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안동김씨 상고사 08

페이지 정보

김주회 작성일06-05-27 18:12 조회2,848회 댓글1건

본문

 

6) 1553년 癸丑 가을

송암 권호문(1532∼1587) 22세, 상락대(上洛臺)를 유람했다. 대는 성산서(城山西) 즉 상락군 김방경 유상처에 있다. 이후 여러차례 상락대(上洛臺)를 유람했다. <송암집>

城山은 회곡리에서 시내쪽 막곡리 낙동강변에 우뚝 솟은 청성산의 다른 이름이다.


(권호문)松巖先生年譜 /年譜

명종 8 1553 계축 嘉靖 32 22

八年癸丑先生二十土歲---秋。遊上洛臺。臺在城山西卽上洛君金公方慶遊賞處有詩一絶 十一月。


청성산. 『영가지』에 따르면 산성이 있었다고 성산(城山)이라고도 하며, 성산(星山), 청산(靑山)이라고도 한다.

안동에서 예천 쪽으로 34번 국도를 따라가다가 만나는 첫 번째 다리가 송야천松夜川에 걸려 있는 송야교, 즉 솔밤다리이다. 그 다리 끝에서 좌회전하여 들어서는 방죽길이 낙동강을 따라서 풍산읍에 이르는 924번 지방도이다. 방죽길로 들어서면 곧 이어 13시 방향으로 마치 낙타 등처럼 생긴 산이 눈에 들어온다. 그 산이 청성산靑城山(251m)이다.

송암 권호문(1532~1587)과 학봉 김성일(1538~1593)이 이 산에서 공부를 하면서 "올해(1568년)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함께 청성산의 주인이나 되자"고 약속을 하였는데, 그 해에 학봉은 급제를 하고 송암은 청성산에 은거하였다.

김성일이 과거에 급제한 해는 선조 1년인 1568년인데, 이때 권호문의 마음은 이미 사환仕宦의 길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으니 1566년 서른 다섯 살에 이미 연어헌을 짓고 청성산에 은거하고 있었다.

송암은 「송암사십영(松巖四十詠)」에서 청성산의 특별한 곳을 노래했는데, 적송봉(赤松峯), 대학봉(對鶴峯), 상진암(上眞巖), 적홍암(赤虹巖), 목단암(牧丹巖), 계수대(桂樹臺), 취소대(吹簫臺), 죽천대(竹泉臺), 구하대(驅下臺), 세이천(洗耳川), 한송단(寒松壇) 등이 그것이다. 스스로 봉과 대와 바위와 샘에 이름을 붙여 부른 것이다.

1584년 나주목사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던 김성일은 1586년에 일어난 사직단社稷壇 화재에 책임을 지고 해임되어 고향인 안동으로 돌아왔다. 1585년에 이르러 학봉이 송암에게 "청성산의 절반을 기꺼이 저에게 주시지 않겠습니까?"라는 편지를 보내 오자 드디어 산의 반을 잘라서 학봉에게 주었다. 그리고 청성산의 절반을 양보 받은 뒤 연어헌 위쪽 가파른 절벽 위에 자신의 정자인 석문정사石門精舍를 세운다.

웃막실에는 송암을 배향한 청성서원이 있고, 그 뒤에는 『영가지』를 편찬한 용만 권기(龍巒 權紀)선생의 정자인 졸루정(拙陋亭)이 있다.


*권호문(權好文) 

1532(중종 27)∼1587(선조 20). 조선 선조 때의 문인·학자.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장중(章仲), 호는 송암(松巖). 안주교수(安州敎授) 육(#육06)의 아들이다.

1549년(명종 4) 아버지를 여의고 1561년 29세에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1564년에 어머니상을 당하자 벼슬을 단념하고 청성산(靑城山) 아래에 무민재(無悶齋)를 짓고 그곳에 은거하였다.

이황(李滉)을 스승으로 모셨으며, 같은 문하생인 유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 등과 교분이 두터웠고 이들로부터 학행을 높이 평가받았으며, 만년에 덕망이 높아져 찾아오는 문인들이 많았다.

집경전참봉(集慶殿參奉)·내시교관(內侍敎官) 등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56세로 일생을 마쳤으며, 묘지는 안동부 서쪽 마감산(麻甘山)에 있다. 안동의 청성서원(靑城書院)에 제향되었다.

그는 평생을 자연에 묻혀 살았는데, 이황은 그를 소쇄산림지풍(瀟灑山林之風)이 있다고 하였고, 벗 유성룡도 강호고사(江湖高士)라 하였다.

작품으로는 경기체가의 변형형식인 〈독락팔곡 獨樂八曲〉과 연시조인 〈한거십팔곡 閑居十八曲〉이 《송암집》에 전한다.

참고문헌  松巖集, 朝鮮詩歌史綱(趙潤濟, 博文出版社, 1937). 〈徐元燮〉


7)    년

퇴계 이황(1501∼1571)이 권판서(權判書) 강정(江亭)을 찾았다. 정자는 계곡(桂谷)에 있는데, 상락공 김방경의 옛 유상처이다. 상락암(上洛巖) 앞은 천길 낭떨어지 아래 물길이다. <퇴계집>


(이황)退溪先生續集卷之一 /詩

三月十六日。謁權判書江亭亭在桂谷。上洛公金方慶舊游處。

小舟橫渡一江天。草屋中閒謁退賢。上洛巖前千丈水。從今喚作判書淵


8) 1587년 2월

학봉 김성일(1538∼1593) 50세, 안동부의 서쪽 낙동강 가에 있는 바로 김방경(金方慶)이 놀고 구경하던 곳인 상락대(上洛臺)를 유람하고, 북쪽 조금 위에 있는 고산정(孤山亭)을 유람하였다.

상락촌(上洛村)금계(金溪) 아래 10리 되는 곳에 있는데, 김시중(金侍中)이 늙어서 물러나 살던 곳이다. <학봉집>

◀이 당시에는 회곡촌을 상락촌(上洛村)으로도 부른 듯 하다.


■ 학봉전집 3 (2000. 6, 민족문화추진회)

연보

15년(1587, 선조20, 정해) 선생 50세

○2월에--- ○상락대(上洛臺)를 유람하였다. ---대는 안동부의 서쪽 낙동강 가에 있으니, 바로 김방경(金方慶)이 놀고 구경하던 곳이다. ○고산정(孤山亭)을 유람하였다. ---정자는 상락대 북쪽 조금 위에 있다. --- ○송암(松巖) 권호문(權好文)을 방문하였다. ---선생은 송암과 아주 가까운 곳에 살면서 ---

○7월에 송암 권호문의 상에 곡하였다. ---장사를 지낼 적에 제문을 지어 제사하였는데 상심하고 애석해 하는 뜻을 극력 말하였으며, 묘갈명(墓碣銘)을 지었으나 완성하지 못하였다.



댓글목록

김주회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주회
작성일

  송암 권호문과 학봉 김성일의 발자취 가득한 청성산(회곡리에서 시내쪽 막곡리)은
여기 (<a href=http://nbbs.naver.com/action/read.php?id=kkrhero_1&nid=8830&work=list&st=&sw=&cp=1)를 target=_blank>http://nbbs.naver.com/action/read.php?id=kkrhero_1&nid=8830&work=list&st=&sw=&cp=1)를</a>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