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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일기 46---항주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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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6-01-06 00:11 조회1,504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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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4일 (토) 여행 13일차

<문영공 쓰신 비석을 찾아 옥잠산 고려 혜인사를 뒤졌으나>

이번 여정에 항주에 들린 이유는 문영공(휘 순)께서 1314년 2월, 글씨와 제액(題額)을 쓰신 <고려국첨의찬성사원공 사대장경기> 비석이 이곳 항주 옥잠산 고려 혜인사에 있었다고 하여 그 위치와 흔적이라도 확인해 보기 위해서였다. 이 비는 1314년 (충숙왕1, 연우1) 2월에 강절행성 항주로에 위치한 고려 혜인사 주지 혜복이 건립한 비문으로 민지 찬, 김순(1258-1321) 서로 만든 것이다. 이의 내용은 첨의찬성사 元瓘(1247-1316)이 일찍이 첨의중찬 안향(1243-1306)과 함께 대장경 1부를 인출하여 사명산의 천동선찰에 봉안하였으나 뜻에 차지 않아 다시 1부를 인출하여 혜인사에 봉안하게 되는 과정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 고려국첨의찬성사원공 사대장경기 : 민지 찬, 중대광 상락군 김순(金恂)이 글씨와 제액(題額)을 씀. 항주 고려혜인사 주지 혜복 세움. <옥잠산 혜인고려화엄교사지>에 수록

---일찍이 돌아가신 첨의중찬 안(安)공과 함께 정성스러운 서원을 세워 대장경 1부를 만들어 사명산(四明山 : 중국 절강성(浙江省) 영파(寧波) 남쪽에 있는 산)에 있는 천동선사(天童禪寺)에 봉안하였는데, 그러고도 아쉬움이 있어 이제 다시 비용을 계산한 후 재산을 모두 들여 대장경 1부를 찍어 대각국사(大覺國師)께서 세우신 도량에 봉안한다.


■ 원관(1247~1316)묘지명(元瓘墓誌銘) : 민지 찬, 서자 결락

---또 강절(江浙)에서 대장경 한 부가 만들어져서 항주(杭州)의 혜인사(惠因寺)에 모셔두었는데, □ 실로 만세(萬世)의 보물이었다. 이를 아울러 사들이면서 □전(田)□장(藏), □백찬(白粲, 白米) 15□를 바쳤다. 몇 년에 걸쳐 토지와 노비[田藏]의 경비를 들여 기울여 장수를 비는 비석을 세우니, 강남의 도인(道人)과 속인(俗人)이 노래를 지어 찬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 시를 이은 것이 한 축(軸)이나 되었는데 이를 보내왔다.


항주 지도를 하나 사서 샅샅이 뒤져 보니, ‘玉岑山’ ‘옥잠詩社’ ‘高麗寺 碑亭’ 등이 보였다. 너무나 반가웠다. 새벽 일찍 동행자 K와 둘이서 서호 변으로 나가 자전거를 한대씩 빌려 타고 서호변을 끼고 돌면서 옥잠산을 찾아갔다.

옥잠산 위에 있는 옥잠詩社는 관광용으로 최근에 세운 듯했다. ‘고려사 碑亭’ 자리 인근에는 2개의 호텔과 관공서(항주시 외사판공실) 건물이 건립되어 있고, ‘고려사 비정’ 자리에는 비석 대신 최근에 건립한 작은 ‘동파정(소동파)’ 정자가 서 있었다. 건립기를 대충 훓어 보니 고려 혜인사 터라고 기술하고 있었다. 고려 혜인사는 물론 비석도 이미 없어진 것이다. 아쉽고도 안타까웠다. ‘고려보살’이라는 불상과 커다란 비석이 있었던 3채의 건물이 (1960년대) 문화대혁명 때 완전히 파괴됐다. 고 하므로 항주 일대 박물관이나 도서관 등지에는 비석 탁본이나 금석문 자료집이 남아 있을 수 있으나 확인할 수 없었다.


■ 문화일보 (2005/01/11)

中 항저우市 ‘의천 머물던 고려寺’ 복원사업

고려사의 원래 이름은 927년 오월왕(吳越王) 전씨(錢氏)가 선원으로 건립한 혜인원(慧因院)이었다. 고려 문종(文宗)의 4째 아들로 태어난 의천은 31세 때인 선종 2년(1085) 송나라에 들어가 13개월여 체류하는동안 이곳에서 고승 정원(淨源)법사를 만나 화엄학을 토론했다. 의천귀국후 재정적인 후원을 한 것을 계기로 이름이 혜인고려화엄교사(慧因高麗華嚴敎寺)로 바뀌었으며 줄여서 고려사로 더 많이 불려지게 됐다.

또 의천과의 인연을 계기로 그의 모후 인예태후(仁睿太后)와 형인 선종(宣宗)도 금물로 쓴 화엄경을 보내주었으며 숙종(肅宗)은 이를 보관할 경각(經閣)을 지을 경비도 시주했다. 1628년 간행된 ‘옥잠산(玉岑山) 혜인고려화엄교사지(志)’에 따르면 1312년 충선왕(忠宣王)도 고려 관리를 파견해 대장경 한 질과 사찰 보수비용을 보냈다는 기록이 나오는 등 이 곳과 고려의 관계는 고려후기까지 계속됐으며 고려사라는 이름도 1757년 법운사(法雲寺)로 바뀔때까지 이어졌다.

지난 1995년 문화일보에서 ‘의천(義天) 구법(求法) 2만리’로 연재된 기획시리즈를 위해 최병헌 서울대 교수 등 학술조사단이 중국 항저우 고려사터를 찾았을 때 법당 자리에는 허름한 공장이 들어서 있는 등 고려사의 흔적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상태였다. 당시 현지 주민은 ‘고려보살’이라는 불상과 커다란 비석이 있었던 3채의 건물이 (1960년대) 문화대혁명 때 완전히 파괴됐다고 증언했다. 또 당시 최병헌 교수는 옛날 고려사 전성기에 즐비했던 건물들인 대웅전과 천왕전, 천불각, 화엄경각, 칠조당, 종루, 고려왕사(高麗王祀) 등의 모습을 어디에서도 찾을 길이 없다공장으로 전용된 법당자리와 그 앞의 농지에 대한 정밀한 발굴조사가 필요하다는 견해를 밝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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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은사, 서호 유람>

유스호스텔로 돌아와 가족을 데리고 서호와 함께 항주의 명소인 영은사 라는 절에 갔다. 어디에나 있음직한 절인데 석굴 불상이 매우 많이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돌아나와 서호에 이르니 유람선 운행시간이 마감되고 있었다. 서둘러 나룻배를 하나 전세내어 서호를 횡단하기로 했다. 이미 어둠이 내리고 빗방울이 한두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 물안개에 휩싸이는 서호가 한폭의 수묵화처럼 번저 왔다. 약간 두렵고 으스스했지만 운치만은 대단했다. 중간에 섬 3개를 지나고 맞은편에 도착했다.

<크리스마스 이브>

항주시내 번화가에는 인파가 넘쳐났다. 오늘이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식당마다 자리다툼이 치열했다. 한시간 넘게 헤매다가 허름한 간식집에 줄서서 겨우 들어가 저녁을 해결하고 항주역에 가서 광주 가는 기차표를 예약하고 유스호스텔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택시 기사가 농간을 부리려고 하는 꼴에 화가 치밀어서 옥신각신하게 되었는데 내가 야단치듯 길 안내를 하면서 겨우겨우 돌아왔다. 저녁내내 짜증스러웠다.



12월 25일 (일) 여행 14일차

<남방 해안의 중심도시 광주로!>

이번 여행의 전체일정을 조정하기로 했다. 원림의 도시 소주 가는 계획을 뒤로 미루고, 아침9시 남방 해안의 중심도시 광동성의 성도인 광주행 기차에 올랐다. 광주까지 27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여행일정 챙길 일 없고, 먹을 것, 잠잘 곳 고민할 것 없이 침대칸에 올라가 낮잠자다가, 일어나 창밖을 구경하거나 책 좀 보다가, 때 되면 밥 먹다가, 또 낮잠자다가 내내 부담없는 평화로운 시간을 누리는 동안, 열차는 불평없이 묵묵히 악양으로 장사로 형양으로 광주로 내려갔다.

댓글목록

김상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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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대부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올려주는 글 잘읽고 있어요.저도 작년 5월에 연흥에서 버스/기차를 이용하여 개봉,서주,낙양,서안등을 다녀왔습니다. 올해는 장가계를 다녀올 예정입니다. 건강하시고 좋은 유학생활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