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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백범일지(12)기구한 젊은 때(1) - 참빗장수로 변장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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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5-11-15 12:48 조회1,672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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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구한 젊은 때(1) - 참빗장수로 변장하고

내가 청국을 향하여 방랑의 길을 떠나기로 작정한 바로 전날, 나는 넌지시 안 진사를 마지막으로 한 번 보고 속으로만이라도 하직하는 정을 표하려고 안 진사 집 사랑에를 갔다가 참빗장수 한 사람을 만났다. 그 언어 동작이 아무리 보아도 예사 사람이 아닌 듯하기로 인사를 청한즉 그는 전라도 남원 귓골 사는 김형진(金亨鎭)이란 사람이요, 나와 같이 안동 김씨요, 연치는 나보다 8,9세 위였다. 나는 참빗을 사겠노라고 그를 내 집으로 데리고 와서 하룻밤을 같이 자면서 그의 인물을 떠보았다.

과연 그는 보통 참빗장수가 아니요, 안 진사가 당시에 대문장, 대영웅이라는 말을 듣고 한 번 찾아보러 일부러 떠나온 것이라고 한다. 인격이 그리 뛰어나거나 학식이 도저한 인물은 못되나 시국에 대하여서 불평을 품고 무슨 일이나 하여 보자는 결심이 있어 보였다. 이튿날 그를 데리고 고 선생을 찾아 선생에게 인물 감정을 청하였더니 선생은, 그가 비록 주뇌가 될 인물은 못되나 남을 도와서 일할 만한 소질은 있어 보인다는 판단을 내리셨다. 이에 나는 김씨를 내 길동무로 삼기로 하고 집에서 먹이던 말 한 필을 팔아서 여비를 만들어 가지고 청국에 가는 길을 떠났다.

우리의 계획은 백두산을 보고 동삼성 - 만주 -을 돌아서 북경으로 가자는 것이었다. 평양까지는 예사대로 가서 거기서부터는 나도 김형진 모양으로 참빗과 황화장수로 차리기로 하고 참빗과 붓, 먹과 기타 산읍에서 팔릴 만한 물건을 사서 둘이서 한 짐씩 걸머졌다. 그리고 평양을 떠나서 을밀대와 모란봉을 잠시 구경하고 강동, 양덕, 맹산을 거쳐 함경도로 넘어서서 고원, 정평을 지나 함흥 감영에 도착하였다.

강동 어느 장거리에서 하룻밤을 자다가 칠십 늙은이 주정장이한테 까닭모를 매를 얻어맞고 한신(韓信)이 회음(淮陰)에서 어떤 젊은 놈에게 봉변 당하던 것을 이야기하고 웃은 일이 있었다. 고원 함관령의 이태조가 말갈을 쳐 물린 승전비를 보고 함흥에서는 우리 나라에서 제일 길다란 남대천 나무다리와 또 네 가지 큰 것 중의 하나라는 장승을 보았다.

이 장승은 큰 나무에 사람의 얼굴을 새긴 것인데 머리에는 사모를 쓰고 얼굴에는 주홍칠을 하고 눈을 부릅뜨고 있는 것이 매우 위엄이 있었다. 이런 것 넷이 둘씩 둘씩 남대천 다리 머리에 갈라 서 있었다. 옛날에는 장승이란 것이 큰 길목에는 어디나 서 있었으나 함흥의 장승이 그 중 크기로 유명하여서 경주의 인경과 은진의 돌미륵과 연산의 쇠가마와 함께 사대물(四大物)이라고 꼽히던 것이었다.

함흥의 낙민루(樂民樓)는 이태조가 세운 것으로 아직도 성하게 남아 있었다.

흥원, 신포에서 명태잡이하는 것을 보고, 어떤 튼튼한 아낙네가 광주리에 꽃게 한 마리를 담아서 힘껏 이고 가는데 게의 다리 한 개가 내 팔뚝보다도 굵은 것을 보고 놀랐다.

함경도에 들어서서 가장 감복한 것은 교육 제도가 황해도나 평안도보다 발달된 것이었다. 아무리 초가집만 있는 가난한 동네에도 서재와 도청은 기와집이었다. 홍원 지경 어느 서재에는 선생이 세 사람이 있어서 학과를 고등, 중등, 초등으로 나눠서 각각 한 반씩 담당하여 가르치는 것을 보았다.

이것은 옛날 서당으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서당 대청 좌우에는 북과 종을 달고 북을 치면 글 읽기를 시작하고 종을 취면 쉬었다. 더구나 북청은 함경도 중에서도 글을 숭상하는 고을이어서 내가 그곳을 지날 때에도 살아 있는 진사가 30여 명이요, 대과에 급제한 조관이 일곱이나 있었다. 가위 문향(文鄕)이라고 나는 크게 탄복하였다.

도청이란 것은 동네에서 공용으로 쓰는 집이다. 여염집보다 크기도 하고 화려도 하다. 사람들은 밤이면 여기 모여서 동네 일을 의논도 하고 새끼 꼬기, 신 삼기도 하고, 이야기 책도 듣고, 놀기도 하고, 또 동네 안에 뉘 집에나 손님이 오면 집에서 식사만 대접하고 잠은 도청에서 자게 하니 이를테면 공동 사랑이요, 여관이요, 공회당이다. 만일 돈 없는 나그네가 오면 도청 예산 중에서 식사를 공궤(供饋)하기로 되어 있다. 모두 본받을 미풍이라고 생각하였다.

우리가 단천 마운령을 넘어서 갑산읍에 도착한 것이 을미년 7월이었다. 여기 와서 놀란 것은 기와를 인 관청을 제외하고는 집집마다 지붕에 풀이 무성하여서 마치 사람이 안 사는 빈터와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뒤에 알고 보니, 이것은 지붕을 덮은 봇껍질을 흙덩이로 눌러 놓으면 거기 풀이 무성하여서 아무리 악수가 퍼부어도 흙이 씻기지 아니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봇껍질은 희고 빤빤하고 단단하여서 기와보다도 오래 간다 하며, 사람이 죽어 봇껍질로 싸서 묻으면 만 년이 가도 해골이 흩어지는 일이 없다고 한다.

혜산진(惠山鎭)에 이르니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만주를 바라보는 곳이라 건너편 중국 사람의 집에 개의 짓는 소리가 들렸다. 압록강도 여기서는 걸어서 건널 만하였다.

혜산진에 있는 제천당(祭天堂)은 우리 나라 산맥의 조종이 되는 백두산 밑에 있어 예로부터 나라에서 재관을 보내어 하늘과 백두산 신께 제사를 드리는 곳이다. 그 주변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눈 쌓인 유월의 백두산에 운무가 감돌고
만고에 끊이지 않고 흐르는 압록강이 또 용솟음친다.
(六月雪色山白頭而雲霧
萬古流聲水鴨綠而 湧)

우리는 백두산 가는 길을 물어가면서 서대령을 넘어 삼수, 장진, 후창을 거쳐 자성의 중강을 건너서 중국 땅인 마울산(帽兒山)에 다다랐다. 지나온 길은 무비 험산 준령이요, 어떤 곳은 70,80리나 무인지경도 있어서 밥을 싸 가지고 간 적도 있었다. 산은 심히 험하나 맹수는 별로 없었고, 수풀이 깊어서 지척을 분별치 못할 데가 많았다.

나무 하나를 벤 그루 위에 7,8명이 모여 앉아서 밥을 먹을 만할 것도 드물지 않다고 한다. 내가 본 것 중에도 통나무로 곡식 넣을 통을 파느라고 장정 하나가 그 통 속에 들어가서 도끼질을 하는 것이 있었다. 장관인 것은 이 산봉우리에 섰던 나무가 쓰러져 저 산봉우리에 걸쳐 있는 것을 우리는 다리 삼아서 건너간 일이 있었다.

이 지경은 인심이 대단히 순후하고, 먹을 것도 넉넉하여서 나그네가 오면 극히 반가와하여 얼마든지 묵여 보내었다. 곡식은 대개 귀밀과 감자요, 산 개천에는 이면수라는 물고기가 많이 나는데 대단히 맛이 좋았다. 옷감으로 짐승의 가죽을 쓰는 것이 퍽이나 원시적이었다. 삼수 읍내에는 민가가 겨우 30 호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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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윤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영윤
작성일

  참빗장수로 변장하신 백범께서 청국을 향하여 길을 떠나며 들르신
함경도 지방의 당시 풍물을 기록한 내용 흥미롭게 보았습니다
백범일지를 게제하시느라 수고하심에 편히 보고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