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시문에 능한 경상도 관찰사 김치(金緻)

페이지 정보

김은회 작성일06-03-25 12:23 조회1,682회 댓글2건

본문

view_04_st01.gif
view_04_m_01.gif   view_04_m_02.gif
view_04_pic01.gif김치(1577~1625) :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사정(士精) 호는 남봉(南峯) 심곡(深谷) 문과에 급제하고 광해군 때대사간 병조참의를 지내다가 파직됐다 인조반정 후에 대북(大北)으로 몰려 귀양을 갔다가 동래부사를 거쳐 경상도관찰사를 재냈다. 그의 묘소는 증평읍 율리에 있다.

view_04_stt03.gif


광해군 때의 간신 이이첨(李爾瞻)과 임금의 친척인 유희

분(柳希奮) 정권을 잡고 정사를 어지럽히니 앞날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심곡 김치는

처음에 물드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북인(北人)에 가담했

다가 나중에 폐모(廢母)하는 일이 생기자 화가 자기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병을 핑계로 물러나서

양산(揚山)에서 살았다 그는 평소에 운명학을 익힌지라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점쳐보니 물 수(水)변의

성씨를 가진 사람을 만나야만 비로소 화를 면할 수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때 승평(昇平) 김류(金)가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반정(反正)을 도모했는데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김치가 운명학을 잘 아니 우리들의 운명을 그에게 물어보는 것이 좋겠다?”하고 곧 심기원(沈器遠)으

로 하여금 가서 물어 보게 했다. 그래서 심기원이 김치를 찾아가니 김치가 여러 사람들의 사주를 상 위

에 펴놓고 하나 하나 차례로 보더니 갑자기 놀라며, “모두 장래에 재상이 될 운수이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오 그대도 또한 머지 않아 재상이 되겠소이다.”

심기원이 곹 능양군(稜陽君-인조)의 사주를 내보이며 말하기를 “이는 궁박한 선비의 운수인데 그대에

게 물어봐 달라고 원했습니다.”하니 김치가 오랫동안 자세히 보다가 급히 일어나 의관을 바로 잡고 향

을 피우고는 꿇어 앉아서 그 사주를 다시 봤다 심기원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그 사람의 사주를 보면서 존경을 표하는 것이 그토록 지극합니까?”하자 김치가 말하기를 “이 분은 임금이 될 사주인데 어찌 감히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오?”라고 대답했다.

 

심기원이 거짓 놀라는 체하며 말하기를 “멸족을 당할지도 모르는데 어찌 그런 위험한 말씀을 쉽게 하십

니까?”하자 김치는 비로소 자기의 운명이 몰 수(水)변이 있는 성씨를 가진 사람을 만나야 비로소 화를

면할 수있다는 것을 깨닫고 곧 일어나 절을 하고 말하기를 “지금 여러 분의 사주를 보니 분명히 반정을

도모하지 않는다면 이렇게 여러 사람이 한 번에 부귀영화를 누릴 수 없습니다. 지금 흉악한 간신들이

모여 폐모시키는 일까지 저지르고 윤리와 기강이 꿇어졌습니다 진실로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이 어지러움을 다스리고 반정을 할 마음을 갖지 않겠습니까? 나는 서투르기는 하나 택일할 줄도 아는데

그대들은 거사를 언제로 잡았오?”하니

심기원은 더 속일 수 없음을 알고 곧 말하기를 “지금 아무개와 아무개 등 여러 사람이 바야흐로 능양군

을 추대해 3월 아무 날을 거사하는 날로 잡고 있습니다”하니 김치가 오랫동안 생각하다가 말하기를 “그

날은 좋은 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지금 이 거사는 매면 안됩니다 내 생각으로는 3월 17일보다 더 좋은

날이 없습니다 이 날은 비록 밀고가 있어도 크게 우려할 일이 못됩니다.”라 했다.

 

심기원은 돌아와서 이 말을 여러 사람에게 전하고 곧 그ㅡ날을 거사하는 날로 정했다 거사가 성공해 능

양군이 인조로 왕위에 오르자 김치는 화를 면하고 안동부사에 임명됐다.

<금계필담(金溪筆談)>(『괴산군 설화집』 괴산문화원 1999)

 
view_04_pic02.gifview_04_stt04.gif
우리 아버지의 호는 남봉(南峯)이시다 젊어서부터 문자을 숭상하여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는데 그 실력을 알아주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여기 몇 수를 소개하면 ‘순검사(巡儉使)로 세 번 해방(海防)에 가는 것을 보고

봄이 되자 임금이 남쪽 도적을 염려하여

갑자기 경월(卿月)이 먼 바다를 비쳤구나
나라에 몸을 바쳐 세 번이나 순검이 되어
천리 밖 국방을 살피려고 다락에 올랐네.
들판을 덮은 깃발 군사 훈련이 분명하고
배에는 가득한 군악이 군의 사기 높이네
이번에 가는 길은 남아의 뜻을 펼만하니
멀리 간다고 어찌 조금이나마 근심하랴

라 하였고 또 병자호란 후에 두 번째로 중국 신안(新安)을 지나 가다가 지은 시에

오랑캐 군대가 달리던 요동에 들어와 보니
그 번화하던 거리가 너무나 쓸쓸해졌구나
가련하구나 기생 집 문 앞ㅇ의 버드나무만이
옛날처럼 봄바람에 흔들거리며 아양떠네

라 항였는데 택당(澤堂) 이식(李植)이 평하기를 ‘구슬프면서도 아름답게 지었다’고 하였다 <종남총지(終南叢志)(『괴산군설화집』괴산문화원 1999)

 
view_04_stt02.gif
우리 아버지가 을사년(1605) 꿈에 근체시(近體詩)한 수를 지었는데 깨어나지 오직 하늘이 옛 성을 덮어 지는 해를 머금었는데 나오리는 외로운 따오기와 바람으로 나르네 만 생각이 났다. 그 뒤 제주(濟州)로 귀양을 가 곡성(曲城)을 보니 바로 옛날 꿈에 본 풍경과 같았다니 타고난 운명이 아니겠는가? 드디어 꿈에서 지은 시를 넣어

타향살이에서 우연히 만나 술 한 잔 나누고
술 기운에 여윈 얼굴이 붉어지니 기뻐지누나
하늘이 옛 성을 덮어 지는 해를 머금었는데
나오리는 외로운 따오기와 바람으로 나르네
신선이 보이지 않으니 나는 어디로 갈거나
고향이 멀고 머니 안부편지 한 장 오지 않고
지난 일 생각하니 모두가 타고난 운수이고
그 동안 귀양살이가 어찌 액운이라 하리오
라 짓고 한 연(聯)을 더 부치기를

온갖 일에 시달린 몸 머리털만 하얗게 희고
십년에 세 번 쫓겨난 신세 마음은 굳건하네

하였는데 택당 이식이 보고 대단히 칭찬하였다

 

 

 

 

 

 

댓글목록

김태서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태서
작성일

  오랫만에 인사드립니다..
향수에 젖어 봅니다
봄이면 뒷동산 진달래
앞뜰에 복사꽃 피는 고향
그리워 지는 봄날 고향이 더욱 그리워 집니다.
할아버지께서도 이런봄을 그리워 하셨겠지요.

김윤식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윤식
작성일

  강화 대부님, 별고 없으신지요?
업무상 행사에 참석지 못해 뵙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