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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 소설-이 생에서는 늘 이별이었네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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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6-05-17 17:21 조회1,53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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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회>

 

 

 

  『 아버님 오셨습니까? 』
 허엽은 당목두루마기 자락을 접고 앞 퇴로 올라서며,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 초희 너, 오라비들 방에 드나들지 말라고 이르지 않았더냐? 』
 허엽(許曄)은 아들 허봉이 비운 병풍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초희는 허엽과 멀찍이 떨어져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앉았다. 숙인 눈에서 서러운 눈물 한 방울이 소리 없이 떨어졌다.
  『 아버님, 제가 초희를 오라고 그랬습니다. 』
 허봉이 허엽 앞에 얌전히 무릎을 꿇고, 그러나 아버지 허엽을 똑 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 네 놈은 애비 말이 말 같지 않느냐? 』
  『 아버님 명을 어긴 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나 초희에게 글읽기를 허락해주십시오. 초희는 재능이 있습니다.』
  『 재주가 있다한들 계집아이가 글을 읽어서 무엇을 한단 말이냐? 』
  『 아버님, 조선에도 *반소(班昭)나 *이청조(李淸照)같은 여류문장가 하나쯤은 있는 것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봉래선생께서 말씀하셨듯이 이미 글에 중독이 된 초희에게… 』
 허엽은 봉래라는 말에 멈칫하는 기색이 되었다. 허엽은 봉래의 역(易)을 신뢰하고 있었던 것이다. 초희는 허엽의 노기가 어느 정도 가라앉은 듯한 느낌에 일말의 희망을 가졌다. 허엽의 말이 이어졌다.
  『 그래서 네 공부는 접어두고, 어린 여아에게 시나 가리키고 있느냐? 』
  『 제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
 허엽이 서가에 얹힌 책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 과거와는 별 무관한 소식이니, *왕안석(王安石)이니, 또 *설선(薛瑄)이니 하는 자들의 책을 읽는 것이 공부를 하는 것이냐? 』
  『 아버님. 공부는 합니다, 그러나 과거는 보지 않겠습니다. 』
 허엽이 앞에 놓인 서안을 소리나게 치면서 말했다.
  『 뭐라고? 과거를 보지 않겠다고! 』
 초희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 작은 오라버니가 과거를 보지 않겠다는 말에. 그러나 허봉은 허엽의 호통소리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고, 단호하게 자기 뜻을 다시 한번 말했다.
  『 네. 은일(隱逸)처사로서 학문만 하고 싶습니다. 』
 허엽은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던 모양으로 "끙"하고 화를 삼키며, 아들을 찬찬히 뜯어보고 있었다.
  『 이견이 때문이로구나, 그러나 이견이는 등과 한 후에 전원으로 물러난 것이다. 너처럼 세상에 나가기도 전엡 』
 허봉이 허엽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말을 받았다.
  『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신 왕은 즉위한지가 몇 년이나 되었는데도 아직까지 구 척신들을 정리하지 못하고, 그들에게 휘둘리고 있습니다. 제가 환로에 나가면 반드시 그들과 충돌할 테고… 제 직정적인 성격으로 미루어 그 결과는 가측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럴 바에는 전원에 있으면서 때를 기다리는 게 났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
  『 성리학은 현실참여 학문이다. 그럴수록 현실에 참여하여 세상을 바로 잡는 것이다. 』
  『 성리학자 가운데는 *안락(安樂)선생이나 *남명((南冥)선생 같은 분도 있습니다. 』
  『 시끄럽다. 네 놈이 매일 시나 읊조리고, 술이나 마시고 다니더니 과거에 자신이 없어진 게로구나! 』
  『 아버님, 입격은 문제가 아닙니다. 제 뜻은… 』
  『 그럼 여러 말 할 것 없다. 내년에는 반드시 등과를 해야 한다!  』
 그렇게 못을 박듯 이야기하고, 허엽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문을 열고 나가다 돌아서며 덧붙였다.
  『 은일 하는 것은 등과 한 후에 뜻이 맞지 않으면 물러나도 늦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네 놈은 등과 하기도 전엡 그리고, 초희 문제는 네가 입격하고 나면 다시 생각해보겠다. 』


註)
*반소(班昭 ? ∼ ? ) 중국 후한(後漢)의 여류학자. 오빠인 반고(班固)가 《한서(漢書)》를 완성치 못하고 타계하자 그 작업을 물려받아 완성함.
*이청조(李淸照 1081?~1151?) 중국 송나라를 대표하는 여류시인
*왕안석(王安石 1021∼1086) 중국 북송(北宋)의 정치가. 시인. 자는 개보(介甫), 호는 반산(半山).  당송 팔대가 가운데 일인인 소식과는 정적 간이었다,   
*설선(薛瑄 1389~1464) 명나라초기 유학자. 자는 덕온(悳溫), 호는 경헌(敬軒),  문청(文淸)은 시호. 조선중기에 그의 저술 "설문청공독서록"이 식자층에 많이 읽혔다.
*안락(安樂1011~1077) : 북송 성리학자 소옹(邵雍)을 말함. 안락은 소옹의 호.  세상에 나가지 않고 평생 은거하며 학문만 함. 주기설 초기 주창자였고, 상수 역학에 밝았다.
*남명(南冥. 1501∼1572) 경남 창녕산 조선 중기 성리학자 조식(曺植)을 말함. 남명(南冥.)은 호, 자는 건중(楗中), 평생 출사하지 않고, 산림에 묻혀 학문과 제자 양성에만 힘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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