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문학기행 / 황진이] (2)왕손 벽계수와 청산리 벽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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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6-11-23 12:13 조회1,914회 댓글1건본문
경기문학기행 / 황진이] (2)왕손 벽계수와 청산리 벽계수
앞에서 언급한 대로 진이는 재색을 겸비한 기생이었기에 자신이 유혹해서 넘어가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자부할 정도였다. 그런데 왕손인 벽계수(碧溪守 ; 이원혼이라는 왕족으로서 효령대군의 증손)가 항상 자신은 근엄해서 스스로 지조와 행실이 있음을 자랑하였다. 어느 날, 벽계수가 말하기를, “사람들이 한 번 황진이를 보면 모두 현혹된다. 내가 만일 당하게 된다면 현혹되지 않을 뿐 아니라 반드시 쫓아 버릴 것이다.” 라며, 황진이의 소문을 일소에 붙이고, 여자를 멀리하는 것을 자랑하였다. 이런 벽계수가 개성에 내려가 달밤에 만월대에 오르니 홍이 도도하게 일어났다. 그때, 진이가 문득 담장으로 나와 맞이하여 나귀의 고삐를 잡고 노래를 불렀다. 벽계수가 달 아래 한 송이 요염한 꽃을 대하고, 또 그 목소리는 마치 꾀꼬리가 지저귀는 것 같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깊이 빠져들어 나귀 등에서 내렸다. 진이가 말하기를, “왜 나를 쫓아내지 않으세요?” 라고 웃으면서 즉시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이에 벽계수가 크게 부끄러워했다. 그때 황진이가 부른 노래는 아래와 같다. 청산리(靑山裏) 벽계수(碧溪水)이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一到滄海)하면 다시 오기가 어려오니 명월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쉬여간들 엇더리 (청산 속의 흐르는 푸른 시냇물아 빨리 흘러간다고 자랑하지 말아라. 한번 넓은 바다에 다다르면 청산에 다시 돌아오기 어려우니, 밝은 달이 빈산에 가득차게 비치는 이 밤을 나와 함께 쉬었다가 가면 어떻겠는가). 자신과는 다른 신분인 벽계수를 회유하기 위하여 즉석에서 지은 시에서도 높은 언어구사력을 보여주니 황진이의 문학성이 얼마나 뛰어났던 지를 알 수 있다. 이 노래가 특히 뛰어난 것은 왕손 이름인 벽계수(碧溪守)와 푸른 시냇물인 벽계수(碧溪水)가 발음이 같다는 점과 ‘명월(明月)’은 밝은 달과 황진이 자신을 동시에 의미한다는 중의법을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청산’은 영원한 자연을, ‘벽계수’는 덧없는 인생을, ‘수이 감’은 순간적인 인생의 삶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점도 높이 평가된다. 이 시조는 벽계수(碧溪守)를 시험해 보기 위한 수단으로 쓰이긴 했지만 왕손인 상대방을 산 아래에 흐르는 벽계수에 기생인 자신은 하늘에 떠 있는 명월에 비유한 것은 신분의 차이를 넘어 보겠다는 의지로도 보인다. 또한 인품이나 학덕에 있어 풍류명사로서의 면모는 없으면서 지체만 높다고 자부하는 계층에 대한 야유와 풍자가 담겨져 있기도 하다. 특히 이는 사대부 시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인간 성정의 진솔한 발로로서, 다정다감하면서도 기예에 두루 능한 명기 황진이의 문학적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한 작품이라 하겠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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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김상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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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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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관련 덧붙여서 황진이가 죽은지 3개월후에 또 다른 사대부에 풍류객 백호(白湖) 임제(林悌)가 황진이(黃眞伊)의 묘를 찾아가 읊은 시가 있읍니다. 그때 백호는 평안도 도사 벼슬을 하명 받고 현지로 부임하는 길이었는데, 개성을 지나다가 평소에 한 번 만나보고 싶었던 여걸 황진이가 석 달 전에 죽었다는 말을 듣고 닭 한 마리와 술 한 병을 사들고 그녀의 무덤을 찾아가 제사를 지내주고 이렇게 아쉬운 심정을 읊었던 것이다
淸草(푸른 숲) 우거진 골(계곡)에 자는가 누웠는가
紅顔 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는가
잔 잡아 권할(술한잔 권할 수) 이 없으니 그(너)를 슬퍼하노라.
관직을 받아 임지로 가던 선비가 천한 기생의 무덤에 찾아가 절을하고 시까지 읊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조정에서는 벼슬아치와 선비들로부터 숱한 비난이 쏟아졌고, 심지어는 이 때문에 현지에 도착해 보니 이미 파직되어 있었다는 일화가 있다.
풍류객이라면 이정도는 되어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