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원공 연보자료 05(23-2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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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5-10-30 00:48 조회1,578회 댓글1건본문
(23세) 1363년 공민왕12
○8촌 김구용(26세), 1363년 정언을 거쳐 헌납이 되었다.
△김사형, 공민왕(恭愍王) 때에 고공 산랑(考功散郞)이 되어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직랑(直郞) 유경원(劉慶元)과 더불어 말하기를, ”안렴(按廉)과 수령(守令)은 직(職)이 공부(貢賦)를 장리(掌理)하는 것인데 근래에 주현(州縣)이 많이 공(貢)을 궐(闕)하여 혹 3~4년에 이르니 청컨대 논하여 법과 같이 하소서.ꡓ하니 이를 청종(聽從)하였다.
<시대상황>
그러나 홍건적 및 왜구의 잦은 침입과, 1363년 찬성사 김용(金鏞)의 반란,
○정운경(鄭云敬), 1363년 검교밀직제학(檢校密直提學)에 제수되었으나
○최영(崔瑩), 1363년에 김용(金鏞)의 난(興王寺의 變)을 평정시켜 그 공으로 훈 1등에 진충분의좌명공신(盡忠奮義佐命功臣)이 되었다. 뒤이어 판밀직사사 평리(判密直司事評理)를 거쳐 찬성사(贊成事)가 되었다.
○정몽주(鄭夢周), 이듬해 낭장 겸 합문지후(郎將兼閤門祗候)·위위시승(衛尉寺丞)을 거쳐, 동북면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 한방신(韓邦信)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종군, 서북면에서 달려온 병마사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여진토벌에 참가하고 돌아와 전보도감판관(典寶都監判官)·전농시승(典農寺丞)을 역임하였다.
당시 상제(喪制)가 문란하여져서 사대부들이 모두 백일 단상(短喪)을 입었는데, 그는 홀로 부모의 상에 여묘(廬墓)를 살아 슬픔과 예절을 모두 극진히 하였기 때문에 1366년 나라에서 정려를 내렸다.
(24세) 1364년 공민왕13
○8촌 김제안(25세쯤), 1364년(공민왕13)에 좌정언(左正言)이 되었는데 한휘(韓暉)와 이구수(李龜壽)가 변공(邊功)으로 첨의평리(僉議評理)에 발탁되어 기밀을 마음대로 하고 총행이 지나치므로 고신(告身:辭令書)에 서명하지 않았다. 이 일로 두 사람이 참소하여 하옥되려다가 밀직부사 김달상(金達祥) 등이 간관을 하옥하면 훗날 모든 허물이 왕에게 돌아갈 것이며, 고신에 서명하지 않은 것이 죄가 될 것이 없다고 만류하여 모면하였다. 그러나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으므로 왕이 강제로 고신에 서명하게 한 뒤 파면하였다.
<시대상황>
1364년 충선왕의 셋째아들 덕흥군(德興君)옹립을 내세운 친원파 최유(崔濡)의 반란 등으로 국력이 크게 소모되기도 하였다.
○최영(崔瑩), 1364년 원나라에 있던 최유(崔濡)가 덕흥군(德興君:충선왕의 제3자)을 왕으로 받들고 군사 1만명으로 압록강을 건너 선주(宣州:지금의 宣川)에 웅거하자, 서북면도순위사(西北面都巡慰使)로 이성계(李成桂) 등과 함께 수주(隨州:지금의 定州)의 달천(獺川)에서 싸워 물리쳤다.
또 동녕로만호(東寧路萬戶) 박백야대(朴伯也大) 가 연주(延州:지금의 雲山郡)에 침입하자, 장수를 보내어 물리쳤다.
○이성계, 1364년 최유(崔濡) 가 원제(元帝)에 의하여 고려왕에 봉하여진 덕흥군(德興君)을 받들고, 원병(元兵) 1만명을 인솔, 평안도 지방에 쳐들어오자, 최영(崔瑩)과 함께 수주(隋州) 달천(獺川)에서 이들을 섬멸하였다. 이무렵 여진족은 삼선(三善), 삼개(三介)의 지휘 아래 동북면에 침범, 함주까지 함락시켜 한때 기세를 올렸으나, 그는 이들을 크게 무찔러 격퇴함으로써 동북면의 평온을 되찾았다. 이 해에 밀직부사의 벼슬과 단성양절익대공신(端誠亮節翊戴功臣)의 호를 받았다.
○정몽주(鄭夢周), 이듬해 예조정랑으로 성균박사를 겸임하였다. 당시 고려의 《주자집주 朱子集註》에 대하여 정몽주의 강설이 사람의 의표를 찌르게 뛰어나 모두들 의아해하더니, 송나라 유학자 호병문(胡炳文)의 《사서통 四書通》이 전하여지면서 이와 서로 맞아 떨어지는 것을 보고 모두 탄복하였고, 대사성 이색(李穡)이 정몽주를 높이 여겨 ‘동방 이학(理學)의 시조’라 하였다.
태상소경(太常少卿)과 성균관 사예·직강·사성 등을 역임하고,
(25세) 1365년 공민왕14
○큰형 김사겸(金士兼)(33세쯤), 1365년 종부령( 품)을 지냈고, 김사겸의 아들 김우(金瑀,金禑)는 1365년 權務(=현령)이었다. <1365 이색 찬 한공의 묘지명>
*김사겸은 판사에 이르렀고, 배위 청주한씨(父한공의, 祖한악, 曾祖한사기, 外祖경사만)와의 사이에 1남(김우), 2녀(윤신보, 유소문에 출가)를 두었다. 아들 김우는 부사에 이르렀다. 무후하여 후사가 이어지지 못하고, 묘소도 알 길이 없다.
---손아래 동서 : 1365년 삼사우윤 이창로(?이제현의 큰아들, ?김묘의 사위), 군부판서 염흥방
<시대상황>
더구나, 1365년 노국대장공주가 죽자 왕은 실의에 빠져, 모든 국사를 신돈(辛旽)에게 맡기고 불공에만 전심하였다. 그러나 정권을 장악한 신돈은 실정을 거듭하고 왕을 해치려 하므로, 그를 수원으로 귀양보낸 뒤 처형하였다.
○이제현, 1365년 왕이 신돈을 총애하므로 이제현은 신돈의 골상을 들어 경계할 인물임을 아뢰었고, 신돈은 백방으로 이제현을 해치려 하였다. ---(1371년)신돈이 실각하자 공민왕이 말하기를, "익재의 선견지명은 따라갈 수 없도다. 일찍이 신돈은 마음이 올바른 사람이 아니라 하더니, 지금 과연 증험되었다." 하였다.
○정운경(鄭云敬), 1365년 병으로 사퇴하고 영주에 돌아와 이듬해 죽었다. 사시(私諡)는 염의(廉義)이다.
○최영(崔瑩), 이듬해 왜구가 교동(喬桐)·강화(江華)에 침입하자 동서강도지휘사(東西江都指揮使)가 되어 동강(東江)에 나가 진수하였는데, 이때 신돈(辛旽)의 참소로 계림윤(鷄林尹)으로 좌천되었다가 귀양갔으나,
댓글목록
솔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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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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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그곳은 벌써 추위가 닥쳤겠지요?
감기 조심하시구요/
뵐날 손꼽아 기다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