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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어록 09 (1274년, 6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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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6-08-22 22:19 조회1,47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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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4년 (63세), 일본정벌시 하카타만 해상으로 물러나서


   일기도(一岐島)에 이르니 왜병이 언덕위에 진(陣)을 친지라 박지량(朴之亮)과 김방경의 서()인 조변(趙)이 쫓으니 왜가 항복을 청하다가 다시 와서 싸우거늘, 홍다구가 박지량과 조변(趙)과 더불어 1,000여 급(級)을 격살(擊殺)하고 배를 삼랑포(三郞浦)에 버리고 길을 나누어 나아가매 죽인 바가 대단히 많았다.

   왜병(倭兵)이 갑자기 이르러 중군(中軍)을 쳐서 검(劒)이 좌우로 부딛쳤으나 김방경은 의연하여 조금도 물러가지 않고 한 효시(嚆矢)를 빼어 소리를 가다듬어 크게 외치니 왜(倭)가 놀라 피하여 달아나므로 박지량(朴之亮)과 김흔(金)·조변(趙)·이당공(李唐公)·김천록(金天祿)·신혁(新奕) 등이 힘껏 싸워 왜병(倭兵)이 크게 패하여 엎어진 시체가 삼대와 같았다.

   홀돈(忽敦)이 말하기를, “몽인(蒙人)이 비록 싸움에 익숙하였으나 어찌 이에 비하리오.” 하였다. 모든 군사가 같이 싸워 해가 저무니 이에 해산(解散)하였다.

   김방경이 홀돈(忽敦)·홍다구(洪茶丘)에게 말하기를, “병법(兵法)에 1,000리(里)에 현군(縣軍) 하면 그 칼날을 가히 당치 못한다 하였는데 우리 군사가 비록 적으나 이미 적경(敵境)에 들어와서 사람마다 스스로 싸우고자 하니 즉 맹명(盟明)이 배를 태우고 회음(淮陰)이 물을 등짐이라 다시 싸우기를 청한다.” 하매

   홀돈이 말하기를, “병법(兵法)에 ‘소적(小敵)이 견수(堅守)하면 대적(大敵)에게 사로잡힌다.’고 하였으니 피핍(疲乏)한 군사를 채찍질하여 날로 불어나는 무리를 당적함은 완전한 계책이 아니니 회군(回軍)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였다.

   유복형(劉復亨)이 유시(流矢)에 맞아서 먼저 배에 오르므로 드디어 군사를 끌고 돌아올 때 마침 밤에 크게 풍우(風雨)가 있어 전함(戰艦)이 암벽(岩壁)에 부딛쳐 많이 파손(破損)되고 김신(金侁)은 물에 떨어져 죽었다.

   합포(合浦)에 이르러 노획한 기장(器仗)을 제(帝) 및 왕에게 바치니 왕이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 장일(張鎰)을 보내어 위유(慰諭)하고 김방경을 먼저 돌아오도록 명하여 상주국 판어사대사(上柱國判御史臺事)를 더하였다.


■ 고려사절요

   방경이 홀돈ㆍ다구에게 말하기를, “우리 군사가 비록 적기는 하지만 이미 적의 땅에 들어와 사람들 스스로 힘을 다하여 싸우니, 이것이 곧 맹명(孟明)이 배를 불태우고(주D-001) 회음후(淮陰侯)가 배수진을 친 격(주D-02) 이다.” 하며 다시 결전하기를 청하였는데,

   홀돈이 말하기를, “수가 적은 편이 힘을 헤아리지 않고 나가 싸우면 수가 많은 편에게 사로잡힌다 하였는데, 피로한 군사를 몰아 많은 적과 싸우는 것은 완전한 계책이 아니다.”고 하였다.

   유복형이 날아온 화살에 맞아 먼저 배로 올라갔기 때문에 드디어 군사를 이끌고 배로 돌아왔다. 마침 그날 밤에 크게 바람불고 비가 와 바위와 벼랑에 전함이 부딪쳐 많이 부서지고 김신은 물에 빠져 죽었다.


[주 D-001] 맹명(孟明)이 배를 불태우고 : 진(秦) 나라 장수 맹명(孟明) 이 진(晉) 을 치러 갈 때에, 황하를 건너고 나서 타고 간 배를 불에 태웠는데, 이것은 싸움에 이기지 못하면 돌아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주 D-02] 회음후(淮陰侯)가 배수진을 친 격 : 회음후(淮陰侯) 는 한(漢) 나라 장수 한신(韓信) 인데, 조(趙) 나라와 싸울 때에 강물을 뒤에 두고 진을 쳐서 이겼다. 부하 장수들이 묻기를, "병법(兵法) 에 산과 언덕을 뒤로 하고 앞에는 물을 두고 진을 친다고 하는데, 이번에 물을 등지고 진을 쳐서 이긴 것은 무슨 까 닭입니까?" 하니, 한신이 답하기를, "너희들은 본래부터 나의 심복이 아니니, 장꾼을 불러모아 싸움을 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물을 앞에 두고 진을 치면 너희들이 모두 뒤로 도망갈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 월간조선 2004년 1월호 

몽골군이 돌연 하카타灣으로부터 사라진 까닭

10월20일 밤, 연합군은 勝勢에도 불구하고 陸上 교두보에서 野營하지 않고 상륙정 拔都魯輕疾舟를 타고 하카타灣에 떠 있던 군함 千料舟로 물러났다. 육지에서 宿營하지 않았던 것은 일본군이 장기로 삼는 夜襲(야습)을 두려워한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귀함 후 연합군 수뇌부는 전투를 계속할 것인가의 여부를 논의하기 위한 作戰會議(작전회의)를 열었다. 「東國通鑑(동국통감)」과 「高麗史節要(고려사절요)」는 이 논의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忽敦(홀돈=흔도)가 말하기를 『우리 軍勢는 전투엔 習熟(습숙)하고 있지만, 종일 싸워서도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날이 저물어 무기를 거두었다. 내일도 또 전투를 할 것인가』라고 했다.

★金方慶이 말하기를, 『우리 兵들이 이미 敵陣에 침입해서 잘 싸우고 있어 「지금부터 一步」라는 상황에 있다. 옛날 秦(진)의 명장 孟明(맹명)은 (상륙 후에) 스스로 (타고 온) 배를 불태웠고, 漢의 淮陰侯 韓信(회음후 한신)은 背水陣(배수진)으로 싸워 승리를 쟁취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이 故事에 따라 決戰을 해야 할 것 아닌가』라고 했다.

이에 忽敦이 말하기를, 疲兵(피병: 피로한 병사)을 가지고 大敵과 싸우더라도 完勝을 얻지 못할 것이니 물러서는 것이 좋다』고 했다 >

高麗의 사령관 金方慶은 하카타 교두보에서 野營한 뒤 다음날 일본군과 決戰을 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 데 대해 총사령관 ♥都와 右副元首(우부원수) 洪茶丘는 이 이상 싸워도 결정적인 승리를 얻어지지 않을 것이니 만큼 철병해야 할 것이라고 거부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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