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문집의 해제 (백곡 김득신) 관련자료
페이지 정보
김태영 작성일07-01-22 12:23 조회1,453회 댓글1건본문
1. 청구영언(靑丘永言)에서
≪靑丘永言≫은 1728년(영조 4)에 金天澤이 편찬한 시조집으로 모두 7종의 이본이 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본에 따라 제목이 ‘靑丘詠言‚ 靑邱永言‚ 靑丘咏言’과 같이 달리 표기되기도 할 뿐 아니라 내용에 있어서도 많은 차이가 있다. 규장각에는 이 중 3종의 이본이 소장되어 있는데 이중 가람본의<海東歌謠錄>(金壽長‚ 洪于海‚ 金得臣의 序 포함)과 기타의 내용이 9장가량 수록되어 있다.
2. 구당집 (久堂集)에서
박장원(朴長遠)1612-1671 (광해군4-현종12)字: 仲久‚ 號: 久堂‚ 本貫: 高靈
送金子公南歸序
1650년(효종 1) 춘천에 있을 때 金得臣(栢谷‚ 1604-1684)이 찾아와 며칠을 묵은 뒤 남쪽으로 떠나자 전송하는 글이다. 名勝보다 實勝을 좇는 것이 務實의 자세임을 강조하였다. 名實의 또 다른 예로 김득신이 詩‚ 古文‚ 학문에 능해도 사람들이 진면목을 모른다고 하였다.
送金汝重歸湖西序, 湖西로 돌아가는 金得臣의 아들 金天拄를 전송하는 글이다. 박장원의 謫所에 김득신이 아들을 보내자 환담하고 자질을 칭찬하였다.
晉山世藁續集序, 姜克誠(醉竹‚ 1526-1576)‚ 姜宗慶(梅墅‚ 1543-1580)‚ 姜晋暉(壺溪) 등 晉州 姜氏 3인의 시문집인 ≪晉山世藁續集≫의 서문이다. 후손 姜裕後가 속집을 간행했는데 박장원과 김득신이 산정했다.
挽詞, 朴長遠에 대한 挽詞이다. 金得臣외
3. 양와집 (養窩集)에서
이세구(李世龜)1646∼1700(인조24∼숙종26) 字: 壽翁, 號: 養窩, 本貫: 慶州
시(詩) 金得臣외
久堂語錄 朴長遠의 語錄. 빠르게 말하거나 얼굴색을 변하지 않고 단정한 태도를 유지하는 일상의 기거 동작, {心經}과 {近思錄}을 즐겨 읽고 모든 문자를 程朱의 말로 맺고 李植의 古文을 즐겨 들었다는 학문 경향, 어머니를 모시는 효성, 기질이 서로 달랐던 金得臣 등과의 교유 등에 대한 내용.
4. 남악집 (南岳集)에서
조종저(趙宗著)1631-1690 (인조 9-숙종 16)字: 褧叔‚ 號: 艮齋·南岳‚ 本貫: 漢陽
送栢谷金丈得臣序, 호남의 말직으로 부임하던 金得臣(1604-1684)을 송별하며 지은 글이다. 뛰어난 학문과 문장 및 독실하고 신의있는 성품에도 불구하고 중용되지 못하던 金得臣의 처지를 위로하고‚ 인재를 신중히 가려 쓰지 못하던 세태를 비판한 내용이다.
5. 낙재집 (樂齋集)에서
서사원(徐思遠)1550-1615 (명종5-광해군7)字: 行甫‚ 號: 彌樂齋·樂齋‚ 本貫: 達城
龜巖書院奉安文, 金得臣(1604-1684)이 淸安의 龜巖書院에 徐思遠이 제향될 때 쓴 奉安文이다.
6. 도곡집 (陶谷集)에서
이의현(李宜顯)1656년~1745년 (현종 10~영조 21) 字: 德哉, 號: 陶谷, 本貫: 龍仁
雲陽漫錄五十八則-附後識, 일종의 隨想錄으로서 1722년 6월부터 1725년 1월까지 3년 동안 雲山에서 유배생활 할 때에 기술하여 두었다가 1728년에 刪定한 것이다. 내용은 先親 世白의 言行, 士君子의 출처, 자신의 성격이나 생활태도, 六經에 근본을 둔 문장관, 柳成龍의 《懲毖錄》, 宗親의 정치 참여에 대한 문제, 《左傳》, 老莊, 宋詩, 先秦 學術, 古文, 春秋筆法, 明나라의 人物, 稗官小說, 閭巷俚語, 退溪의 《朱子書起擬》, 《栗谷續集》 등에 대한 기록과 鄭維岳․鄭琢․鄭仁弘․朴燁․金得臣․南翼龍․林悌․李安訥 등에 대한 인물평으로 이루어져 있다. 말미에 後識를 첨부하였다.
7. 기봉집 (騏峰集)에서
이시성(李時省)1598-1668 (선조31-현종9)字: 子三‚ 號: 騏峰‚ 本貫: 慶州
答永春李使君書, 李某(인명미상)에게 답장으로 보낸 편지. 자신을 포함하여 여러 사람의 글을 비교하여 평가하는 내용이다. 君平(鄭斗卿: 1597-1673)의 글에 대해서는 매우 淸節하여 옛 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고 하였고‚ 元九(洪錫箕: 1606-1680)의 글에 대해서는 호방하면서도 건강하고 넉넉하면서도 민첩하며 古今을 모두 섭렵하여 神妙함이 출중하다고 하였다. 兄의 글에 대해서는 明快하고 典重하며 구석구석까지 두루 통하고 있다고 하였으며‚ 자신의 글에 대해서는 단지 平順하고 궁핍함이 적을 뿐이라고 하였다. 그밖에 교유하는 사람들 중에 金子公(金得臣: 1604-1684)은 그 시가 精邁하여 세속의 때를 벗어난 것이 盛唐의 정기를 가지고 있고‚ 趙長吉(趙來陽)은 그 시가 청명하여 역시 盛唐의 正脈을 얻었다고 평하였다.
8. 지담집 (芷潭集)에서
신덕홍(申得洪)1608∼1653 (선조41∼효종 4) 字: 大吾, 號: 芷潭, 本貫: 高靈
遺事, 신득홍의 알려지지 않은 행적을 여러 문헌에서 찾아 수록한 글이다. 병자호란 때 산골로 피난 가 있는 동안 지은 시들이 蔡裕後(1599-1660), 金得臣(1604∼1684), 洪錫箕(1606∼1679) 등 당시의 명사들의 입에 회자되었고 수없이 차운되었다.
9. 모산유고 (慕山遺稿)에서
권 혜(權寭)1693~1747 (숙종 19~영조 23) 字: 周甫, 號: 慕山, 本貫: 安東
雜記, 영남 지역 여러 인사들의 행적을 기록한 글로, 모두 27편이다. 柳宜河, 鄭萬陽․葵陽 형제, 李士龍, 金時若, 愚伏 鄭經世(1563~1633), 玉川 趙德隣(1658~1737), 진사 許格, 張璶, 柏谷 金得臣(1604~1684), 도사 金命基, 溪巖 金坽(1577~1641), 修巖 柳袗(1582~1635) 등의 일화를 기록하였다 이 외에 李士龍, 金時若이 청군에게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절의를 지키다가 죽은 일등을 기록하였다.
10. 서계집 (西溪集)에서
박세당(朴世堂)1629~1703 (인조 7~숙종 29) 字: 季肯, 號: 西溪, 本官: 潘南
柏谷集序, 1687. 金得臣의 《柏谷集》에 대한 序. 三代에서 秦漢까지는 詩作이 寫意에 충실했는데 魏晉을 거쳐 唐代에 들어와 기교만을 추구하는 폐해가 심해졌고 五季 이후 元明에 들어와 詩道가 더욱 파괴되었는데, 김득신의 시는 형상하는 대상이 마치 눈앞에 있는 듯 眞體와 방불하여 감탄을 금치 못하겠다고 하였다.
11. 안곡집 (安谷集)에서
이중명(李重明)1605∼1672 (선조38∼현종13) 字: 子文, 號: 安谷, 本貫: 牙山
金栢谷得臣醉黙堂序, 저자의 벗인 김득신이 독서하고 글 짓던 醉黙堂에 대해 쓴 序이다. 김득신이 좋아한 것은 詩酒였고 삼간 것은 言語였으며, 하루 백 잔의 술을 마셔도 그 마음만은 취하지 않은 것이 고래가 온갖 물을 마셔도 그 뜻은 홀로 능히 깨어 있는 것과 같아서, 밖은 비록 술에 빠져 있어도 안은 실로 굳세고 정확했다고 하였다. 주변 好事者의 是非가 많아도 귀로는 듣고 입으로는 말하지 않는 것이 ‘黙’이라고 하여 취묵당의 ‘醉’와 ‘黙’의 의미에 대해 썼다
詩 與金得臣子公登驛樓, 金得臣 등의 挽詩
遺事 李子全, 柳益甫, 李堥, 金得臣, 李百完 등이 쓴 遺事이다
12. 구암집(龜巖集)에서
김충갑(金忠甲)1515-1575 (中宗10-宣祖8)字: 恕初‚ 號: 龜巖·梧竹散人‚ 本貫: 安東
年譜, 중종 10년(1515) 종남산 아래 鑄字洞에서 출생한 때부터 선조 8년(1575) 사망할 때까지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김충갑은 1543년(중종 38) 생진시에 급제하고‚ 1546년(명종 원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承文院 權知正字에 제수되었으나‚ 얼마 후 乙巳士禍(1547)에 연루되어 파출되고 이듬해 삭탈관작되어 청주에 유배되었고‚ 21년간 유배생활을 한 선조 즉위년(1568)에 유배에서 풀려 다시 사환하게 되었다. 이후 司諫院 正言‚ 工曹佐郞‚ 北道兵馬評事(이상 1568‚ 선조 즉위년)‚ 禮曹正郞‚ 兵曹正郞‚ 湖西救荒敬差官‚ 司憲府持平(이상 1569‚ 선조 원년)‚ 司諫院 正言‚ 獻納‚ 湖南監賑御使‚ 成均館 司藝‚ 司諫院 獻納‚ 司憲府 持平(이상 1569‚ 선조 2년)‚ 承文院 判校‚ 軍器寺 僉正‚ 賀至書狀官‚ 司憲府 持平(이상 1570‚ 선조 3년) 등을 역임하였고‚ 선조 4년(1571) 노모 봉양을 위해 安岳郡守로 나가 재직하던 중 선조 8년(1575) 사망하였다. 光州 金氏와의 사이에서 時晦를 낳았고‚ 광주 김씨 사후 결혼한 昌平 李氏와의 사이에 時覺‚ 時敏‚ 時進‚ 時若을 두었다. 연보 끝에는 임진왜란 때 순절한 弟 金悌甲(1525-1592)‚ 3子 金時敏(1554-1592)의 순절 경위와 孫 金緻(1577-1625)‚ 증손 金得臣(1604-1684)의 약력도 수록되어 있다.
13. 강파집 (江坡集)에서
권상임(權尙任)1622-1700 (광해군14-숙종26)字: 士重‚ 號: 江坡‚ 本貫: 安東
家狀, 權鳳興이 쓴 글로 그의 집안에 대한 소개‚ 유년 시절에 대한 기록과 교유 관계‚ 관직 생활 등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그와 교유한 사람으로는 편지를 주고 받은 사람을 제외하고 權大運·李玄逸·金泰基·金得臣·尹趾美 등이다.
14. 시화총림(詩話叢林)에서
홍만종(洪萬宗)1643-1725 본관은 豊山‚ 字는 于海‚ 號는 玄黙子‚ 長洲‚ 夢軒
권4에는 金得臣의 ≪終南叢志≫와 南龍翼의 ≪壺谷謾筆≫, 任埅의 ≪水村謾錄≫, 任璟의 ≪玄湖瑣談≫이 수록되어 있다.
15. 논시절구(論詩絶句)에서
조선후기 문신이자 書畵家인 紫霞 申緯(1769-1845)가 지은 七言絶句 聯作詩 <論詩絶句>와 <秋柳絶句>를 실은 책이다. 이 책에 수록된 시인으로는 金淨·白光勳·崔致遠·李達·鄭士龍·李山海·朴淳·鄭澈·權韠·陳澕·李奎報·李廷龜·李安訥·鄭斗卿·申欽·車天輅·權鞈·鄭礥·李睟光·李敏求·李好閔·成汝學·許蘭雪軒·金得臣·李植·金尙憲 등이 있다.
16. 소화시평(小華詩評)에서
조선후기 문인인 洪萬宗(1643-1725)이 상고 시대부터 저자 당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시를 정리하고 품평한 시화서이다. 洪萬宗은 字가 于海‚ 號가 玄黙子·長洲·夢軒이며‚ 일찍이 鄭斗卿에게 시를 배웠다. 평생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과 저술활동에 주력하였으며‚ 품평 및 박학다식으로 이름이 높았다.
金得臣(1604-1684)의 서문‚본문 첫 장에는 ‘東崖金震標‚ 栢谷金得臣‚ 晩洲洪錫箕‚ 宇文洪柱世 纂輯’이라 적혀 있는데‚ 이들은 서문을 쓴 사람들일 뿐 실제 편찬자가 아니다.
17. 연기신편(演機新編)에서
肅宗 때의 安命老가 陣法의 鼻祖라 일컫는 風后·握奇의 법을 推演하여 陣法을 논하고 여기에 兵書와 陰陽家의 諸法을 덧붙여 엮은 兵書이다. 상·중·하 3권 3책의 목판본으로 自序에 의하면 1660년(현종 1)에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1659년에 金得臣이 쓴 序文, 1660년(현종 1)에 著者 자신이 쓴 自敍가 실려있다.
18. 의열공지상(毅烈公誌狀)에서
壬亂 때 宣武의 功으로 衛聖功臣에 錄勳된 毅烈公 朴晋(1560-1597)의 誌狀으로‚ 1873년(高宗 10)에 朴淵會가 安陵에서 淸齋先生忠節錄을 刊印할 때 續刊된 책이며‚ 朴晋의 後裔인 章鎬와 淵興의 共編이다.
1613년(光海君 5)의 <賜祭文>에 이어 遺事로서 白沙 李恒福‚ 西崖 柳成龍(懲毖錄)‚ 錦溪君 朴東亮(壬辰錄)‚ 華隱 申炅(再造藩邦記)‚ 象村 申欽(咨宋經略)‚ 簡易 崔岦(提督主事再回帖)‚ 牛溪成渾‚ 松江 鄭澈‚ 栢谷 金得臣(朝天錄)‚ 松浦 鄭㷤(日錄)의 글에서 초록한 내용이 수록된다.
19. 대동시선(大東詩選)에서
"箕子朝鮮代부터 朝鮮代까지의 韓國人의 各體의 詩를 추린 詩集이다. 手寫本이나 序, 跋 등이 없어 편찬자나 연대를 알 수 없다. 대략 250여명의 詩 1,850여 首가 수록되었다
金得臣(1)
20. 후천선생집(朽淺先生集)에서
"黃宗海(1579·1642)의 詩文集. 아들 鵠立이 편집하고 族孫 燦이 1713년(肅宗 39)에 간행했다. 黃宗海의 자는 大進, 호는 朽淺, 본관은 懷德, 德休의 아들이다. 鄭逑의 문 인이며 金長生에게 禮學을 배웠다.
金得臣에게 보낸 書
21. 순오지(旬五志)에서
洪萬宗(1643-1725)이 민간에 流傳하던 詩話‚ 逸話 등을 기록한 책이다. 보름만에 완성하였다고 하여 ‘十五志’라고도 불리며‚ 1678년(숙종 4)에 저술되었다.
卷首에 金得臣(1604-1684)의 序文과 저자의 自序가 있어 저술경위를 살필 수 있다. 자서에 따르면 저자는 병으로 누워지내던 중 그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 평소에 들은 여러 가지 말과 민간에 떠도는 속담 등을 기록하였다고 한다.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 |
김항용 |
---|---|
작성일 |
김득신의 주요 자료목록이 한꺼번에 정리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