홍자번의 아들 홍순(洪順), 한강의 아들 한사기, 설공검의 아들 설지충, 이존비의 아들 이우(李瑀), 김주정의 아들 김심(金深) 등 양반 자제 25명을 보냈는바 모두 현직에서 3등급씩 올려 임명하여 보냈다.
원관은 (김선-)김승용의 처부 : 원부---★원관, 원정
허공은 김순의 처부 : ★허공---허평
한공의는 (김순-김영후-김천-)김사겸의 처부 : 한강---한사기---한악---★한공의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김흔열전
충렬왕 5년에 독로화(禿魯花-볼모)로 원나라에 들어갔는데 당시에 우리 나라 사람들이었던 유주가 황제에게 말하기를
ꡒ외국인으로서 외국인을 공격케 하는 것은 중국의 형편상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니 고려와 만자(蠻子-중국 남방의 이민족들)로 하여금 일본을 정벌케 하고 몽고 군대는 파견하지 말도록 하며 또 고려로 하여금 군량 20만 석을 준비하도록 하기를 바랍니다ꡓ라고 하였더니 황제가 그렇게 하자고 허락하였다. 여기서 김흔은 유주더러 말하기를
ꡒ너는 유검필(黔弼), 유자량(資諒)의 후손이 아닌가? 그런데 자기의 고국을 이다지도 못쓰게 만들려고 하는가?ꡓ라고 한 즉 유주가 대답하기를
ꡒ너의 왕은 진흙으로 만든 부처와 같다. 윤수(尹秀), 이정(李貞), 원경(元卿), 박의(朴義), 양선대(梁善大) 등이 백성들을 착취해 내는 것만을 가지고도 군량을 마련하기 충분하다. 그러니 나는 나쁜 신하들을 없애고 삼한(고려)을 다시 바로잡으려 하는 것이다ꡓ라고 하였다.
뚤루게 禿魯花(독로화)
고려 후기에 몽골 숙위를 위해 인질로 보낸 왕족 ·귀족의 자제.
몽골이 이민족을 지배하는 방식의 하나였으며, 1241년(고종 28)에 왕족인 영녕공 준(永寧公嗾)과 귀족 자제 10명을 보낸 것을 시작으로, 1271년(원종 12)에는 세자 심(諶:충렬왕)과 송빈(宋훅) ·설공검(薛公儉) 등 귀족 자제 20명을 보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를 꺼리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1275년(충렬왕 1)에는 선발된 사람에게 3등급을 초월하여 관직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원(元)나라와의 관계가 점점 깊어지면서, 1279년에는 대방공 징(帶方公砒)이 김방경(金方慶) ·원부(元傅) ·박항(朴恒) ·허공(許珙) ·홍자번(洪子藩) ·한강(韓康) ·설공검 ·이존비(李尊庇) ·김주정(金周鼎) 등의 자제를 선발하여 보내기도 하였다. 이들은 대체로 일정 기간을 보낸 뒤에 귀국하였으나, 한사기(韓謝奇)처럼 가족을 이끌고 원나라에 가서 관직에 진출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뒤에도 몇 차례 선발하여 보냈으나, 1313년(충선왕 5)에 왕족인 고(暠)를 보낸 것을 마지막으로 기록에 나타나지 않으며, 다만 고려 국왕이 세자시절에 원나라에서 생활하는 관례는 지속되었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6) 상장군으로 원나라에...
(33세) 1282년에도 상장군(上將軍)으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원나라에 있을 때 고려사람 유주(庾○)가 원나라의 황제에게 고려에 이롭지 못한 일을 건의하자, “너는 금필(黔弼)·자량(資諒)의 후손이 아니냐? 그런데 본국을 그와같이 파괴하려 하느냐.”고 비난하였다.
<고려사절요> 임오 8년(1282), 원 지원 19년
○ 겨울 10월 -----
○ 독로화(禿魯花) 상장군 김흔(金?)을 원 나라에 보냈다.
<고려사절요> 계미 9년(1283), 원 지원 20년
○ 원 나라에서 속간(束干) 이양무(李良茂)를 보내어 저강(楮?) 3천 정(錠)을 가지고 와서 전함을 건조하는 경비에 쓰게 하였다. 본국 사람 유주(庾?)가 황제에게 아뢰기를, "오랑캐를 시켜서 오랑캐를 치는 것이 중국의 방법이니 고려와 만자(蠻子)로 일본을 정벌하게 하고 몽고군은 보내지 마십시오. 그리고 고려에서 군량 20만 석을 준비하게 하십시오." 하니, 황제가 이를 허락하였다.
독로화(禿魯花) 김흔(金?) 등이 주에게 말하기를, "너는 검필(黔弼)과 자량(資諒)의 후손이 아니냐. 이렇게도 국가를 무너뜨리고 싶으냐." 하니,
주가 말하기를, "너의 국왕은 흙으로 빚어 만든 부처와 같으니, 윤수ㆍ이정ㆍ원경ㆍ박의ㆍ양선대(梁善大) 등이 백성의 재산을 긁어 모은 것만으로도 군량을 대기에 충분하다. 나는 좌우의 간신들을 제거하고 다시 삼한(三韓)을 바로 잡으려는 것이다." 하였다.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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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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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감사합니다. 공부 잘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