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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 능촌리 문화재의 현실태와 대책4-하담 김시양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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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6-06-16 13:05 조회1,57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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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김시양(金時讓) 신도비(神道碑)

 가. 신도비 소개

  1)건립연대 : 1670(현종 11). 8.

  2)장 소 : 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3)찬자 : 조경(趙絅. 漢陽人. 이조판서, 판중추부사 역임. 청백리)

  4)서자 : 이정영(李正英. 全州人. 이조판서, 판의금부사 역임)

  5)상태 :

   가)평좌대에 갓머리. 화강암 재질임. 마멸되거나 흠집 난 곳이 거의 없으며 3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글씨가 선명하며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함.

   나)원 위치는 현재 위치에서 동남쪽으로 약 500m 앞의 취묵당 옆 도로에 세워져 있던 것인데 도로의 폐쇄로 1976년 이곳으로 옮겨졌음.

   다)1990년, 문중회에서 신도비 주위에 경계 난간석을 설치하였고 2006. 4. 16. 문중회(안동김씨 제학공파 비안공 문중회)에서 해설판을 세움.

  6)현지 관리 후손 : 김태섭(안동김씨 제학공파 비안공문중회 고문). 충북 괴산군 괴산읍 동부리 402-1번지 거주. 043)832-2855 

  7)신설 해설판 내용

  이 신도비는 조선조 인조때의 명신인 하담 김시양(荷潭 金時讓)선생의 신도비이다. 1670년(현종11) 8월에 세운 이 비의 비문은 당대의 명문장가인 조경(趙絅. 漢陽人. 이조판서, 판중추부사 역임. 청백리)이 충익공의 아들인 김휘(金徽. 현종때 이조판서 역임)의 요청으로 지었으며, 글씨는 당시 최고의 서예가인 이정영(李正英. 全州人. 이조판서, 판의금부사 역임)이 썼다.

 이 비는 최초 현 위치에서 동남쪽으로 약 500m 앞의 취묵당 옆 도로가에 세워져 있던 것인데 도로의 폐쇄로 1976년 이곳으로 옮겨졌다. 전형적인 조선조의 신도비 양식을 잘 갖추고 있는 이 비는 양질의 화강암과 웅장한 규모, 명문장과 명서체 등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특히 약 330여년이 지난 지금도 풍화 마멸된 곳이 전혀 없는 것으로 유명하다.

   

  나. 김시양(金時讓) 소개 1581(선조14)∼1643(인조21).

 조선의 文臣. 본관은 安東, 초명은 時言, 자는 子中, 호는 荷潭으로 증영의정 金錫의 孫이요, 증좌찬성 金仁甲의 子로 충북 괴산에서 출생하였다. 1605년(선조38) 정시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 주서, 예조와 병조의 좌랑을 거쳐 1610년 서장관으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1611년(광해3) 전라도 도사때 지방향시에 임금을 비방하는 시제를 출제했다는 모함에 들어 12년간 종성과 영해에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예조와 병조의 정랑, 수찬·교리․경상도관찰사, 평안도관찰사, 팔도도원수·사도체찰사 등을 역임했으며 강화유수, 호조판서, 병조판서를 거쳐 판중추부사 겸 판춘추관사에 이르렀다.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1643년(인조21) 충주시 금가면 하담리의 사제에서 별세하였고 묘는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개향산, 본 신도비 뒷산 우측에 있다. 회령의 鄕祠에 제향되었으며 1691년(숙종17) 忠翼의 시호를 받았다. 저서로 <忠翼公 荷潭先生 遺稿>(8책)가 있다.


다. 사진 자료 소개

chungikmyoby62-1-1.JPG

<신도비>

 

chungikmyoby61-1-1.JPG


chungikmyoby50-2-1.JPG 

                                  <해설판>



   라. 현실태 및 요청사항

   

     구분

항목

현실태

건의 및 요청사항

비고

문화재 지정상

미지정

지방문화재로 지정 관리 요

 

보존 관리상

비각이 없음

비각 건립 요

 

도로 표지판

없음. 초행인은 전혀 찾을 수 없음

3개소에 표지판 설치 요

1)괴산읍에서 목도로 갈라지는 곳,

2)능촌리 입구, 3)능촌리 마을회관 옆

 

해설판

06. 4. 16. 문중에서 신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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