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교관(金敎官) 시권(詩卷)의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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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작성일05-08-05 17:45 조회1,446회 댓글4건본문
김 교관(金敎官) 시권(詩卷)의 서문
성상께서 평소에 유술(儒術)을 숭상하여 문치(文治)를 크게 일으킨 덕에 인재(人才)를 교양(敎養)하는 법이 실제로 갖추어 졌다. 국내의 자제들을 교육시키는 곳으로는 태학(太學)과 소학(小學)이 있고 종친(宗親)을 가르치는 곳으로는 종학(宗學)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모두 경전(經典)에 밝고 행실을 잘 닦은 자를 선발하여 사표(師表)로 삼았다. 그러고도 오히려 출합(出閤)하지 않은 종친을 미리 양성하고 내시(內侍)도 학식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염려하여 문학과 행실을 겸비한 한 사람을 선발해서 스승으로 삼고 궁중에서는 항상 칭하기를 ‘사부(師傅)’라고 하였으니 그 임무가 막중하다 하겠다.
어느 해에 집현전(集賢殿)에 명하기를 “궁중(宮中)에 학도(學徒)가 많아서 한 사람의 교관(敎官)이 감당할 수 없으니 마땅히 신중을 기하여 간택하도록 하라.” 하니, 모두 적합한 사람으로 생원이 한 사람 있다고 하였다. 그는 성은 김(金)이요 이름은 대래(大來)인데, 학문이 이미 정밀하고 또 효성으로 인하여 그의 이름이 조정에 알려졌다는 것으로 건백(建白) –원문빠짐- 하였다. 상이 또 승정원에 의논하게 하니, 모두가 적합하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를 명소(命召)하였다.
선생이 이 당시에 충청도(忠淸道) 결성현(結城縣)에 살면서 모부인(母夫人)을 맛있는 음식으로 봉양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조정으로부터 소명을 받고 의리상 머물러 있을 수가 없어서 행장을 꾸려 길에 오르니, 고을 사람들이 모두 노래와 시를 지어서 전송하였다. 조정에 온 지 두어 달이 지나자, 상이 이르기를, “내가 모(某)의 어버이에 대한 효성을 안다. –원문빠짐- 모친을 두고 왔으니, 세월이 가는 것을 아까워하는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역마를 타고 가까운 곳으로 모셔 올 것을 윤허한다,” 하였다. 이에 김공이 역마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니, 훈훈한 화기가 온 집안에 넘쳐 흘렀고 고을 사람들도 흐뭇하게 여겼다. 그렇게 몇일을 보낸 다음 모친을 모시고 오려 하자, 고을 사람들이 한편으로는 영광스럽게 여기고 한편으로는 섭섭하게 여기면서 시를 지어 주어 작별을 하였는데 그 시를 모아서 한 권의 책으로 만들고 나에게 서문을 지어 달라고 하였다. 나는 공의 족손(族孫)뻘이고 동년(同年)의 자식인데 감히 사양할 수 있겠는가.
대저 사군자(士君子)라면 어느 누가 경전(經典)을 연구하고 글을 읽어서 세상에 나아가 출세하여 자신의 어버이를 드러내려고 하지 않을 자가 있겠는가 그러나 도(道)와 시기(時機)가 간혹 서로 맞지 않는 경우가 있고 재주와 운명도 흔히 서로 맞지 않는 경우가 있는 법이어서 비록 현명한 임금이 위에 계시더라도 좌우의 신하들이 먼저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진실로 선뜻 임금의 문전에 들어가지 못하는 수가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재주를 간직하고 도를 품은 채로 초야에서 여생을 마치는 자가 열이면 팔구 명이 되었다. 과거법(科擧法)이 실시된 뒤로 사람들의 벼슬길 진출이 더욱 어려워 졌으니 잘 알지 못한 가운데 경쟁을 하고 한 사람의 눈에 의하여 결정되기 때문에 낙방하고 마는 자가 상당히 많았다. 가령 옛날의 호걸스러운 선비들을 시험보인다 하더라도 합격할 것인지의 여부는 장담할수 없는 상황이었다.
공이 묘령(妙齡)의 나이에 우리 가군(家君)과 함께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명성이 자자 하였다. 과거에 응시하자, 동료들이 맨 먼저 등과(登科)할 것이라고 여겼는데 지금까지 아직도 급제하지 못하고 있으니 사람들이 모두 의아해 하고 있다. 그러나 과거에 합격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어찌 밝은 시대를 만나서 위로는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아래로는 자신의 어버이에게 효도를 다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지금 공이 가정에서 행실을 닦았는데 조정에서 그를 채용하였고 집현전이 천거 하였다. 상도 역시 공의 효성을 알아서 칭찬을 하였으며 심지어 역마를 주어서 모친을 모셔오도록 하기까지 하였으니 녹봉으로 봉양하기가 충분하고 대궐에 출입하게 된 것을 사림이 영광으로 여기고 있다. 사람의 자식으로 태어나 효성이 이 정도에 이르면 가하다고 할 것이니, 어찌 과거에 급제하는 것만 귀하다고 하겠는가 게다가 지금 국가에서는 강경(講經)하는 법을 다시 세워서 선비들을 뽑고 있는 마당에 공이 경문에 밝은것으로 성주(聖主)의 인정을 받았고 – 원문빠짐- 합문 내의 종현(宗賢)들이 추대하여 스승으로 삼았으니 경문을 공부하여 활용을 다할 시기가 바로 지금이라 하겠다.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국가에 충성하는 일이 어찌 여기에만 그치고 말 뿐이겠는가 공은 힘쓰도록 하시오.
출합(出閤): 왕의 자녀들이 장성하여 결혼하면 궁을 나가 생활하는 것을 말한다.
동년(同年): 같은 해에 함께 과거에 급제한 자들을 가르키는 말로 오늘날 흔히
사용하는 동기생(同期生)의 개념이다.
출전: 육선생문집(취금헌 박팽년)
육선생유고 [六先生遺稿]
조선 세조 때의 사육신(死六臣)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이개(李塏)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등의 시문을 엮은 3권 3책. 규장각도서, 국립중앙도서관 ·단국대학교 도서관 소장. 박팽년의 7대손 숭고(崇古)가 사육신의 유문(遺文)을 모아 편집하고, 1658년(효종 9)에 충청도관찰사 이경억(李慶億)이 간행하였다. 정조 때 보각(補刻), 1878년(고종 15)에 중간(重刊)하였다. 권1은 박팽년의 유고, 권2는 성삼문의 유고, 권3은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의 유고로 되어 있다. 책끝에는 사육신의 필적(筆跡)과 소전(小傳)이 붙어 있다. 책머리에 조경(趙絅)의 서문이 있고, 책끝에 김상헌(金尙憲) ·이경억 ·박숭고가 쓴 3편의 발문이 있다.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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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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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교관공(미암공, 휘 대래)의 시를 모은 시권은 어디 있을까?. 또 그 서문을 쓴 족손(?) 박팽년과는 어떤 관계인가?
홈, 부사공파란에 올리겠습니다.
김행순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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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행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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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여독을 풀기도 전에 이렇게 좋은 자료들을 찾아주시니 감사합니다.
꼼꼼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주 홈에 들르겠습니다.
편안한 주말보내세요.
솔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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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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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나는 공의 족손(族孫)뻘이고 ....
전서굥파 검교공의 따님이 박팽년의 증조부에게 시집가신것을 말함일 듯 합니다.
당시 순천박씨의 입향(전의 박동)도 외가(전서공파)때문이었다지요.
이로써 당시 안김과 순천박씨 가문의 혼맥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번 캠프에서 많을 것을 배웠지요
감사합니다.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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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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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아저씨, 귀한 자료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