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제사공(휘 영수) 포항 관련 자료-5(농수 최천익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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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작성일06-09-03 07:22 조회1,513회 댓글0건본문
農叟 崔天翼 先生文集
根據: 農叟先生文集 拔萃
교남(嶠南)의 대유(大儒) 號 농수(農叟) 崔天翼 先生의 문집 일부분을 발췌하여 본 졸책에 싣는다. 필자가 농수선생문집을 독서중, 김영수(金永綬)통제사와 농수 崔天翼 선생이 서신을 주고받는 부분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農叟 先生은 肅宗38年(壬辰 1712) 興海邑 龍田里 興海崔氏門에서 出生하였고, 嶠南의 大儒로, 또는 학자로서 조선을 빛낸 큰 별이다. 金 統制使는 肅宗42年(丙申 1716)생으로, 농수선생 보다 4年下다. 김 통제사가 본 고을 군수로 봉직할 때, 두 분은 높은 학문으로 돈독한 교우(交友)를 했음을 本 書信으로 유추(類推)해 볼 수 있다. 선생의 천성은 원래 벼슬에 관심이 없어서, 은거하며 오로지 學文에만 열중하셨고, 주위의 각별한 권유로 進士試에 應試, 入格한 것이 그의 外出 모두였다.
국립중앙도서관에 先生의 木版本
선생의 문집은, 국립중앙도서관에 2권 2책의 목판본이 소장되어 있고, 국립중앙도서관은 농수 선생문집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조선시대 학자 崔天翼 선생이 남김 문집으로 “農叟文集”이라 하며 표지에는 “농수선생문집”이라 적혀 있다. 권1에는 詩142수, 書15편, 권엽서도망작(權葉書悼亡作). 묘지명(墓誌銘)등이, 권2에는 序3편, 記4편, 行狀1편, 祭文2편, 賦1편, 書19편 등이 있다. 이 가운데 詩는 격이 높고 음절이 기운차다는 평을 받았으며 詩가운데 제언기(堤堰記)는 민생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물”(治水)을 설명한 글이기도 하다. 1784(정조8년)최기대, 이학해 등이 간행 했다.
金永綬 統制使와의 書信交流
특히 金 統制使와의 서신교류는, 두분 모두 격조 높은 문장을 구사하는 교신 내용은 학문의 경지(境地)를 보이고 있다.
농수 성생의 서신 내용 중에는 김 통제사가 흥해 군수 시 중농을 도모하기 위하여 피땀흘려 축조한 흥해구제(興海九堤 築造: 英祖38壬午1762)가 불행하게도, 한가위(년대미상)를 10여일 앞둔 시기에 예년에 볼수 없었던 집중 호우로 西面(?)興海郡 西面의 2개 堤만이 무사하고, ‘太平堤’와 그 외의 堤들이 훼손되어 이로 인해 제 아래의 작물이 크게 피해를 입었고, 고을 민들의 생활이 큰 난재가 되겠으며 세수목표(稅收目標)에도 차질이 불가피 할것이라 근심을 하며 흥해 군수 시 중농의 목적으로 치수사업에 피 땀흘려 축조한 그 제 들이 폭우로 훼손되었음을 안타까워 하고 있다. 당시 우정 제도는 파발(擺撥)이나 봉수(烽燧) 또는 일정 거리에 설치된 역(驛)등으로 조정이나 관아에서만 제한적으로 이용하고 일반인은 이용 기회가 제한되어 있어서 서신교류의 불편함이 많았음도 엿볼수 있다. 두분의 서신 모두를 싣지 못함을 아쉬워하며 김 통제사로부터 먼저 서신을 받고 보내는 답신과 통상적으로 보내는 서신을 각각1편 씩만 실었다. -李正業-
根據: 農叟先生文集 拔萃
교남(嶠南)의 대유(大儒) 號 농수(農叟) 崔天翼 先生의 문집 일부분을 발췌하여 본 졸책에 싣는다. 필자가 농수선생문집을 독서중, 김영수(金永綬)통제사와 농수 崔天翼 선생이 서신을 주고받는 부분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農叟 先生은 肅宗38年(壬辰 1712) 興海邑 龍田里 興海崔氏門에서 出生하였고, 嶠南의 大儒로, 또는 학자로서 조선을 빛낸 큰 별이다. 金 統制使는 肅宗42年(丙申 1716)생으로, 농수선생 보다 4年下다. 김 통제사가 본 고을 군수로 봉직할 때, 두 분은 높은 학문으로 돈독한 교우(交友)를 했음을 本 書信으로 유추(類推)해 볼 수 있다. 선생의 천성은 원래 벼슬에 관심이 없어서, 은거하며 오로지 學文에만 열중하셨고, 주위의 각별한 권유로 進士試에 應試, 入格한 것이 그의 外出 모두였다.
국립중앙도서관에 先生의 木版本
선생의 문집은, 국립중앙도서관에 2권 2책의 목판본이 소장되어 있고, 국립중앙도서관은 농수 선생문집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조선시대 학자 崔天翼 선생이 남김 문집으로 “農叟文集”이라 하며 표지에는 “농수선생문집”이라 적혀 있다. 권1에는 詩142수, 書15편, 권엽서도망작(權葉書悼亡作). 묘지명(墓誌銘)등이, 권2에는 序3편, 記4편, 行狀1편, 祭文2편, 賦1편, 書19편 등이 있다. 이 가운데 詩는 격이 높고 음절이 기운차다는 평을 받았으며 詩가운데 제언기(堤堰記)는 민생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물”(治水)을 설명한 글이기도 하다. 1784(정조8년)최기대, 이학해 등이 간행 했다.
金永綬 統制使와의 書信交流
특히 金 統制使와의 서신교류는, 두분 모두 격조 높은 문장을 구사하는 교신 내용은 학문의 경지(境地)를 보이고 있다.
농수 성생의 서신 내용 중에는 김 통제사가 흥해 군수 시 중농을 도모하기 위하여 피땀흘려 축조한 흥해구제(興海九堤 築造: 英祖38壬午1762)가 불행하게도, 한가위(년대미상)를 10여일 앞둔 시기에 예년에 볼수 없었던 집중 호우로 西面(?)興海郡 西面의 2개 堤만이 무사하고, ‘太平堤’와 그 외의 堤들이 훼손되어 이로 인해 제 아래의 작물이 크게 피해를 입었고, 고을 민들의 생활이 큰 난재가 되겠으며 세수목표(稅收目標)에도 차질이 불가피 할것이라 근심을 하며 흥해 군수 시 중농의 목적으로 치수사업에 피 땀흘려 축조한 그 제 들이 폭우로 훼손되었음을 안타까워 하고 있다. 당시 우정 제도는 파발(擺撥)이나 봉수(烽燧) 또는 일정 거리에 설치된 역(驛)등으로 조정이나 관아에서만 제한적으로 이용하고 일반인은 이용 기회가 제한되어 있어서 서신교류의 불편함이 많았음도 엿볼수 있다. 두분의 서신 모두를 싣지 못함을 아쉬워하며 김 통제사로부터 먼저 서신을 받고 보내는 답신과 통상적으로 보내는 서신을 각각1편 씩만 실었다. -李正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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