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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하 장군(철원 교육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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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 작성일02-04-07 22:33 조회1,59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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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0(선조 13)∼1619(광해군 11) 조선중기 무신
본관은 안동
철원군 어운면 갈운동 하갈리 출신
김방경의 후손으로 김지사(金地四)의 장남으로 출생, 자는 경희, 시호는 충무
14세에 전염병으로 양친을 잃고 동생 응해(應海)와 함께 자라면서 사냥을 즐겨 맨손과 단검으로 범과 돼지를 잡았다고 한다.

선조 37(1604)년, 25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함경도 경성에서 변방을 지켰고 31세 때 선천 군수를 하면서 청렴하게 백성을 다스렸다.
1610년 다시 선전관이 되었고, 이어 경원판관을 거쳐 도총부경력 삼수군수 북우후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광해군 10년(1618)에 후금이 압록강 건너편에 나라를 세우자 명에서 건주위를 공격하기 위하여 조선에 원군을 청하자, 김응하는 선천군수로서 조방장이 되어 부원수 김경서 휘하에 들어갔다. 다음해 도원수 강홍립을 따라 좌영장이 되어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3월에 명나라 도독 유정이 명나라 군대 3만명을 지휘하여 부차령에서 후금의 군대와 접전 끝에 대패하자, 도독 유정은 자결하고 조선의 구원군만이 후금의 6만대군과 대치하게 되었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우영장 이일원은 달아났고, 김응하만이 3천의 구원군을 이끌고 고군분투 끝에 전사하고 휘하의 군사는 장수가 죽자 패주하였다. 김응하가 전사하자 조정에서는 그의 전공을 높이 찬양하여 그가 전사하던 다음달에 병조판서를 추증하였고, 5월에 정충사를 용만강가에 짓고 여기에 충혼비를 세워 그의 충절을 널리 선양하였다. 이어 조정에서는 충무라는 시호를 내렸고, 명나라에서도 신종때에 요동백에 추봉하였다.
1620년 조정에서 영의정을 추사하였고, 1621년 9월에 훈련도감을 시켜 김응하의 행적을 적은 《충열록》울 간행하였다. 그의 행장록이 남아있기에 그의 행장은 소상하게 남아 전한다.

전에는 김응하의 사당이 네곳에 있었으나, 지금은 그의 고향인 철원 포충사에서 매년 음력 2월과 8월의 중정일에는 철원의 유림이 주관하는 제향을 올리고 있다. 그의 묘정비는 송시열이 지었고, 사헌부 지평인 박태웅이 글씨를, 영의정 김수항이 제자를 썼으며, 강원도유형문화재제105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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