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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락과 음수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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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작성일05-08-04 06:14 조회1,360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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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諱)는 방경 안동인(安東人)으로 신라 경순왕 김부(金傅)의 9세손이며, 증조(曾祖)의 휘(諱)는 의화(義和) 사호(司戶)이며, 조(祖)의 휘(諱)는 민성(敏誠) 장야서승겸직사관(掌冶署丞兼直史館)이며,고(考)의 휘(諱)는 효인(孝印) 정의 대부(正議大夫) 병부상서(兵部尙書) 한림학사(翰林學士) 충사관(充史館) 수찬관(修撰官) 지제고(知制誥)이며, 비(妣)는 흥진부사(興鎭副使) 낭장(郎將) 송기(宋耆)의 따님이며, 처음에 임신(姙娠) 하였을 때 자주 꿈에 구름과 안개를 마셔 일찍이 사람들에 일러 말하기를 “항상 운기(雲氣)가 내 구비(口鼻)에 있으니, 이 아이는 반드시 신선(神仙) 사운데서 올 것이다.” 하였다. 공(公)은 천성(天性)이 충근(忠勤) 공검(恭儉)하고 신후(信厚) 침엄(沈嚴) 하였으며, 장군(將軍)겸 급사중(給事中) 어사중승(御使中丞), 금오위대장군지합문사(金吾衛大將軍知閤門事),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 어사대부(御使大夫)로 게으르지 않고 결단이 분명하고 늠름해서 바람이 이는 듯 하였으며, 다들 두려워 하며 엄숙하게 생각하였으며, 백성의 희망으로 서북을 진압하러 갔을때 은혜와 위엄을 엊바꿔 써서 지금도 그 풍속에서 노래하고 추모하고 있다고 한다. 나라가 강화도에서 송도(松都)로 나올때에 일부 군인이 명령을 어기고 남쪽으로 내려 갔었는데, 고은 추밀원사(樞密院事)로 추토사(追討使)가 되어 군대를 거느리고 진도를 포위하고, 다음해 5월 까지 무려 15번을 크게 싸워 진압했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수대위(守大尉)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판이부사(判夷部事) 대자대보(大子大保)가 되었으며, 조금 있다가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가 되었으며, 후에 남은 무리들이 제주에 들어가 점거함에 공(公)은 행영중군병마원수(行營中軍兵馬元帥)가 되어, 계유(癸酉) 4월 28일 배로 바다를 건너가 봉둔(蜂屯)을 진압했으며, 원나라 조정에서 불러 침전(寢殿)에 들어가 음악을 연주하여 들려주고 잔치를 배풀어 주며, 수대사 개부의 동삼사 문하시중 상주국 팡어사대사(守大師開府儀同三司門下侍中上柱國判御史臺事)를 받았으며, 이때에 또 일본을 정벌하라는 명령을 받들어 갑술(甲戌)년에 일본을 들어가 쳐서, 잡아온 포로와 베어온 괵(馘)이 매우 많았다. 경진(庚辰)년 겨울에 제소(帝所)에 들어가니, 제(帝)가 중봉대부 관 고려국 도원수(中奉大夫管高麗國都元帥)를 주었다. 신사(辛巳)년 여름에 또 일본에 들어갔으나 남송(南宋)군이 오기로 하였는데, 기일(期日)을 삼개월이나 어기고 그간에 병질(病疾)이 일어나 부득이 돌아왔다. 계미(癸未)에 글을 올려 간절히 물러날 것을 고하니, 위에서 삼한벽상 추충정란 정원공신 광정대부 삼중대광 판도첨의 상장군 판전리사사 세자사(三韓壁上推忠靖難定遠功臣匡靖大夫三重大匡判都僉議上將軍判典理司事世子師)를 더하여 주었으며, 이에 벼슬을 떠났는데 위에서는 이에도 부족하여 병신(丙申)년 겨울에 상락공(上洛公)으로 식읍(食邑) 일천호, 식실(食實) 삼백호를 봉(封)해줬다. 그후 충열(忠烈)이라 시호(諡號)를 내려주고, 신도비(神道碑)도 명(命)하여 세우게 했다. 충열왕(忠烈王) 26년 경자(庚子)년 가을 8월 16일에 백목동(栢木洞) 앵계리(鸎溪里)에서 병(病)으로 돌아가니, 유언(遺言)에 따라 9월 초삼일 예안(瘞安) 서쪽산 기슳에 장시지냈다. 사람이 살면서 귀히 여기며 이루기 바라는 것이 세가지 있는데, 공(公)은 백성을 구제(救濟)하여 이룬 덕이 하나이며, 산날이 팔십구세니 수(壽)가 eh 하나이며, 도원수(都元帥)에 이르렀으니 관작(官爵)이 또 하나라. 이 셋을 다 얻은 분은 오직 공 한 분이시다. 배(配)는 기거랑 지제고 박익정의 따님으로 삼남 삼녀를 두었으며 계배 손씨는 일녀를 두었다. 공(公)의 기식(器識)은 넓고 크며 작은일에 구애 되지 않았으며, 일을 결단함에 어긋남이 없었으며 집안 내력(來歷)으로 글씨와 시(詩)에 능했으며, 기골(氣骨)이 보통 사람과 달랐으며, 추위와 더위에 잘 견디어 무병(無病)하였으며 옛 친구를 버리지 않았으며, 의식(衣食)은 검소(儉素)하게 하였으며, 평생 위의 잘못을 말하지 않았으며, 매년(每年) 세시(歲時)에는 공경(公卿) 장상(將相)들이 먼저 와서 절을 하여 만세(萬世)의 귀감(龜鑑)이 되었다. 끝으로 선생님은찬시(讚詩)에서



山水秀靈人傑豊       永嘉鄕貫金門瓏

羅時王裔中興祖       麗夫元勳上洛公

理亂重任誠盡力       征倭大事惜歸恫

至今世故如當日       尙敎一謀俟舊功


산과 물 이 빼어나게 신령 스러우면 인걸이 많이 나는데

안동에 관향을 둔 문중에는 김문이 빛나는 구나

신라 왕족의 후예로 문중을 중흥시킨 할아버지요

고려 말의 큰 공을 세운 상락공이로다

난리를 다스리고 무거운 책임으로 정성껏 힘을 다하였고

왜를 정벌한 큰일은 아깝게도 슬픔으로 돌아 왔구나

지금 세상 연고가 그 당시와 비슷하니

부디 한꾀를 가르쳐 주어 옛 공과 같게하소서


라 하시고 강의는 끝났고, 시조와 한시를 목청껏 갑고님의 선창으로 불렀다. 이어 음수재 재실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안동 시내로 옮겨 이 고장에서 소문난 음식점 ‘옥동 칼국수’ 집으로 안내받아, 문중에서 정성으로 준비한 손칼국수와 동동주를 곁들인 점심을 푸짐하게 대접받고 문중 인사들과 작별하고 서울로 출발했다. 차가 고속도로 진입로로 들어와 내성천교를 지나자, 미국에서 오래 살았던 오외수씨가 하모니카를 들고 나와 한가락 탐방 중에는 처음으로 ‘비목’과 ‘그 집 앞’이란 노래를 정감 있게 불러주었다. 이어서 갑고님의 창으로 ‘도봉관풍’이란 한시창과 ‘바람’이 라는 시조가 이어졌다. 지는해가 서산을 붉게 물들이는 노을을 바라보며 지난 한해를 돌아본다, EH 한해가 저물고 있다. 이렇게 이렇게…… 차는 병목지점을 피해 제천을 통해 박달재 터널을 지나고 감곡 나들목을 거쳐 다시 영동고속도로로 들어섰으나 지체가 심하다. 고속도로 나들목을 수차례 드나들며 서둘러서 올라오니 6시가 조금지나 궁내동 나들목을 지날 수 있었다. 나들목을 지나고 문중 김명회 부회장님의 작별인사와 고령 회장의 다음 행사를 안내하고 잠시후 사당에 이르러 오늘의 일정을 마쳤다.

 

-계속-

 

댓글목록

김은회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은회
작성일

  아름다운 시(詩)한수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