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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을 다녀 왔습니다 2-선정비를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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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식 작성일05-08-25 11:12 조회1,546회 댓글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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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들뜬 마음에 아침을 먹는지 마시는지 허겁지겁 서두릅니다.

대충  옷을 주섬주섬 걸치고 집을 나섭니다.

기름값 타령을 할 마누라에게는 학교에 가노라고 해놓고

유성 톨게이트를 올라 호남 고속도로를 내려 갑니다.

모악산이 나오고 내장산이 나올 때쯤은 서서히 휴게소의 커피 한잔이 생각 납니다.

백양사 휴게소에서 자동판매기의 따끈한 커피 한잔을 마시자니

하늘이 유난히 푸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처서가 지났다드니 가을인가 보다.

 

광산 나들목을 나가

나주로 갑니다. 왕건의 전설같은 얘기와 조선시대 전주와 더불어 전라도를 총괄하던 너른 벌판 위 아늑하게 자리잡은 나주의

전경이 새삼 눈에 들어옵니다. 영산포를 지나고 조금 더 달리니 영암의 이정표가 눈에 들어 옵니다. 영암가는 길 섶의 통나무집 식당에서 5천원 짜리 백반을 시키니 반찬이 스무가지는 넘게 나옵니다. 시원한 냉수 한 잔까지 곁들이니  포만감이 넘실댑니다.

영암에 도착해서 먼저 영암 향교를 갑니다. 사무국장 님께는 사전에 전화를 드려 놓았었습니다. 저간의 사정을 말씀드리니

어렵지 않게 "선정비가 비림속에 있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열 두어개의 선정비와 중건비 등이  홍살문을 지나  전각 옆 담장 밑으로 깔끔하게 일열로 서있습니다. 사무국장 님 말씀으로는 17-8년 전에 영암 읍내에 산재해 있던 것들을 향교내로 이설을 했는데 마모되거나 파손될까 노심초사 해서 옮겼다고 하셨습니다. 좌측 세번째 것이 휘 계현 공의 군수 선정비라 하시길래 긴가민가 합니다. 글씨가 마모되어 흐릿하게 보이고

내리는 빗자락에 글자가 더욱 않보였기 때문 입니다. 국장님이  '전남향교문화사' 라는 두툼한 두권의 책을 꺼내시더니

영암향교 편의 선생안을 펼쳐보이십니다. 관안이라고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영얌향교에 실린 기록으로는 1476년(성종7년) 부터 1972년까지 총 296명이 군수를 지냈답니다.   평균 재임기간은 20개월 이고 조선시대에는 264명이 군수를 지내셨고  왜정.미군정기 동안은 14인, 정부수립이후 37인 이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군수 264 명 중 순직1명. 병사 4명. 처귀(관직을 그만두고 향리로 돌아감) 는 68명. 파면 79명. 영전33명. 전근.기타 81명 이라 합니다. 파면된  79명 중에서도 체포되어 형벌을 받은 자가 13명. 정부에서 일방적으로 파면시킨자가 23명. 기타 각종 사유의 파면이 28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군수의 대부분이 행군수 이고 수군수는 단 3명이었다고 합니다.이는 조정에서 영암을 다른 군에 비하여 같은 군이라도 높이 대우하였음을 반증하고 있는것 같습니다. 계가 높이 직이 낮은 것은 행이라 하고 계가 낮고 직이 높으면 수라 하는 행수의 제도가 조선 세종때 정립되어 시행되었다고 합니다. 휘 계현 공은 임란 시의 공적으로 선무원종호성공신 3등에 책되시어 여주목사로  부임 시 향리인 충주 엄정을 들렀다고 비판을 받으나 선조께서 너그러이 봐주신것이 왕조실록에 나옵니다만 그 이후 이곳 영암군수로 오시니

공신을 특별하게 중요한 지역으로 보내신 듯 합니다. 이곳 영암은 육지로는 평야와 산물이 많고 바다로는 왜적의 출입로니 중요한 곳일 수 밖에 없는 듯 합니다.

'전남향교문화사' 중의 영암의 역대 군수 기록을 보니 선조 34년(1601) 에 취임하셔서 선조 38년 (1605)에 이임하신것으로 나오고  요적 항목에는 "만포첨사로 이임. 비가 세워짐" 이라 적혀 있었습니다. 어사의 계로 부정으로 파면된 사람 등등 역대 군수의 치적이나 공과가 짧지만 적시된 요적에 우리 조상님은 안동 김문의 선조님은 자랑스러이 적혀 있었습니다.  긍지와 뿌듯함이 부풀어 오릅니다. 향교를 나서서 영암군청으로

갑니다. 문화관광부 문화예술 담당자께 영암군지를 보내준 것을 감사인사 여쭙고 영암지역의 금석문 등을 조사한 자료등이 있는지 물어보니 1996년 12월 순천대학교 박물관에서 보고한 '영암군 금석문 조사 보고서'를 보여 줍니다. 그것을 살펴보니 앞부분에 2번째로 기재되어 있습니다. " 군수 김공 계현선정비" 소재지: 영암읍 교동리 365 영암향교내. 실측: 비좌: 100x50x12. 비신:124x53x15. 비향:서. 건립연대:조선선조38년(1605). 기타: 1601 - 1605 군수 역임. 만포첨사로 이임. 전면에만 음각하여 새김. 마멸이 심한 상태. 자경은 12.5 cm. 전면(서): 군수김공계현선정비" 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찾고자 하니 찾아 지는가 봅니다. 담당 직원에게 감사드리니 자신의 일인양 기뻐 합니다. 영암군의 곰무원들이 모두 친절하신것 같습니다. 일회용 카메라를 하나 구입해  다시 향교로  옵니다. 비석 앞에 서서 자세히 들여다 보니 글짜가 조금씩 눈에 들어 옵니다.  사진을 찍고 사무국장님께 그런 사정을 말씀드리니 축하를 하십니다. 그러면서 안동김씨에 대해서 이런저런 말씀들을 해주십니다. 대성 벌족이고 유명하신 학자와 경세가와 충신들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니 하나같이 정확하고 확실하십니다. 또  마음이 뿌듯해 집니다.

향교문화사가 잘 만들어진 것 같아 인쇄비만 드리고 책을 한질 구해 길을 나섰습니다. 돌아오는 길이 너무도 행복합니다.

나주를 지나 광주로 들어오는 길목에  멋진 분재원이 있어 잠깐 들렀습니다. 화신 분재원 이랍니다. 이곳에 들러 분재를 구경하고 주인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같이 구경하신 분이 광주로 가는 지름길을 일러줄테니 따라 오라는 군요. 그분의 BMW 승용차를 따르니 얼마안되어 고속도로 나들목이 나옵니다. 감사 인사를 드리고 고속도로에 올라 살살내리는 빗길을 달립니다. 백양사에서 빠져나와 담양을 갑니다. 메타스퀘이어 가로수길을 달려 담양을 거쳐 순창으로 갑니다. 제가 좋아하는 장아찌 반찬을 몇 개 사고 주인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보니 아주머니는 덤으로 된장도 맛보라며 한봉지 담아 주십니다. 인정을 담아 다시 전주를 향합니다. 강천산을 지나니 모악산이 한 눈에 들어 옵니다. 전주를 돌아 대전으로 오니 유성 나들목 앞 월드컵 경기장 불 빛이 환합니다. " 아, 오늘이 k-리그 축구가 있는 날이지" 경기장에 들어서니 후반전이라고 입장료도 안받습니다. 대전과 대구의 시합이 있습니다. 빗물먹은 푸른 잔디가 싱싱합니다. 대전이 2:1 로 이겼지요. 경기장을 나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 오늘만 같아라". 조상을 알고, 사람살이를 느끼고, 사람의 정을 맛보았던 오늘만 같아라.

집으로 돌아와 "향교문화사"를 자세히 들여다 보니 전라우도 수군절제사를 지내셨던 휘 계현 공의 아드님 휘 일(초명 술) 이 생각 납니다. 공의 기록을 찾다보니  상권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다음 휴가 땐 공의 흔적을 찾아 전라 우수영 을 또 찾아 헤메야 할 것 같습니다. 영암은 제게새로운 임무를 주는 곳 같습니다. 그렇듯  영암은 저의 곁에 함께 있었습니다. 올 여름엔......

댓글목록

솔내님의 댓글

profile_image 솔내
작성일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선조님의 자취를 찾는 일은 본인에게는 무한한 기쁨니고
타인에게는 훌륭한 교과서가 되지요.
선정비 사진 있으시면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음 영암 갈 일이 있으면 한번 들려보겠습니다....

김영윤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영윤
작성일

  하루를 한달같이 요긴하게 보내신 완식님의 부지런함과 숭조 열의에
경의를 표합니다
영암의 선조님 선정비 답사기 감동적으로 읽었습니다

김윤만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윤만
작성일

  얼마나 큰 기쁨이고 보람이었겠습니까?
새로운 선조님의 기록을 대하니 저 또한 기쁩니다.
월출산 산행과 더불어 답사하고픈 마음 간절합니다. 

김주회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주회
작성일

  와아! 함께 가는 듯 합니다. 그리고 감동적입니다. 부드러우면서도 전문적 무게있는 충실한 답사기, 그러면서도 또 다정다감한...
3년전인가? 혼자서 밤기차(조치원발 23:57) 타고 목포 가서, 새벽 버스 타고 강진 성전면 내려서, 택시 타고 월출산 무위사 구경하고, 한폭의 수채화같은 길을 걸어서 월남사지 진각국사비(김효인 서) 보고, 월출산을 걸어 넘어서 영암시내 어슬렁거리다, 광주박물관 갔다가(진각국사비 비편 구경하려고) 조치원으로 돌아온 적 있습니다. 상서공(휘 효인)께서 왕명으로 비문을 쓴 것이 영암 도갑사 등지에도 있다고 하는데, 도갑사도 한차례 뒤져 보았으나...

김은회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은회
작성일

  완식님 얼마나 큰 기쁨이고 보람이었겠습니까?
선조님의 기록을 대하니 저 또한 기쁩니다.
답사기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