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허난설헌 소설-이 생에서는 늘 이별이었네 19

페이지 정보

김항용 작성일06-05-16 16:26 조회1,476회 댓글0건

본문

<제19회>

 

 

 

 『 이만 하세, 오늘은. 큰 오라버니는 그렇게 말하고,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 그리고 초희야, 오늘 사략은 작은 오라버니에게 배워라. 내가 *공호(公浩)오빠네 집에 오라비 친구들과 모임이 있단다. 』
 『 네, 그러세요. 』
 큰 오라버니가 나갔다. 초희는 속으로 악부시집도 갖고 오기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악부시집을 펼쳤다.
 『 그럼, 작은 오라버니, 사략 대신 시를 일러 주세요 』
 『 그럴까? 』
 『 네, 그런데, 조금 전에 읊던 시는 오라버니에게 배운 육조시대시나 악부체시와는 다른 것 같아요. 왜 그렇죠? 』
 허봉은 다소 놀란 듯 초희를 건너다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 왜 그렇게 느꼈니? 』
 『 글자수도 정해져있고, 운도 끝에 일정하게 정해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
 허봉은 다시 한번 놀란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 그래, 잘 보았다. 조금 전 그 시는 칠언율시라고 한다. 시는 고체시와 근체시로 나누어 지는데, 고체시는 한 대 이전의 시로서 글 자수와 운에서 자유롭다. 그러나 당대에 와서 시는 크게 변한다. 글 자수도 정해지고, 압운(押韻)하는 자리도 엄격해져서 조금 전 네가 들은 시처럼 법칙에 맞춘 시들이 주류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자면… 』
 허봉은 말을 멈추고 자기 앞 서안 위에 덮어놓았던 소식시집을 펼쳐서는 초희 앞으로 밀어주며 말했다.
 『 조금 전에 오라비들이 화창하던 소식의 시다. 읽어보아라. 』

 黃昏猶作雨纖纖
 해저물자 이슬비 부슬부슬 내리고
 夜靜無風勢轉嚴
 밤 깊자 바람은 멎었으나 추위는 더 심해졌네
 但覺衾裯如潑水
 이부자리는 물을 뿌린 듯 차가워 잠 못 이루는데
 不知庭院已堆鹽
 어느새 뜰에는 소금 같은 눈이 쌓이네
 五更曉色來書幌
 오경새벽빛 서재의 휘장에 스며드니
 半月寒聲落畵簷
 조각달 시린 소리 처마 끝에 지네
 試掃北臺看馬耳
 북대를 쓸고 와 마이산을 보는 건가
 未隨埋沒有雙尖
 아직 묻히질 않은 두 봉우리 뾰족이 치솟아 있는 것을.

 초희가 마악 시 암송을 끝내자 밖에 갑자기 ‘어험’ 하는 아버지의 기침 소리가 났다. 마치 초희의 시 낭송이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오누이는 당황했다. 특히 초희는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소순이 잘못 본 것 같았다. 아버지는 손님과 함께 출타한 것이 아니라 손님을 본방교까지 배웅하러 나간 모양이었다. 그러나 작은 오라버니는 이미 각오하고 있었다는 듯 이내 평시처럼 안색을 가다듬고 일어나 문을 열었다. 문득 방안에 눈 묻은 찬바람이 밀려왔다.

註)
*공호(公浩 1848~1591) 조선중기 문신. 이양중(李養中)의 자, 허성과 허봉의 벗.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