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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흔 선조님과 같이간 인질(뚤루게(禿魯花)(4)한강의 아들 한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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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5-08-16 14:34 조회1,744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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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기

 

제학공  한사기(提學公  韓謝奇 )

공은 고려(高麗) 후기의 문신(文臣)이다. 아버지는 문혜공(文惠公) 강(康 : 初諱 璟)이요, 조정대부행예빈경(朝正大夫 行禮賓卿)에 금자 광록대부 수사공 좌복야(金紫 光綠大夫 守司空 左僕射)에 추증된 광윤(光胤)의 손자이다

 

한사기에 대한 기록은 별로 찾지 못했읍니다.   원나라에 가족을 모두 데리고 갔다는 기록도 있으나

청주한씨 족보에 보면 한사기의 후손이 번성한 것으로 보아 다시 돌아온 것을 추정합니다.

족보상에는 제학을 역임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청주한씨 홈페이지에서 실전되었던 한사기의 묘소를 찾은 경위를 옮겨 봅니다.

 

提學公 (諱 謝奇)의 墓

공(公)의 묘소는 광주읍 서쪽 소지면 서봉동 지금의 광산군 송정읍 서봉동 천등산 즉금 어등산 자좌(子坐)이다.

임진병란 후 실호되어 묘하(墓下)의 주민 오 성(吳 姓)이 비갈(碑碣)을 깨어버리고 투장(偸葬)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 자리가 한정승묘(韓政丞墓)라는 전설이 인근에 구전되어 옴을 단서로 하여 순조 3년 계해

(단기 4136 · 서기 1803)년에 후손 영의정 용구(用龜)가 해익(海益) 등 종인을 현지에 파견하고 광주 나주

양군수에게 서신을 보내어 산하 주민들과 함께 묘역 일대의 땅을 파고 믿을 만한 자취를 찾아보았더니

묘하(墓下)에 부서진 비석 한 조각에 우리의 성(姓)인 「韓」字가 분명하고 공의 諱字인 「謝」자는

오른쪽 가에 才는 파락(破落)되고 윈쪽편에 言과 중간의 身은 완전하게 남아 있으며 또 그 아래 「亞中」

두 字가 분명히 남아 있음을 발견하였다. 이리하여 아중대부 휘 사기(亞中大夫 諱 謝奇)라고 각자(刻字)된

부분임이 명백하야 의심할 여지가 없으므로 묘하(墓下)에 거주하는 태중(台重)이라는 사람을 산직(山直)으로

정하여 수호하도록 하고 후일 다시 개봉축(開封築)하기로 하였다. 순조33년 癸巳(단기 4166 · 서기 1833)에

4월 후손 사신(思臣), 군수 낙철(洛轍)이 경향각처에 통문을 발송하여 묘하에서 종회를 열고 묘소의 개봉축

비석의 건립, 재실과 위사의 설비 등을 숙의하였으나 중론이 구구하여 뜻한 바 일을 성취하지 못하고 비분한

속에 세월만 흘러가고 있었다. 광복후 4년 무자(단기 4281 · 서기 1948)에 후손 복리(福履), 진환(振煥),

근섭(瑾燮), 제종의 발의로 각처에서 후손들이 분연히 일어나서 합심협력하여 다음해 기축년에 봉분을

개축하고 비석을 세우고 위토를 매입하였으며 제실(鳳崗齋)를 건축하고 매년 3월 3일에 세일제(歲一齋)를

봉행하여 금일에 이르렀다.

 

 

한강=한사기의 아버지

 

한강(韓康)

생몰년 미상. 고려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초명은 경(璟).

고종 때 과거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감찰어사가 되었다가 금주수(金州守)가 되었다. 금주는 항상 전부(田賦)가

정액(定額)에 미달하여 수령이 많이 파면되었는데 이곳에 부임하여 둔전(屯田)을 경영, 곡식 2,000여석을 얻어 이민(吏民)을

편안하게 하였다.

이 공적으로 예부낭중(禮部郎中)을 제수받고 공부시랑 간의대부(工部侍郎諫議大夫)․국자대사성 한림학사(國子大司成翰林學士)

를 지냈다. 충렬왕 때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고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옮겼다.

뒤에 찬성사로 치사(致仕)하였다.

충렬왕 때 시무(時務)에 관하여 건의하였는데, 그 내용은 종묘의 향사를 엄격히 할 것, 제사(諸司)의 시물(市物)억매를 금할 것,

사체를 소중히 다룰 것, 살생을 금할 것, 사냥을 그치고 봉양을 절약하여 기갈을 진휼하게 할 것, 《법화경》을 숭상하고 독송할 것

등을 진언하기도 하였다.

시호는 문혜(文惠)이다.

댓글목록

김태서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태서
작성일

  ^^감사합닏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