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흔 선조님과 같이간 인질(뚤루게(禿魯花)(7)원부의 아들 원정(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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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5-08-25 11:05 조회1,535회 댓글0건본문
원관(元瓘)
생몰년 미상. 고려 충렬왕·충선왕 때의 재상. 원관(元灌)으로 쓰기도 한다. 본관은 원주(原州). 초명은 정(貞).
아버지는 충렬왕 때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를 지낸 부(傅)이고, 동생이 충렬왕 때 응방(鷹坊)을 관장하였던 경(卿)이며, 아들은 충숙왕 때 첨의찬성사에 오른 충(忠)이다. 세번 장가들었는데, 장인은 홍녹도(洪祿道)·곽세필(郭世弼)·김신(金信)이다.
1266년(원종 7)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279년(충렬왕 5)에는 독로화(禿魯花)로서 원에 보내졌다.
그뒤 고려에 돌아와 1287년 판비서시사(判祕書寺事)·보문각학사를 역임하였고, 다음해에는 전법판서로 있다가 환관(宦官)과 내료(內僚)들에 의해서 파직되었다.
뒤에 복직되어 재추의 반열에 올랐으며, 1298년 충렬왕이 복위한 직후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판도판서에 임명되었고, 1309년(충선왕 1)에는 밀직사가 되었다. 벼슬이 첨의찬성사에 이르렀다.
원부(元傅)
?∼1287(충렬왕 13). 고려의 문신. 본관은 원주(原州). 삼한공신(三韓功臣) 극유(克猷)의 9대손이며, 아버지는 진(瑨)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직사관(直史館)에 보직되고, 1269년(원종 10) 추밀원부사가 되어 이듬해 세자 심(諶)이 원나라에 갈 때 동행하였다.
1273년에는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가 되었다. 충렬왕초에 찬성사·판군부사사(判軍簿司事) 등을 지내고, 1277년(충렬왕 3) 수국사(修國史)가 되어 유경(柳璥)·김구(金坵) 등과 함께 《고종실록》 찬수의 명을 받았다.
전추밀부사(前樞密副使) 임목(任睦)이 사고(史藁)를 보니 공지(空紙)이므로 수찬관(修撰官) 주열(朱悅)이 탄핵하려 하자, 그는 유경과 의논하여 저지하고 발설하지 못하게 하였다. 사고가 백지인 것은 그가 직사관으로 있으면서 사고를 제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278년 왕과 공주가 원나라에 행차하는 데 종행하였고, 1284년 감수국사(監修國史)로서 《고금록 古今錄》 편찬에 참여하고, 첨의중찬(僉議中贊)으로 죽었다.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참고; 원부의 다른 아들. 원관의 동생 원경
원경(元卿)
?∼1302(충렬왕 28). 고려의 폐신(嬖臣). 본관은 원주(原州). 아버지는 중찬(中贊) 부(傅)이다.
성격이 매우 호협하여 활쏘기와 말달리기를 좋아하였으며, 글하는 선비는 좋아하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몽고어를 배워 여러 번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를 따라 원나라에 출입하여, 원나라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중랑장(中郎將)을 거쳐 삼도인물추고별감(三道人物推考別監)으로서 공주의 뜻에 거슬려 장형을 받았다. 장군을 거쳐, 충렬왕이 1283년(충렬왕 9) 응방도감(鷹坊都監)을 설치하자 그 부사가 되어 여러 차례 매를 바치러 원나라에 다녀왔다.
다시 대장군에 올랐으며, 1292년에는 왕명으로 원나라의 요양로(遼陽路)에 가서 1259년(고종 46) 이후로 원나라에 잡혀간 사람과 물건을 조사하여 되찾아왔다. 당시 제국대장공주의 겁령구(怯怜口)로 고려에 와서 권세를 부리던 인후(印侯, 忽剌歹)와 사돈을 맺고 함께 세도를 부려 횡포를 자행하였다.
1295년 좌부승지, 그 이듬해 부밀직사사(副密直司事)에 올랐다.
1297년에는 사신으로 원나라에 가서 제국대장공주의 상(喪)을 알렸으며, 1295년에는 왕명도 없이 인후 등과 함께 만호 한희유(韓希愈) 등을 체포하였다가 파면되었다. 뒤에 삼사사(三司使)·중경유수(中京留守)·과의군도지휘사(果毅軍都指揮使)를 거쳐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공조판서에 올랐다.
일찍이 원나라의 무략장군 정동행중서성도진무(武略將軍征東行中書省都鎭撫)가 되어 금부(金符)를 받았다.
원관의 아들 원충
원충(元忠)
1290(충렬왕 16)∼1337(충숙왕 복위 6). 고려 충숙왕의 행신(倖臣).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정보(正甫). 찬성사를 지낸 관(瓘)의 아들이며, 중찬(中贊)을 지낸 부(傅)의 손자이다.
8세에 음보(蔭補)로 동북면도감판관이 되었다.
18세에 충선왕의 부름을 받아 원나라에 있으면서 예빈내급사(禮賓內給事)가 되어 총애를 받았으며, 왕씨(王氏)를 받고 이름을 주(鑄)로 바꾸었다.
벼슬이 누전(累轉)하여 우사윤(右司尹)이 되었으나 왕은 대언(代言)을 맡게 하려 하였다. 이것을 사양한 데 대하여 왕은 노하여 사여(賜與)한 성명을 깎고 지철주사(知鐵州事)로 좌천하였다.
그뒤 왕이 원나라로부터 귀국하자, 압록강에서 왕을 맞이하여 전과 같은 특별한 대우를 받게 되었다.
그뒤 대언이 되고 밀직부사를 거쳐 평리(評理)가 되었다.
1321년(충숙왕 8)에서 5년간 충숙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줄곧 왕을 시종하였다. 이에 앞서 상왕으로서 원나라에 체류중이던 충선왕은 1320년, 자기를 신임하던 원나라의 인종(仁宗)이 죽자 원나라의 간신배의 모함으로 토번에 유배되었다가 진종(晉宗)이 즉위한 1323년에야 소환된 일이 있다.
한편, 1321년 4월 원나라에 간 충숙왕은 이듬해 심왕 고(潘王暠)의 참언으로 영종(英宗)에 의하여 힐책을 받고 국왕인(國王印)을 빼앗기게까지 되었다.
심왕은 충숙왕을 퇴위시키고 고려 국왕이 되려 하였다. 이에 고려에서는 왕위쟁탈전이 벌어지고 1322년에는 권한공(權漢功) 등이 백관을 모아 심왕의 국왕취임을 위하여 원나라의 중서성에 글을 올리기까지 하였다.
이듬해 영종이 피살되고 진종이 즉위하자 충숙왕은 국왕인을 되돌려받고, 그 이듬해 5월에 귀국하게 되었다.
이와같이, 복잡하고 어려운 시대에 충숙왕을 섬긴 공으로 찬성사가 되고 추성좌리공신(推誠佐理功臣)의 호를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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