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 上古史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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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6-05-06 15:13 조회1,503회 댓글0건본문
9) 김민성
김방경의 조부 김민성은 문과급제후 장야서승 겸 (한림)직사관을 역임하였고, 후에 김방경으로 인하여 은청광록대부 상서우복야에 추증되었다는 기록 이외에는 자세한 행적은 알수없다. <1300 김방경 묘지명>, <1300년대 광산김씨 김련-김진 호구단자>
당시의 고려는 최충헌의 무신정권기였다. 1170년 정중부,이의방이 집권하면서 시작된 무신정권은 1179년 경대승에게, 1183년에는 이의민으로 이어지지더니, 1196년에는 최충헌이 아우 충수(忠粹), 생질 박진재(朴晋材) 등과 함께 미타산(彌陀山) 별장에서 이의민(李義旼)을 제거하는 한편, 그 일당과 그 여당으로 지목되는 문무관(文武官)을 대량 학살 또는 귀양보내고 정권을 장악하여 이후 4대 60년간 이어지는 최씨무신정권을 수립하였다.
김민성은 영가군 향리 집안에서 무신정권기에 문과급제후 중앙정계에 진출하였으나 하위직인 장야서승 겸 한림직사관을 역임하는데 그쳤다. 당시 문과급제후 바로 직사관을 역임하던 사례로 보건대, 짧은 기간 벼슬길에 있었던 듯하다. 아마도 한미한 가문의 향리 출신이었던 점과 당시 부정부패한 관직 임용의 벽을 넘지 못한 듯하다. 그리하여 중앙정계에서의 청운의 뜻을 접고 고향인 영가군으로 낙향하여 자손 훈육에 전심하면서 가문을 일으키려 한 것으로 보인다.
5남 1녀중 장남 김효공(김창)은 ---어머니의 뱃속에서 시(詩)ㆍ서(書)ㆍ예(禮)의 아언(雅言)을 들었으며, 머리털을 맺은 뒤로부터 기국과 학식과 덕행의 대체(大體)를 가졌다. --- 는 기록으로 보건대, 어려서부터 부모의 가르침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최충헌 집권기인 고려 희종(熙宗) 2년(丙寅 1206년) 6월 庾亮才榜(문하시랑 任濡 지공거, 우승선 崔坦 동지공거)의 을과 3인 중 3등으로 급제하였고, 후에 문하시랑 평장사 판이부사 문강공에 이르렀다. 둘째아들 김효인은 ---성품이 엄격하고 굳센 사람으로서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고 글씨를 잘 썼으며, --- 라는 고려사 기록으로 보건대, 역시 어려서부터 부모의 가르침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고려 희종(熙宗) 4년(戊辰 1208년) 윤4월 皇甫瓘榜(참지정사 李桂長 지공거, 우부승선 琴儀 동지공거)에 급제하였고, 후에 병부상서 한림학사에 이르렀다. 김민성은 아들 둘을 어려서부터 가르쳐 문과급제시키고 얼마 안 지나 1212년 손자 김방경이 태어나자 집에서 직접 가르치며 양육하였다.
1580년 <경진보>에 김민성의 묘가 ‘安東府西一息花林村’ 에 있다고 하였으나 현재 실전하였고 화림촌 위치도 확인할 수 없다. 다만 김방경이 조부 김민성의 묘 인근에 묻혔다고 하는데, 김방경의 묘가 현재 안동 녹전면 죽송리에 있고, 김방경보다 먼저 죽은 배위 죽주박씨의 묘가 1580년 <경진보>에 의하면 지례(녹전면 죽송리)에 있었다고 했던 것으로 보아 화림촌은 죽송리 인근이었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이는 김방경 선대의 거주지와 관련된 매우 중요한 문제로 지속적인 고증 작업이 있어야 한다.
증평 남하리 서당골에 있는 김명룡(金命龍, 1618년 생원급제) 묘비(*3,40년전 세운 듯)에 ‘복야 민성 配述禮夫人崔氏 墓俱在安東士林村而失傳’ 라 새겨 있는데, 고증할 수 없으나 김명룡 가계에 전해오는 가승에 의해 적은 듯하다. 특이한 것은 배위가 ‘配述禮夫人崔氏’ 라는 것으로 다른 데서 찾을 수 없는 唯一 기록이다. ***최씨는 최충헌가의 우봉최씨이거나 최종준가의 동주최씨가 아닌가 한다. 이에 대해서는 후술할 것이다.
- 김민성은 장야서승 겸직사관이 된 인물로 김방경 가계는 이때부터 중앙 관료를 배출하기 시작하였다. 향리는 중앙에 새 바람을 일으키는 세력이었고 무신정권기에 특히 향리의 진출이 두드러졌다. 당시는 무신정변으로 부정이 심해져 연줄이 없으면 승진이 쉽지 않은 시기였다. 김민성이 하급 관료로 끝난 것은 중앙 정계의 벽이 두터웠음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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