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백범일지(9)우리집과 내 어릴 적(7) - 동학 접주 이름을 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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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5-10-29 10:02 조회1,501회 댓글1건본문
우리집과 내 어릴 적(7) - 동학 접주 이름을 버리다
나는 공손히 두 사람을 향하여 '선생'이라고 존칭하고, 이처럼 찾아와 주셨으니 무슨 좋은 계책을 가르쳐 주시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그런즉 정씨가 더욱 교만한 태도로 말하기를, 비록 계책을 말하기로니 네가 알아듣기나 할까, 실행할 자격이 없으리라고 비웃은 뒤에, 더욱 호기 있는 어성으로, 동학 접주나 하는 자들은 어줍지 않게 호기가 충천하여 선비를 초개(草芥)와 같이 보니 너도 그런 사람이 아니냐고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더욱 공손한 태도로,
"이 접주는 다른 접주와 다를는지 선생께서 한 번 가르쳐 보신 뒤에야 알 것이 아닙니까?"
하였다. 그들은 둘이 다 니보다 십년장은 될 것 같았다.
그제야 정씨가 흔연히 내 손을 잡으며 계책을 말하였다. 그것은 이러하였다.
(1) 군기를 정숙히 하되 비록 병졸을 대하더라도 하대하지 아니하고 경어를 쓸 것.
(2) 인심을 얻을 것이니 동학군이 총을 가지고 민가로 다니며 집곡이니 집전이니 하고 강도적 행위를 하는 것을 엄금할 것.
(3) 초현(招賢)이니 어진 이를 구하는 글을 돌려 널리 좋은 사람을 모을 것.
(4) 전군을 구월산에 모으고 훈련할 것.
(5) 재령, 신천 두 고을에 왜(倭)가 사서 쌓아 둔 쌀 2천 석을 몰수하여 구월산 패엽사(貝葉寺)에 쌓아 두고 군량으로 쓸 것.
나는 곧 이 계획을 실시하기로 하고 즉시 전군을 집합장에 모아 정씨를 모주(謀主), 우씨를 종사(從事)라고 공포하고 전군을 지휘하여 두 사람에게 최경례(最敬禮)를 시켰다. 그러고는 구월산으로 진을 옮길 준비를 하던 차에 어떤 날 밤에 신천 청계동 안 진사(安 進士)로부터 밀사가 왔다. 안 진사의 이름은 태훈(泰勳)이니 그의 맏아들 중근(重根)은 나중에 이등박문을 죽인 안중근이다. 그는 글 잘하고 글 잘 쓰기로 이름이 서울에까지 떨치고 또 지략도 있어 당시 조정의 대관들까지도 그를 무섭게 대우하였다.
동학당이 일어나매 안 진사는 이를 토벌하기 위하여 그의 고향인 청계동 자택에 의려소(義旅所)를 두고 그의 자제들로 하여금 모두 의병이 되게 하고 포수 3백 명을 모집하여서 벌써 신천 지경 안에 있는 동학당을 토벌하기에 많은 성공을 하여서 각 접이 다 이를 두려워하고 경계하던 터이었다.
나는 정 모주로 하여금 이 밀사를 만나게 하였다. 그의 보고에 의하면 나의 본진이 있는 회학동과 안 진사의 청계동이 불과 20리 거리이니 만일 내가 무모하게 청계동을 치려다가 패하면 내 생명과 명성을 보장하기 어려울 것이니 그러하면 좋은 인잴ㄹ 하나 잃어버리게 될 것인즉 안 진사가 나를 위하는 호의로 이 밀사를 보냈었다는 것이었다. 이에 곧 나는 참모 회의를 열어서 의논한 결과 저편에서 나를 치지 아니하면 나도 저편을 치지 아니할 것, 피차에 어려운 지경에 빠질 경우에는 서로 도울 것이라는 밀약이 성립되었다.
예정대로 나의 군사는 구월산으로 집결하였다. 재령, 신천에 있던 쌀도 패엽사로 옮겨왔다. 한 섬을 져 오면 서 말을 준다고 하였더니 당일로 다 옮겨졌다. 날마다 군사 훈련도 여행(勵行)하였다. 또 인근 각동에 훈령하여 동학당이라고 자칭하고 민간에 행패하는 자를 적발하여서 엄벌하였더니 며칠이 안 지나서 질서가 회복되고 백성이 안도하였다.
또 초현문을 발표하여 널리 인재도 수탐하였다. 송종호(宋宗鎬), 허곤(許坤) 같은 유식한 사람을 얻었다. 패엽사에는 하은당(荷隱堂)이라는 도승이 있어서 수백 명 남녀 승도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나는 가끔 그의 법설을 들었다.
이러는 동안에 경군과 왜병이 해주를 점령하고 옹진, 강령 등지를 평정하고 학령을 넘어온다는 기별이 들렸다. 그들의 목표가 구월산일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화근은 경군이나 왜병에 있지 아니하고 나와 같은 동학당인 이동엽(李東燁)의 군사에 있었다.
이동엽은 구월산 부근 일대에서 가장 큰 세력을 잡은 접주로서 그의 부하는 나의 본진 가까이까지 침입하여 노략질을 함부로 하였다. 우리 군에서는 사정없이 그들을 체포하여 처벌하였기 때문에 피차간에 반목이 깊어진 데다가 우리 군사들 중에 군율에 의한 형벌을 받고 앙심을 품은 자와 노략질을 마음대로 하고 싶은 자들이 이동엽의 군대로 달아나는 일이 날로 늘었다.
이리하여 이동엽의 세력은 날로 커지고 내 세력은 날로 줄었다. 이에 나는 최고 회의를 열고 의논한 결과 나는 동학 접주인 칭호를 버리기로 하고 군대를 허곤에게 맡기기로 하였다. 이는 나의 병권을 빼앗으려 함이 아니오, 나를 살려내고자 하는 계책이었다. 이에 허곤은 송종호로 하여금 평양에 있는 장호민(張好民)에게 보내는 소개 편지를 가지고 평양으로 떠나게 하였으니 이것은 황주 병사의 양해를 얻어서 일을 정치적으로 해결하려 함이었다.
이때는 내 나이가 열 아홉, 갑오년(甲午年) 섣달이었다. 나는 몸에 열이 나고 두통이 심하여서 자리에 눕게 되었다. 하은당 대사는 나를 그의 사처인 조실에 혼자 있게 하고 몸소 병구완을 하였다. 수일 만에 내 병이 홍역인 것이 판명되어서 하은당은,
"홍역도 못한 대장이로군"
하고 웃었다. 그러고는 홍역을 다스린 경험이 있는 늙은 승수자(承受者) 한 분을 가려 내 조리를 맡게 하였다.
이렇게 병석에 누워 있노라니 하루는 이동엽이 전군을 이끌고 패엽사로 쳐들어온다는 급보가 있고 뒤이어 어지러이 총소리가 나며 순식간에 절 경내에는 양군의 육박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원래 사기가 저상한 데다가 장수를 잃은 나의 군사들은 불의의 습격을 받아서 일패도지(一敗塗地)하고 나의 본진은 적의 제압한 바 되고 말았다. 나의 군사들은 보기에도 흉하게 도망하여 흩어지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이동엽의 호령이 들렸다.
"김 접주에게 손을 대는 자는 사형(死刑)에 처한다. 영장 이종선(領將 李鍾善) 이놈만 잡아 죽여라."
이 말을 듣고 나는 이불을 차고 마루 끝에 뛰어 나가서,
"이종선은 내 명령을 받아서 무슨 일이나 한 사람이니 만일 이종선이가 죽을 죄를 지었거든 나를 죽여라!"
하고 외쳤다.
이동엽이 부하에게 명하여서 나를 꼭 껴안아서 수족을 놀리지 못하게 하고 이종선만을 끌고 나가더니 이윽고 동구에서 총소리가 들리자, 이동엽의 부하는 다 물러가고 말았다.
이종선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나는 동구로 달려 내려갔다. 과연 그는 총을 맞아 쓰러지고 그의 몸에 입은 옷은 아직도 불에 타고 있었다. 나는 그의 머리를 안고 통곡하다가 내 저고리를 벗어 그의 머리를 싸주었다. 이 저고리는 내가 남의 웃사람이 되었다 하여 어머니께서 지어 보내주신 평생 처음 입어보는 명주 저고리였다. 동민들은 백설 위에서 내가 벌거벗고 통곡하고 앉았는 것을 보고 의복을 가져다가 입혀 주었다. 나는 동민들을 지휘하여 이종선의 시체를 매장하였다.
댓글목록
김완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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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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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안녕하세요.
대전에 살고있는 익원공파 김완식 입니다.
연락처를 몰라서 연락을 드릴려니 방법이 이것밖에 없습니다. 전화통화를 할 수 있게되기를 바랍니다.
연락주시면 제가 연락드리겠습니다.016-9577-9893/042-523-9893.w0806@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