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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시 역사의인물 - 김충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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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작성일06-12-24 18:28 조회1,449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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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충갑      

김충갑은 안동김씨(구안동)로 자는 서초(恕初)요, 호를 구암(龜岩)이라 하였다. 김충갑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장래 큰 그릇이될 인물로 향리의 총망을 받았다. 차차 성장함에 스승을 택하여 학문을 닦았는데 처음에는 정암 조광조에게 사사하다가 정암이 기묘사화에 화를 입자 만년에는 퇴계 이황 문하에서 성리학을 닦았다.

대록지에는 구암이 명종 계묘에 사마의 양과에 급제하였다고 전하나 사실은 중종 38년 계묘에 급제한 것이다. 구암은 젊어서부터 절의가 굳은 선비로 스승 정암에게 사사함에 이르러 더욱 성리학을 깊게 연구하면서 대의의 실천을 다짐하였다.

그러나 정암이 중종 14년 기묘(1519)년에 남곤 심정의 모함으로 이상정치 실현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사사되고 말았다. 이때 정암을 따르던 조신들과 학자들이 연루되어 혹은 사사되고 혹은 귀양하고 혹은 삭탈 관직을 당하였다. 스승과 어진 사람들의 참혹한 처형을 보고 가만히 있을 구암이 아니었다. 구암은 이때 젊은 시절이었으며 벼슬길에 나가지 않은 백면 서생이었으나 정암을 구하는데 앞장섰다.

정암의 죽음에는 팔도 유생이 모두 칠기 하였지만 구암은 이들의 앞장에 서서 정암을 구하려다가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구암은 얼마 안되어 옥에서 풀려났으나 제척 인물이 되어 벼슬길에 나가기 힘들게 되자 향저가 있는 괴산을 오르내리며 불우한 나날을 보내었다. 이때 옥에서 풀려나 괴산으로 가는 도중에 천안군 병천면 가전리(잣밭)에 머무르다가 마침내 이곳에 살기로 결심하였다.

그래서 이곳 잣밭에서 아들 김시민 장군이 출생했고, 역학자 김치가 손자로 태어났으며 천하 문장인 김득신이 증손자로 태어났으니 구암이 천안 잣밭에 주거를 정한 후 크게 대창 하였다하겠다. 구암의 형제가 5형제인데 이들은 천안출신은 아니지만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현관으로 나아가 가문을 빛내었다. 구암의 직계 방계가 행직으로 대관은 없었지만 반열을 지키는데는 족하리만큼 대창하였다.

명종 1년(1546)에 구암이 별시에 등과 하여 관직에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이 해는 명종 즉위를 경하 하기 위하여 특별 과거를 실시한 것이다. 구암은 기묘사화 후 제척 인물로 과거에 응시할 생각을 하지 않았으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중종 임금도 내심 조광조(정암)를 사사한 것을 후회하여 기묘 연루자의 추국과 제척은 중지하였었다. 그러던중 중종이 승하하고 명종이 즉위한 후 과거에 응시하여 괴원과 양사에 출사하였다. 괴원은 승문원을 말하며 양사는 사헌부와 사간원을 말한다. 괴원과 양사는 우선 학문이 높은 사람이어야 하며 또한 지조가 있는 선비라야 임명되는 곳이다. 그의 곧은 성미가 조정의 비리를 보고 그대로 넘어가지 못하여 평탄한 환로를 걷지 못하였다. 명종이 즉위하였으나 나이가 어리므로 친정을 하지 못하고 모후 문정왕후가 수렴 청정하였다.

그런데 문정왕후는 불교를 독실히 믿어 억불정책으로 나오던 국책을 바꾸어 승과를 회복하여 승려를 등용하였다. 그리고 명승으로 이름난 보우를 우대하여 자주 궁중 출입을 허용하였다. 불교를 배척하던 유생들의 마음이 편할리 없었다. 그래서 경골 유생들이 상소를 올려 보우를 배척하였으나 가납되지 않았다. 곧고 굽힐줄 모르는 성리학자 구암이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구암은 성균관의 유생을 인솔하고 보우 배척 운동을 벌였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미움을 샀으나 유학자간에는 이름이 높아져 사림의 중견으로 부상하기에 이르렀다.

중종이 승하하고 중종의 아들이요, 윤임의 생질되는 인종이 즉위하였으나 재위 불과 8개월에 돌아가고 그의 이복 아우인 명종이 연소한 나이로 즉위하였다. 그래서 전술한 바와 같이 명종의 생모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된 것이다.

중종 년간부터 장경왕후의 아우인 윤임과 문정왕후의 아우인 윤원형간에 반목이 심하였는데 문정왕후가 수렴청정 하기에 이르러 윤임일파를 숙청하고 말았다. 이 사화를 을사년에 일어났다 하여 을사사화라고 한다. 윤원형의 전횡은 사적에 전해진 폭관이었으므로 윤임이 자연 사림의 동정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구암은 보우 배척뿐 아니라 을사당인의 배척에도 앞장서서 탄핵하였다. 당시 윤원형을 정점으로 하는 을사 당인의 세력은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는데 구암은 을사당인을 탄핵하는 상소를 계속 올렸다.

그래서 문정왕후의 노여움을 사서 청주로 귀양가게 되어 구암의 관로는 막히고 말았다. 또한 구암의 매서(누이동생의 남편)인 이휘가 을사사화때 직간하다가 화를 입어 죽음을 당하였다. 이휘는 대과에 급제한 후 홍문관 수찬으로 출사하였다가 윤원형 일파의 비행을 묵과할 수 없어 수렴청정 하는 문정왕후께 직간 하다가 윤원형 일파에게 몰려 화를 당하였다.

구암은 이휘의 시체를 어루만지며 장송가 한수를 지어 시체옆에 놓았다. 그 장송가 내용은 다음과 같다.


베엇네 베엇네

낙낙 장송을 베었네

베지 않고 길른다면

기둥(들보)감으로 자랄텐데

장차 큰 집이 무너지면

어디 나무 있어 기둥으로 쓸고


구암은 매서 이휘를 큰 인물로 여겨 애지중지 하였는데 사화를 겪으니 크게 애통해 마지않았다. 그리고 구암도 을사사화의 억울한 선비를 신원 하고자 을사당인을 탄핵하다가 청주에 귀양 갔음은 이미 서술한바이다. 구암은 명종 시대는 햇빛을 보지 못하고 불운한 세월을 보내다가 선조가 즉위하자 유서의 은전을 입어 벼슬길에 다시 나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간원 헌납에 이르렀다. 사간원 헌납은 청직 이지만 구암의 인품과 학문으로 보아 걸맞는 자리는 못되었다. 아마도 정암 조광조를 옹호하지 않는다면 또한 을사당인을 배척하지 않았다면 현직에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구암은 처가로 인연이 있어 목천현의 잣밭에 우지한 것이 안동김씨 세거지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구암의 후손뿐 아니라 일가 족척도 많이 목천현으로 이주해 왔다.

구암은 생전의 행직은 낮았으나 증직은 보조공신 상락군에 봉해졌으며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이증직의 이유는 자제 충무공 김시민이 부원군에 봉해졌기에 그 부친을 상락군에 봉했으며 충무공이 의정부 좌의정에 증직되었기에 좌찬성에 증진된 것이기는 하나 구암이 충주 향사에 모셔진 것만으로도 증직의 요인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구암공이 학문이 높고 인품이 고결하므로 충주 선비들이 조정에 아뢰어 서원을 세우고 봉사(奉祀)한 것이다. 조선왕조시대에 서원이 남설 되었다고는 하나 향사에 모셔진 인물이면 사표가 될만한 인물인 것이다.

출전: 천안시 역사의향기(임명순)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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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구암공에 대한 해설을 이처럼 자세하게 밝힌 곳은 <천안시 역사의 향기> 한 곳 뿐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장송가는 제가 소장하고 있는 <상락가승>(필본. 유일본)에 유일하게 전하고 있는데 이곳에 적혀 있다니 놀랍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