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답사자료 강릉과 문온공(척약재 김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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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6-07-10 09:43 조회1,662회 댓글0건본문
寄崔卜河咸承慶兩同年雜言
기최복하함승경양동년잡언
鏡浦臺寒松亭 경포대한송정
風更淸月更明 풍갱청월갱명
携手游相對飮 휴수유상대음
海棠花鷓鴣聲 해당화자고성
何時一蹇驢 하시일건려(건=절름발이건,려=나귀려)
吟嘯瞰滄溟 음소감창명(소=휘파람소,감=굽어볼감)
久知功名富貴 구지공명부귀
恰似浮雲輕 흡사부운경
6) 최복하. 함승경 두 동년에게 준 잡언시
경포대와 한송정에는
바람 맑고 달은 더욱 밝구나
손잠고 노닐며 술마시는데
해당화 꽃피고 자고새우는소리들리네
그언젠가 나귀타고
시읊으며 저바다 바라볼꼬
난 이미 알았네, 부귀공명이
마치 뜬구름같다는 것을...
주1. 同年=같은해에 과거에 급제한 사람, 同年生, 同榜이라고도 한다.
주2. 雜言詩= 한시에서 한구가 5언이나 7언처럼 일정하지 않게 지은 시. 이시는 작품200번과 동일하다.
주3.경포대=강원도 강릉시 동북쪽에 위치한 루대로서 관동팔경에 하나이다. 1326년(충숙왕13년)에 朴淑이 창건하고 1508년(중종3)에 韓汲이 옮겨 지엇다.
주4.한송정=강원도 강릉 동쪽에 있는 정자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동쪽으로 큰바다에 임하였고 소나무가 울창하였다고 한다. 정자 곁에 차샘(茶泉) 돌아궁이(石竈), 돌절구(石臼)등이 있는데 곧 述郞仙人이 놀던 곳이라 한다.
- 최복하(崔卜河)-강릉최씨
고려(高麗) 한성판윤(漢城判尹), 보문관 직제학(寶文館直提學), 대사간(大司諫)을 지냈다.
<울진군지>
제1장 인물 제6절 효부(孝婦)
최복하(崔卜河)
한성판윤(漢城判尹) 보문각직제학(寶文閣直提學) 대사간(大司諫) 등의 요직을 거친 고려말의 중신(重臣)으로 고려가 망해가는 조짐을 직감하여 벼슬을 버리고 본 고을 울진군 북면 고목2리 무령현(武靈峴)으로 은퇴하였다. 상국(相國) 이구(李玖)의 관동이군(關東二君)에게 라는 시(詩)에서 “봉지(鳳地)의 사간(司諫)이 선사()에 높이 누워 일찌감치 어부가의 뜻을 알았네 염매(鹽梅:정치를 조화롭게)를 잘 만드는 것이 시급한 임무인데 상감의 주방에서는 그대의 조리 솜씨 기다렸다네”라 하였다. 이 시(詩)의 내용은 새로운 정부에서 동참할 것을 간절히 바라는 뜻이었지만 공(公)은 끝까지 의리를 지키고 고려복벽운동을 모의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98년 5월 10일에는 입향한 무령현(武靈峴) 옛터에 후손과 군민의 뜻에 의해 유허비를 세웠다.
<울진군지>
제1장 인물 제11절 과제(科第)
1. 고려시대1)
최복하(崔卜河)
공민왕(恭愍王) 때 과거에 급제하여 보문각직제학(寶文閣直提學) 대사간(大司諫)이다.
<울진군지>
제2장 입향·수관 제1절 입향(入鄕)
최복하(崔卜河)
1391년(고려 공양왕 2년)에 입향. 본관은 강릉. 관직은 고려조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한성판윤(漢城判尹) 보문각직제학(寶文閣直提學) 대사간(大司諫)을 지냈다. 시조는 경흥부원군(慶興府院君) 최필달(崔必達), 분파조는 최관(崔琯)이다.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가 자주 왕권을 범하므로 고려의 국운이 멀지 않았음을 짐작하고 벼슬을 버리고 본군 북면 고목리 기곡동(基谷洞) 무령현(武靈峴)에 은둔하였다. 이성계는 회유하고자 보국 이구(輔國 李玖)로 하여금 정사를 함께 하자는 권기시(權起詩)를 보냈으나 동참하지 않고 산천을 거닐다가 양양(襄陽) 연하정(蓮荷亭)에 이르러 자위시(自慰詩)를 지어 마음을 달래기도 하였다. 공양왕이 이성계에 의해 삼척 근덕 고돌치(高突峙)에 유폐(幽閉)되자 공(公)은 여조(麗朝)의 장군 장천영(張天永)과 임제(林悌) 그리고 태학생(太學生) 전생(田生)등과 모의하여 울진 삼척에서 수천명의 동지를 규합 혁명코자 하였으나 사전에 탄로되어 이성계의 아들 태종의 손에 죽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조정에서는 울진을 반역지역으로 지적하고 과거를 울진인에게 못보게 하여 출세의 길을 막았다. 그러나 세종대왕께서는 한나라 안에 이방 아닌 이방지역을 둔다는 것은 옳지 않다 하여 다른 군과 같은 대우를 하도록 하였다.
공의 생사(生死)는 알 길이 없으나 그 때에 희생당한 것으로 추측된다. 부인은 울진장씨(蔚珍張氏) 집현학사(集賢學士) 천익(天翼)의 딸이다. 손자 시창(始昌)은 조선 문종조(文宗朝)에 삼군도진무사(三軍都鎭撫使)였는데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는 불의(不義)에 벼슬을 버리고 순흥에 내려와 은둔하면서 아들 면(沔)과 함께 금성대군(錦城大君)의 단종복위에 가담하였으나 고변(告變)으로 사전에 발각되어 부자(父子)가 순절(殉節)하였다. 묘소는 실전(失傳) 되어 고목리 무령현(武靈峴)에 유허비를 세웠다. 자손들은 울진군과 여타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상국(相國) 이구(李玖)의 권기시(權起詩)
봉황지에서 사간을 지낸이 선사땅에 누워 /
일찍이 창랑의 어부가의 뜻을 알았네 / 早和滄浪漁夫歌
말하노니 바른 정사를 하는 것이 시급하지 않는가 / 爲說鹽梅時所急
조정에서는 선정묘책을 논의함에 임금님은 그대를 기다리네 / 天廚鼎味待君和
함승경
함승경의 아들은 함부림이며 함부림은 군사공의 손부(김칠양-김돈-김계로(+함부림따님)이다
함부림(咸傅霖)
1360(공민왕 9)∼1410(태종 10).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윤물(潤物), 호는 난계(蘭溪). 검교중추원학사(檢校中樞院學士) 승경(承慶)의 아들이다.
1385년(우왕 11)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검열(藝文檢閱)을 거쳐 좌정언으로 승진하였다.
1389년 공양왕이 즉위하자 헌납으로 승진하여 정지(鄭地)·이림(李琳)·왕안덕(王安德)·우인열(禹仁烈)·우홍수(禹洪壽) 등 구신들을 탄핵하다가 왕의 미움을 받아 춘주지사(春州知事)로 좌천되었으나 다시 부름을 받아 형조정랑이 되었다.
이때 중방(重房)의 무신들이 문신을 멸시하자 이에 항거하다가 파직되었다.
1392년(공양왕 4) 이성계(李成桂)가 실권을 잡자 병조정랑 겸 도평의사사경력사도사에 복직되었다. 이해 이성계 추대에 참여하여 개국공신 3등으로 개성소윤에 임명되었다.
그뒤 형조의랑에 이어 대사성·좌산기상시로서 상서소윤(尙瑞少尹)을 겸하고 명성군(溟城君)에 봉하여졌다. 태종 초기에 충청도도관찰출척사·예문관제학·동북면도순문사·동북면도순문찰리사 겸 병마도절제사 겸 영흥부윤 등을 거쳐, 1404년(태종 4) 참지의정부사로서 대사헌에 올랐다.
다음해 노비변정도감제조와 경기도도관찰사를 지내고, 1406년에 계림부윤·경상도도관찰출척사를 거쳐, 다음해 다시 참지의정부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08년에 형조판서가 되었다가 1410년 파직되었다. 성격이 강직하여 직언을 잘하였으며, 이치(吏治)에 능숙하여 관직을 맡을 때마다 칭송을 받았다.
1405년에는 앞서 1398년(태조 7)의 제1차왕자의 난 때, 정도전(鄭道傳)과 더불어 왕자 방석(芳碩)을 옹립하였다는 혐의로 탄핵을 받은 일이 있다.
시호는 정평(定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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