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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 소설-이 생에서는 늘 이별이었네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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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6-05-06 10:24 조회1,58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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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5회>

 

 

 

 

          2. 서마(書魔)

 

  앞에 본방교(本房橋)가 보였다. 속이 메슥거렸다. 허봉은 걸음을 재촉했다. 다리만 건너면 곧 집이었다. 그런데 그 친구, 손곡(蓀谷) 못잖은 시재였어. 봉이 다리 위에 올라섰을 때, 갑자기 구역이 치밀어 올랐다. 그는 급히 다리 난간을 잡고 아래쪽을 향해 ‘윽’ 하고 구역을 했다. 그러나 헛구역, 몇 번을 해도. 그는 한동안 헉헉거리며 그렇게 서 있다가, 속이 좀 가라앉자 돌아서 난간에 등을 기댔다. 불어오는 가을바람이 싸늘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동네입구이어서 남의 눈에 신경이 쓰였다. 다행히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어제 아버지 심부름 차 *사암(思菴)댁에 들렀다가 사암댁에 안부 차 들른 손곡을 만났다. 손곡에게는 일행이 있었다. 같은 또래 젊은이, 임제(林悌)라고 했다. 역시 시를 쓰는 친구였다. 시에 관해 몇 마디 나누자 바로 의기투합해 서로 자(字)로 부르기로 했다. 셋은 다동 기생집으로 자리를 옮겨 서로의 시를 읽어주고, 들으며, 밤새워 술을 마셨다. 다음날 일어나니 이미 한낮이었다. 그는 등을 난간에서 뗐다. 동네 쪽에서 선비차림의 두 사내가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급히 의관을 정제하고 걸음을 옮기는데 걸어오던 사람 가운데 하나가 말을 건넸다.
  『 아니 이거, 허공 아니시오? 』
 가까운 벗인 *자앙(子盎)의 형이자 *이견(而見)의 벗인 하당(荷堂) 김첨(金瞻)이었다. 옆에 있는 동행한 선비도 아는 인물이었다. *성암(省庵) 김효원(金孝元). 역시 이견의 벗으로 아버지를 뵈러 집에도 더러 오는 이였다. 그는 두 사람이 동행한 것을 보자 문득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그들도 이견처럼 퇴계 문하였고, 셋은 동갑이었다. 그는 두 사람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그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성질 급한 하당이 물었다.
  『 미숙(美叔. 허봉의 자), 마침 잘 만났소. 이견이 아주 낙향했다는 게 사실이오? 』
  『 네, 이틀 전 낙향한다며, 저희 집에 인사차 왔었습니다. 』
  『 우리가 말릴 새도 없이 떠나 버렸군. 』성암이 탄식처럼 말했다.
 엿새 전 이견은 퇴계선생 상배에 갔다가 돌아왔다며, 열달만에 초췌한 얼굴로 아버지에게 문안을 왔었다. 귀경이 늦어진 것은, 퇴계선생 상배중에 또 종조부상을 당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거진 탈진한 듯 보였다.
 다음날 저녁 그는 마실 겸으로 이견댁에 들렀다. 그 날 저녁 바로 가지 않은 것은 이견이 너무 피곤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집에 들어서자 분위기가 다소 어수선했다. 밤이었는데도 부산스럽게 하인들이 짐을 꾸리고 있었다.
 이견은 사랑에 홀로 있었다. 그는 종이 위에 글씨를 쓰던 붓을 멈추고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 허봉이 들어서자 이견은 붓을 놓았다. 술상이 들어오는 동안 허봉은 이견이 쓰다만 글을 읽었다. 그 글은 소동파의 시였는데, 이상하게 그 시 가운데서 두 구절이 마음에 걸렸다. 田園不待老勇決凡幾箇(늙기 전에 전원으로 돌아갈 용기 있는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자 무릇 몇이나 될까). 그 우려는 몇 순배 술잔이 돌자 정체를 드러냈다.

 

 

註)

*사암(思菴1523∼1589) 조선 중기 문신 박순(朴淳)의 호, 자는 화숙(和叔), 동서분당 때 서인의 영수로 옹립되었다. 허엽과는 화담 서경덕 문하에서 같이 배웠다. 영의정 역임.
*자앙(子盎1547~1615) 조선 중기의 문신. 김수(金睟)를 말함. 자앙은 그의 자. 김첨의 아우. 병판, 형판역임. 임란시 행적에 논란이 있다.
*이견(而見1542∼1607) 조선 중기 문신. 유성룡(柳成龍)의 자, 본관은 풍산(豊山). 이황(李滉)의 문인. 영의정 역임.
*성암(省庵1532∼1590). 김효원(金孝元)의 호. 동서분당의 주역이 되는 역사적 죄가가 있으나 분당 이후 반성적 태도를 보임. 개인적 인격은 개결 했던 것으로 평가받았다. 김효원의 생년에는 1532년 설과 1542년 설이 있다. 그의 활동 전, 후를 미루어 볼 때 1542년생이 타당한 것으로 판단. 본 작품에서는 1542년 설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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