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원공 연보자료 09(39-4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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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5-11-10 18:18 조회1,454회 댓글2건본문
(39세) 1379년 우왕5
○8촌 김구용의 어머니(민사평의 딸), 5월 계사일에 병으로 죽으니 나이가 56세였다. 김구용(金九容)이 윤 5월 갑진(甲辰)에 그의 어머니 여흥군부인 민씨(閔氏)를 조모 김씨(金氏)의 무덤 곁에 장사하였는데, 거리가 십 몇 보나 되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참군사(?軍事) 명선(明善)을 이색에게 보내어 명(銘)을 구하여 이색이 묘지명을 찬하였다.
이때 김구용(42세)은 전 삼사좌윤, 김구덕(37세쯤)은 전 좌우위 보승산원, 큰 사위 김사안(42세쯤)은 (전)밀직부사 이었다. *손아래 동서들인 이창로, 최유경, 허호, 허의 등도 모두 관직명이 전직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4년전 1375년 김구용 유배때 집안(친인척)이 모두 연루된 것으로 볼수 있다.
<시대상황>
(40세) 1380년 우왕6
○형 김사렴의 장남 김간(金侃, ?세쯤), 1380년(우왕6 경신)에 護軍을 지냈다. 당시 처부 金懷祖는 판내부사를 역임. <1380 윤해 묘지명>.
*김간(金侃) : 생몰년 미상. 안렴사공(김사렴)과 죽계부인 순흥안씨(부 안원숭, 조부 안목)와의 사이에서 6남(간,인비,위,제,약,식) 1녀(마희원에 출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벼슬이 안찰사에 이르렀다. 배위는 무주부인 광주김씨(=광산김씨)로 판서 金懷祖(김회조)의 따님이고, 무후하여 후손이 이어지지 않고 있다.
묘는 오창 목령 하사동 술좌에 여말선초의 묘의 형태인 웅대한 방형 석묘로 모셔져 있었고, 1998년 체경묘원으로 면봉시 문관석 등 석물을 옮겨오고, 사각방형 묘의 석대는 옮겨와서 체경묘원 오르는 길 계단에 쌓아 놓았고, 고려동경으로 추정되는 부장품 유물이 발견되어 현재 영모재에 보관하고 있다.
<시대상황>
○최영(崔瑩), 1380년 해도도통사(海道都統使)가 되어 동서강(東西江)에 나가 왜구를 막다가 병에 걸렸는데, 왕이 공을 기록한 철권(鐵券)을 내리고 공을 치하하는 교서를 내렸다.
○이성계, 1380년에 양광, 전라, 경상도 도순찰사가 되어, 아기바투(阿其拔都: 阿只拔都)가 지휘하던 왜구를 운봉(雲峰)에서 섬멸하였다. 그 전과는 역사상 황산대첩(荒山大捷)으로 알려질 만큼 혁혁한 것이었다.
○정몽주(鄭夢周), 1380년 조전원수로 이성계를 따라 전라도 운봉에서 왜구를 토벌하고 돌아와,
(41세) 1381년 우왕7
○8촌 김구용(44세), 1381년 다시 풀려나와 나라에서 그 풍의를 숭상하여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를 제수하였다. 왕의 절제없는 거둥을 경계하는 글을 올려 직간하였다.
○8촌 김구용(44세), 비서감 역임. 麗江에서 돌아와 용산 추흥정 이름을 짓고 글자를 써서 현판을 달았다.
1) 고려말의 한양 용산
용산(龍山)은 본래부터 산수(山水)를 즐길 수 있는 경치가 있는 것으로 일컬어진다. 또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五穀)이 잘 자란다. 강에는 배가 운행하고 육지에는 수레가 통행하여 이틀 밤낮이면 경도(京都)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여기에 별장을 마련하는 귀인들이 많다. <이숭인의 추흥정기>
2) 전(前) 봉익대부(奉翊大夫) 김공(金公)
봉익 김공은 이미 장년(壯年)에 중국에서 벼슬하여 그가 사귄 사람들은 모두가 고량진미를 먹으며 초헌을 타고 면관(冕冠)을 쓴 부귀한 무리들이며, 그의 노닐고 관람한 것은 다 높고 사치스럽고, 넓고 큰 것의 최대한 것이었다. 이제 안락하게 걷어 마음속에 간직하고 상쾌하며 시원한 기분으로 한 점의 먼지도 없으니, 대개 맑은 자이다. <이숭인의 추흥정기>
전(前) 봉익(奉翊) 김공(金公)이 벼슬에서 물러나와 여기에 쉬고 있는 지가 이미 오래다. 살고 있는 집 동쪽에서 우연히 한 높은 언덕을 발견하였다. 높고 길게 굽어서 형상이 배를 엎어 놓은것 같다. 드디어 그 위에 정자를 세웠는데 소나무를 베어 서까래를 걸고 띠풀을 베어 지붕을 덮었다. 땅이 높고 모진 곳은 평평하게 만들고 나무가 빽빽하게 가리운 것은 성기게 솎아내니 두루 돌아다니며 사방을 둘러보아도 좋지 않은 것이 없다. <이숭인의 추흥정기>
봉익대부 김공이 한양의 용산에 물러나 살면서 기거하는 집의 동쪽에 정자를 얽었다. <김구용의 추흥정시>
3) (1381년경) 김구용이 麗江에서 돌아와
김구용이 麗江에서 돌아와 그 정자에 올라가서 배회하고 바라보면서 담소를 나누었다. 이튿날 공이 김구용에게 그것에 이름을 지어 줄 것을 청하였다. <김구용의 추흥정시>
4) 개경에 들어가 이숭인 집에 여럿이 모여서
개경에 들어가자 子安 이숭인 댁에 모여서 그 정자의 이름이 지녀야 할 뜻을 논의하였다. 김구용이 말하기를 "용산은 매우 비옥하고 풍요하여 무릇 나오는 물건이 특별히 풍요롭고 부드럽다. 또 고기 잡는 것과 벼농사 짓는 모습을 노닐며 감상하는 아름다움이 있다. 그래서 공이 이것을 즐기며 여기서 사니 '추흥'이라고 이름을 짓는게 어떤가?"하니 여러 사람이 모두 좋다고 하였다. 이에 붓을 먹에 적셔 세 글자를 쓰고, 인하여 이숭인에게 기문을 지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여러 사람(정도전, 권근, ...)과 함께 김구용도 시를 읊었다. <김구용의 추흥정시>
이에 김구용에게 정자의 이름을 청하여 추흥정(秋興亭)이라는 석 자를 써서 현판을 달고 이숭인에게 기문을 부탁하였다. 이숭인이 추흥정기를 지었다. <이숭인의 추흥정기>
삼봉집 제1권 /오언고시(五言古詩)
추흥정에 제하다[題秋興亭] ---정도전
【안】 정자는 용산강(龍山江)에 있는데 이숭인(李崇仁)의 기(記)에 의하면 김봉익(金奉翊)이 이 정자를 창건하고, 김비감(金秘監)이 추흥(秋興)이라 편액(扁額)했다고 하였다.
김후는 본래부터 아상을 지녀 / 金侯有雅尙
산수 좋은 고을로 돌아왔네 / 歸來山水鄕
높은 데 올라 높은 정자를 짓고 / 登高構危亭
낮과 밤을 여기서 노닌다오 / 日夕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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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봉 그 아래에 내 집이 있어 / 我家三峯下
두 곳은 멀리 서로 바라다보이니 / 兩地遙相望
어느 때 그곳으로 돌아가서 / 何當歸去來
한 번 웃고 술잔 함께 들어 볼거나 / 一笑共深觴
○정도전(鄭道傳), 1377년에 풀려나서 4년간 고향에 있다가 삼각산(三角山) 밑에 초려(草廬:三峰齋)를 짓고 후학을 가르쳤으나, 향인(鄕人)재상이 서재를 철거하여 부평으로 이사하였고, 그곳에서도 왕모(王某)라는 재상이 별업(別業)을 만들기 위하여 재옥(齋屋)을 철거하여 다시 김포로 이사하였다.
양촌선생문집 제3권 /시 詩
용산(龍山)의 추흥정(秋興亭)에 기제(寄題)하다 ---권근
농가는 쉴새없이 괴롬만 맛보더니/田家作苦不曾休
벼 곡식 익어가자 수확 있어 기쁘구려/禾稼成時喜有秋
정자에 앉은 나도 이 기쁨 함께 하여/亭上我能同此樂
산중의 사람들과 서로 만나 노니노라/山中人亦可相遊
들 바람 우수우수 갓 위에 불어오고/野風颯颯吹烏帽
강 비는 부슬부슬 낚싯배에 뿌리누나/江雨蕭蕭灑釣舟
어찌하면 임을 따라 깨끗이 돌아가서/安得從公一歸去
산수로 벗을 삼아 십년 시름 녹일거나/登臨消盡十年愁
추론> (1381년경) 전(前) 봉익대부(奉翊大夫) 김공(金公)은? ⇒ 김사안
가) 김구용, 이숭인, 정도전, 권근 등과 매우 절친했던 우리 가문 인물 중에서,
나) 이미 장년(壯年)에 중국에서 벼슬하였고,
다) 벼슬에서 물러나와 한양의 용산에 물러나 살면서 쉬고 있는 지가 이미 오래되었고, 기거하는 집의 동쪽에 정자(추흥정)을 지은 (1381년경) 전(前) 봉익대부(奉翊大夫)로 불린 김공(金公)은 누구인가?
가)충강공(김사안)은 김구용의 매제임. 8촌 당내간 혼인을 한 것으로 보아 (거주지, 교류상)매우 친밀했던 것으로 볼수 있음. 김사안은 이색, 이숭인 등과 같이 활동한 기록이 있음.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과 김사안의 아버지 김천이 교유가 있었으므로 동생 김사형과 마찬가지로 정도전과도 교유가 있었을 것임.
나)벼슬이 밀직부사에 이른 김천은 백부 김영돈과 부 김영후가 원나라 연경에 수시로 다녀 왔고, 고모부 별리가불화는 원나라 고관(평장사)으로 있었으며, 김천은 원나라로부터 승무랑 자승고경점의 벼슬을 받았다고 하는데, 고려사에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면 원나라에 오래 거주하였거나 자주 내왕하였을 것으로 볼수 있음. 따라서 (기록은 보이지 않지만) 김천의 아들들인 김사겸, 김사렴, 김사안, 김사형 등도 장년(젊은 시절)에 할아버지 김영후, 아버지 김천을 따라(자제군관 등) 원나라에서 거주하거나 벼슬을 지냈을 가능성이 있음. 당시 전원발, 이곡, 이색, 신현 등 많은 사람들이 원나라에 거주하면서 벼슬을 지내고 있다.
다>김사안은 (?33세)1370년 밀직부사를 지냈고<1370 처외조모 민사평처김씨(김륜의 따님) 묘지명>, (?42세)1379년 (전) 밀직사부사 이었다<1379 처모 김묘처민씨 묘지명>는 기록으로 보아 1370년 전후 (?신돈과의 관련으로) 벼슬에서 물러난 것으로 볼수 있다. 1381년경에는 벼슬에서 물러나와 한양의 용산에 물러나 살면서 쉬고 있는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이숭인의 추흥정기>는 기록과 일치하고 있음.
김사안은 1370년 밀직부사를 지냈는데, 밀직부사는 품계로 보면 봉익대부에 해당됨. 김사안의 아버지 김천도 관직이 밀직부사에 이르렀는데 품계가 봉익대부였음.
라) 추흥정에 대한 후세의 기록이 없는 것은 김사안이 무후하여 후손이 이어지지 못한 때문이 아닌가 함.
■ 김제안(?1340-1368)도 한때 용산에 살았다.
<도은집>
金仲賢이 살던 곳을 지나가다---이숭인
동산에는 봄이 가며 낙화가 날고,
사립문 닫았는데 푸른 이끼(蒼苔창태) 끼었구나.
시와 술로 지내 버린 10년이 꿈 같으며,
용산에 이 태양은 맑게도 지는구나.
<동문선>
휴가(休暇) ---김제안
天下紛紛事鬪爭(천하분분사투쟁) : 천하는 어지러이 싸움만 일삼거니
黎民何日見昇平(려민하일견승평) : 백성들은 그 언제나 태평 세월 만나보리
水沈煙裏茅堂靜(수침연리모당정) : 물안개에 잠긴 초가집이 고요하니
時復挑燈憶孔明(시부도등억공명) : 때때로 등불 돋우며 공명을 그리워하네
<시대상황>
○최영(崔瑩), 이듬해 수시중(守侍中)이 되었고, 아버지에게는 순충아량염검보세익찬공신(純忠雅亮廉儉輔世翊贊功臣)·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판문하사(判門下事)·영예문춘추관사(領藝文春秋館事)·상호군(上護軍)·동원부원군(東原府院君)이 증직되고, 어머니 지씨(智氏)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이 되었다. 뒤이어 영삼사사(領三司事)가 되었고,
○정몽주(鄭夢周), 이듬해 성근익찬공신(誠勤翊贊功臣)에 녹훈되어, 밀직부사 상의회의도감사 보문각제학 동지춘추관사 상호군(密直副使商議會議都監事寶文閣提學同知春秋館事上護軍)이 되었다.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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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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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고려말에 활동했던 우리 선조님들과 그 주변 인물들을 잘 보았습니다. 그런데 8촌 내의 혼인이라---??!!
솔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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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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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저도 봉익대부 김공이 누굴까 하고 매우 궁금했습니다.
좀더 자료를 모아서 확인할 사항이군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