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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캠프 자료---전서공파 6 (김익정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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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5-07-24 12:03 조회1,735회 댓글2건

본문

 

 

雲庵(운암) 金益精(김익정)


?1375~1436(세종18).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자비(子斐). 호는 雲庵(운암). 아버지는 한성윤 휴(休, 1350~1430).


1) 과거급제하여 태종의 측근으로

여말의 충절을 지킨 부친(김휴)과는 달리, 태조5년(1396) 근정전 친시과에서 장원급제하였는데, 재주뿐 아니라 인물도 빼어나게 잘 생겨서 일찍이 태종의 눈에 띄어 청요의 직책을 두루 거쳤다. 1409년(태종9) 장령이 되었다. 이해에 쇄권색(刷卷色)을 설치하자, 그 별감이 되었다.


<조선 문과방목>

김익정(金益精)

태조(太祖)5년(1396년), 식년시(式年試) 을과1(乙科1)

>>> 인적사항

생년(生年)

자(字)

호(號)

본관(本貫) 안동(安東)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 가족사항

부(父) 김휴(金休)

생부(生父)

조부(祖父) 김성목(金成牧)

증조부(曾祖父) 김구(金玖)

외조부(外祖父) ★김효신(金孝信)

처부(妻父) ★권담(權湛)

손(孫) 김수녕(金壽寧)

제(弟) 김익렴(金益濂)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생원(生員)

품계(品階)

관직(官職) 이조/참판&(吏曹/參判&), 대사헌&(大司憲&)


2) 세종의 측근이 되어

1411년(태종11) 지영월군사(知寧越郡事)로 있을 때 청렴하고 흥학에 공이 커서 오래동안 칭송되었다. 1414년(태종14) 지사간(知司諫)을 거쳐 1418년(태종18년) 세종이 세자가 되었을 때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으로 발탁되어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이 되어 세종의 측근이 되었다. 그래서 세종이 즉위(8월8일) 하자마자 좌부대언(左副代言) 즉 좌부승지가 되어 우대언(右代言), 좌대언(左代言)을 차례로 거치었다. 참찬관으로 경연에 참석하여《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론하고, 근사록(近思錄)》을 강하기를 청했다.

세종4년(1422)12월12일 파직될 때까지 항상 세종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모시는데 태종과 세종이 베푸는 사사로운 연회좌석 마다 빠지지 않고 시연(侍宴)할 정도로 총애를 받았었다. 결국 국왕과 이런 근밀한 관계가 뭇사람들의 시기를 사게되어 하찮은 일로 파직되기도 했다.


<동국여지승람>

제6권 p51<영월군 명환(名宦) 본조(本朝)>

김익정(金益精) : 성품이 청렴하고 근엄하여 한 터럭만한 일도 백성을 요동시키지 않았다. 향교를 창설하여 백성의 마음을 진작시키고 학교를 일으키니 백성들이 다 감화하여, 지금까지도 강송(講誦)을 그치지 아니한다.


3) 1420년(세종2) 경자자 제작에 참여

세종2년(1420) 12월9일에는 지신사(知申事) 즉 도승지에 오르고, 세종4년 이천과 남급이 주관하고 金益精 등이 감독하여 계미자(1403, 태종3)의 단점을 보완하여 동활자를 주성하였는데, 주조기간은 11월에 착수하여 7개월이 걸려 완성하였다. 14년후 1434년 제작된 초주 갑인자는 이후 6차례 (혹은 12차례) 개주된 바 있는 조선시대 금속활자의 백미로 우리 가문의 군사공파 김돈 선조님께서 글자체 및 제작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조선왕조실록>

《 세종 018 04/10/29(계축) / 주자소에 글자 모양을 고치게 명하고, 변계량에게 발문을 짓게 하다 》

  임금이 주자소(鑄字所)에 명하여 글자 모양을 고쳐 만들어 책을 박게 하고, 변계량에게 명하여 발문(跋文)을 지으라 하니, 그 글에

  “주자(鑄字)를 만든 것은 많은 서적을 인쇄(印刷)하여 길이 후세에 전하려 함이니, 진실로 무궁(無窮)한 이익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처음 만든 글자는 모양이 다 잘 되지 못하여, 책을 박는 사람이 그 성공(成功)이 쉽지 않음을 병되게 여기더니, 영락 경자년 겨울 11월에 우리 전하께서 이를 신념(宸念)하사 공조 참판 이천(李쾸)에게 명하여 새로 글자 모양을 고쳐 만들게 하시니, 매우 정교(精巧)하고 치밀하였다. 지신사 김익정과 좌대언(左代言) 정초(鄭招)에게 명하여 그 일을 맡아 감독하게 하여 일곱 달 만에 일이 성공하니, 인쇄하는 사람들이 이를 편리하다고 하였고, 하루에 인쇄한 것이 20여 장에 이르렀다.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광효 대왕(光孝大王) 이 앞에서 창작하시고, 우리 주상 전하께서 뒤에서 계승하셨는데, 조리(條理)의 주밀(周密)함은 그전 것보다 더 나은 점이 있다. 이로 말미암아 글은 인쇄하지 못할 것이 없어, 배우지 못할 사람이 없을 것이니, 문교(文敎)의 일어남이 마땅히 날로 앞서 나아갈 것이요, 세도(世道)의 높아감이 마땅히 더욱 성해질 것이다. 저 한(漢)·당(唐)의 임금들이 단지 재리(財利)와 병혁(兵革)에만 정신을 쏟아, 이를 국가의 급선무로 삼은 것에 비교한다면, 하늘과 땅의 차이뿐만이 아닐지니, 실로 우리 조선(朝鮮) 만세(萬世)에 한이 없는 복이다.” 라고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 세종 018 04/11/24(정축) / 지신사 김익정에게 술과 과실을 내려 그 아비를 전송하게 하다 》

  지신사 김익정에게 술과 과실을 내려 그의 아버지를 전송(餞送)하게 하였다. 앞서 익정의 아버지가 전의(全義)에 있었는데, 이제 그 아들을 보려고 서울에 왔다가 돌아가므로, 임금이 이를 내려 준 것이었다.


4)「황금 대사헌(黃金大司憲)」이라 불리었다.

세종6년(1424년) 경창부 윤(慶昌府尹)으로 되었다가 이어 충청도 관찰사가 되고, 예조 참판을 거쳐, 세종7년 인수부 윤(仁壽府尹)을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 김익정(金益精)이 황희와 더불어 서로 잇달아서 대사헌이 되어서, 당시 사람들이 이들을 「황금 대사헌(黃金大司憲)」이라고 일컬었다.

세종8년 예조 참판, 중군 동지총제가 되고, 세종9년 형조 참판이 되었다. 이때 황희(黃喜)는 좌의정, 맹사성(孟思誠)은 우의정, 김익생(金益生)은 좌군 동지총제, 김종서(金宗瑞)는 사헌 집의가 되었다.


댓글목록

김주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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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연대기 정리가 매끄럽지 못합니다.
솔내 대부님! 조선왕조실록 중 '김익정' 검색이 가능한지요? 가능하시면 제 이메일로 보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a href=mailto:kimjoohoee@cb21.net>kimjoohoee@cb21.net</a>

솔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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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보내드릴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