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담 김시양 연구(석사학위 논문)-본론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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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6-10-20 11:52 조회1,526회 댓글0건본문
金時讓이 종성으로 귀양 가서 한 달 남짓 되었을 때 꿈을 꾸니 배소를 남쪽 지방으로 옮겼는데, 고을 이름 아래에 海자가 있어 평해나 홍해인 것 같으나 자세히 알 수 없었다.1) 그 당시에는 그 꿈의 뜻을 알지 못하였는데 그 뒤 寧海로 귀양지를 옮겨서 觀魚堂 아래에 거처하게 되었다.
癸亥年 仁祖反正이 일어나서야 비로소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다. 『記問叢話』에 실려있는 그의 꿈은 여러 번 앞날을 예언해 주었다.2)
그 때 꿈에서 깨어 지은 시이다.
孤臣觸犯罪當誅 외로운 신하 죄를 범했으니 마땅히 죽어야 할 것을
天地包容聖渥殊 하늘과 땅이 포용하시니 성상의 은혜 특별 하구나
塞北風沙可去矣 바람 모래 부는 북쪽 변방조차 갈만 했으니
嶺南梅竹盍歸乎 영남의 매죽에 아니 가고 어쩌리
御恩爲有丘山重 임금 은혜 산처럼 무거우니
跋涉寧論道路迂 산 넘고 물 건너기에 길 멀다 말할소냐?
萬事人間都是夢 인간의 온갖 일 모두가 꿈이라오.
好音佇待夢相符3) 좋은 소식이 꿈과 서로 맞기를 우두커니 기다리네.
김시양은 流配期間 동안 학문에 더욱 전념하였다. 특히 장차 만주의 여진족이 흥성하여 나라의 위험이 될 것을 예견하고 國防問題에 대한 硏究에 몰두하였으며, 여진족과 국경을 마주 하고 있는 함경도의 인재들을 눈여겨보아 후일 발탁하여 크게 쓰기도 하였다.
光海君 초반에는 토목공사가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壬辰倭亂으로 폐허가 된 수도를 복구하기 위해 궁궐과 관청을 새로 지었으며, 전국에서 도로와 교량을 수리하기 위한 공사가 벌어졌다. 국가에서는 막대한 비용이 들자 죄인들에게 돈을 받고 죄를 면하게 해주는 贖金令을 내렸다. 서울 안의 친우들이 銀貨를 모으기로 약속하고 荷潭을 위해 돈을 모으고 있자, 이를 듣고 급히 엄중하고 곧은 말로 글을 보내어 모금활동을 말렸다. 친우들이 그의 뜻이 굳게 정해 있음을 알고 드디어 중지했다.4)
金時讓은 구차스럽게 죄를 사면 받는 것은 죽느니보다 못하다 하여 끝까지 돈을 바치치 않아 光海君이 폐위될 때까지 귀양살이에서 풀려나지 못하였다. 당시의 사람들은 이를 두고 장한 일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12년간의 외롭고 힘든 流配生活을 오로지 詩作 活動과 經書로 달랬다.
2) 洪淳來, 「韓國 記夢詩의 展開 樣相 硏究 」, 檀國大學校 博士學位論文, 2005, p.163.
4) 이영춘 외,『朝鮮의 淸白吏』, 가람기획, 2005, p.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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