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신화-神들의 故鄕 -金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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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작성일06-02-16 18:46 조회2,388회 댓글2건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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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민일보 高大卿기자】
제주도神話 순례
神들의 故鄕 >30<

급한 김에 “염라왕 잡아오겠다”대답
강림차사(3)
- 저승 찾아나선 강림이 앞에 웬 할망이…
공부도 잘하고 고운 아들들이라 비단 옷 입히고 좋은 서당 보내는 사이에 범무왕아들 세 형제에게 뺏아 차지했던 은기·놋기·비단은 물론 논·밭까지 다 팔아먹었다.
열 다섯 나는 해에 세 형제는 과거를 치르러 서울로 올라갔다.
재산은 다 없어지고 집밖에 안 남은 과양생이 부처는 집을 팔아 아들들의 노자를 마련해 줬다.
남의 밭을 빌어 콩을 갈던 과양생이는 어느 날 비비둥당 우둥당 북치고 피리를 부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어보니 청가마·백가마·흑가마 가마 세 개가 동네 어귀로 들어오고 있었다.
삼천선비가 다 떨어졌지만 세 형제는 문과급제·장원급제·팔도 도(都, 전체)장원을 하여 고향으로 내려오는 길이었다.
아들들이 다 급제를 하여 내려오는 통에 기세가 등등해진 과양생이는 관헌으로 가서 호통을 쳤다.
『염치없는 김치(金致, 또는 金緻)원아, 감사가 세 명이나 오는데 마중을 안 나오고 무엇 하느냐』
과양생이의 악살에 견디다 못한 김치원님이 과양생이집으로 나왔다.
잔치상을 차려놓고 큰 아들이 부모에게 절을 하는데 세 번째 엎드리고는 일어서질 않았다.
그대로 죽어버린 것이다.
둘째 아들이 다시 절을 하는데 다시 죽고 말았다.
이번에는 문전신에게 한 아들만이라도 살려달라고 제를 지낸다음 막내 아들이 절을 하는데 이번에도 엎드린 채 죽고 말았다.
김치원이 시체를 뒤집어 일으켜 보니 눈에는 흙이 가득 들고 배는 붕붕 불어오르고 살이 문드러진 것이 이제야 죽은 사람이 아니라 죽은지 오래된 송장이었다.
한꺼번에 아들 셋을 잃은 과양생이는 원님에게만 화풀이를 했다.
아침에 한 번, 점심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하루에 세 번씩 소장(訴狀)을 올려 석달 열흘을 계속하니 과양생이의 소장만 아홉 상자 반이 찼다.
김치원이 똑똑했지만 이유도 단서도 없이 죽었으니 처리를 하려고 해도 처리할 수가 없었다.
과양생이는 날마다 성문 위를 오가며 욕을 해댔다.
『아들 삼형제가 하루 아침에 죽었는데 까닭도 모르는 원님이 있느냐. 개같은 김치원아, 봉고파직하고 이 마을을 떠나거라』
『저런 못된 년에게 욕설을 들으며 원은 살아 무엇하리』
김치원은 마을을 떠나려고 회의를 소집했다.
형방이 말했다.
『힘 좋고 담대하여 성안에도 아홉, 성밖에도 아홉, 각시가 열 여덟이나 되는 강림나장이 있는데 강림이를 시켜 염라대왕을 잡아오도록 해서 연유를 물어보는 게 어떻습니까』
『그것도 좋다』
김치원은 다음날 아침 동틀 녘에 관헌을 모두 모이라고 명령을 하고 점호를 했는데 강림이만 빠졌다.
남문밖 열 여덟 번째 마누라의 집에서 날이 밝는 줄 모르고 놀던 강림이는 『강림이 궐(闕)이요』 소리가 세번 울릴 때에야 눈을 떴다.
강림이 포승을 채우고 관헌 마당에 작두를 대령하게 한 김치원이 말했다.
『네가 지금 죽겠느냐 저승에 가서 염라왕을 잡아오겠느냐』
『염라왕을 잡아오겠습니다』
김치원은 백지에 검은 글을 써서 강림에게 주고 염라왕을 잡아오라고 시켰다.
급한 김에 염라왕을 잡아오겠다고 대답해 놓은 강림이는 기가 막혔다.
형방·이방에게 하소연을 해도, 기생누님들에게 물어도, 주모에게 물어도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열 여덟 마누라집을 돌아다녀 봤지만 이미 소식을 들은 작은 각시들은 본 척도 않았다.
할 수 없이 장가 오던 날 보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큰 마누라집에 찾아갔다.
큰 부인은 복숭아나무로 만든 방아를 찧고 있었다.
『이여 방애. 이여 방애. 저 먼 올래에 문이 닫혔느냐. 가시나무가 우거졌느냐. 정낭이 걸어졌느냐. 매정한 낭군은 왜 아니 오느냐』
『나 왔소』
『어쩐 일로 옵디가』
『저승에 염라왕 잡으러 가는 길에 인사나 해 두려고 왔소』
『적배지나 받읍디가』
『흰종이에 까만 글씨로 받아왔소』
『저승에서는 붉은 천에 하얀 글씨로 써야 하는 법입니다』
큰 부인은 붉은 명주 석자를 내주고 새로 글을 받아오라고 시켰다.
이런 연유로 사람이 죽어 명정을 쓸 때는 붉은 천에 하얀 글씨로 글을 쓰는 법이 생겼다.
차사의복과 의장을 다 차려 놓은 강림의 부인은 백미 세 말을 빚어서 시루떡을 만들었다.
첫째 징(금)위로는 일문전(門前神)에게 올리고 둘째 징은 조왕할망(부엌신)에게 올리고 세째 징은 강림의 몫으로 남겨놓은 부인은 이레동안 잠을 안 자고 기도를 했다.
정성을 갸륵하게 여긴 조왕할망이 일곱째 날 선 잠이 든 강림의 부인에게 현몽하여 어서 저승으로 보내라고 말했다.
차사의 의복과 행장을 한 강림이 대문밖으로 나섰으나 저승 가는 길을 알 수가 없었다.
넓은 들을 헤매노라니 앞에 웬 노파가 고부랑 지팡이를 짚고 걷는 게 보였다.
『여자란 게 꿈에만 실려도 재수가 없는 법인데 웬 할망이 걸리적거리는고』
빨리 따라 잡아서 옆으로 비켜 서라고 하려고 걸음을 서둘렀으나 영 앞지를 수가 없었다.
『보통 할머니가 아니로구나』
할머니가 동산위에서 쉬는 사이에 앞으로 간 강림이 넙죽 엎드려 절을 했다.
『어찌 젊은 사람이 망령든 노파에게 절을 하는고』
『우리집에도 늙은 부모님이 있습니다』
『고마운 젊은이로고. 점심이나 같이 하고 가자』
점심밥으로 떡을 꺼내놓았는데 똑같은 시루떡이었다.
『할머니 점심과 내 점심이 어떻게 이렇게 똑같습니까』
『이 놈아, 나를 모르겠느냐. 네 큰 마누라집의 조왕할망이다. 정성이 하도 기특하여 길을 가리켜 주려고 왔노라』
할머니는 소리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림=김재경(서양화가) 미니해설
- 「김치 원님」은 실존 판관 이름과 일치
과양생이는 자신이 낳은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범무왕 아들 삼형제에게서 뺏은 재물을 다 잃는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논밭과 집, 자신이 모은 재산마저 다 잃게 된다.
그 뿐이랴.
애써 키운 아이들은 꿈에도 그리던 과거에 급제하여 오는 날 한 날 한 시에 다 죽는다.
애써 키운 아이들이 한꺼번에 죽었을 때 부모의 원통함이란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
신화는 남의 아들들을 죽인 업이 자신의 아들들도 잃는 형태로 돌아오도록 하고 있다.
억울하게 죽은 범무왕의 아들 삼형제는 과양생이의 아들로 태어나 죽음으로써 복수를 한 셈이다.
세 형제는 모두 15세를 넘기지 못하고 죽는다.
스님이 예고했듯이 세 형제의 삶과 죽음은 열 두번에 이르는 윤회의 과정에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신화에 등장하는 「김치원님」은 조선(朝鮮)시대 제주에 실제로 파견됐던 판관의 이름과 일치하여 흥미롭다.
1609년 광해군(光海君)1년 제주목에 판관으로 파견돼 다음 해 이임한 김치(金緻)는 선정관으로 유명했는데 이임한 후 선정비가 세워지기도 했다.
그가 있을 때 군적에 허실이 많아 동서방리제를 실시함으로써 바로잡았고 제주(濟州)가 12면으로 나뉘어 행정구역이 정비되기도 했다.
「과양생이」라는 여인의 명칭이 그렇듯이 고을 원님의 이름이 역사의 인물과 일치하는 것은 이 신화가 어떤 식으로든 제주(濟州)의 역사와 관련이 있는게 아닌가 하는 추측을 낳고 있다.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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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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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재미있는 제주의 김치관련 전설 잘 읽었습니다.
솔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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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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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