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사람들-유치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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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중 작성일07-02-08 14:50 조회1,460회 댓글0건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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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영남사람들 .54] 유치명 | ||||||||||||
인의와 실천의 가르침, 훗날 '애국의 횃불'로…
題字 : 토민 전진원
"생각해보면 우리 정조대왕께서는 정치를 담당한 지 20여년 동안 문무의 큰 정치를 수행하셨으니 우리 동방의 요순(堯舜)입니다. 그런데 장헌세자(莊獻世子: 思悼世子)의 존호(尊號)를 추념하여 올리는 일이 오늘날까지도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으니, 이것이 정조대왕의 뜻을 생각할 때 저도 모르게 매우 답답한 심정으로 서성거리는 까닭입니다."('승정원일기' 철종 6년 4월2일) 철종이 집권하고 있던 1855년 3월29일, 유치명(柳致明)은 정조(正祖)의 아버지 장헌세자의 추존을 주장하는 소를 올렸다. 노론의 후원으로 집권한 영조는 탕평정치를 표방했으나 영남 인사들이 중앙 정치에 참여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영남 남인들은 영조 집권기에 14년 동안 대리청정을 한 장헌세자에게 정치적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런데 1762년 세자가 노론 정국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뒤주에서 희생되고마는 전대미문의 정치적 사건, 이른바 임오화변(壬午禍變)이 발생하였다. 훗날 세자의 집권 때 정치적 재기를 기대했던 당시 남인이나 소론들은 허탈감에 빠졌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한 뒤에도 영남 유생들의 장헌세자에 대한 정은 애틋하였다. 그래서 정조 연간에는 장헌세자와 정조를 지지하는 영남 유생들의 만인소(萬人疏)가 올려졌고, 정조는 비명에 가신 아버지 장헌세자를 생각하며 영남 유생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하였다. 유치명은 장헌세자에 대한 정조의 마음과 영남의 정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유치명의 고조부 유관현(柳觀鉉)이 한때 시강원 필선(弼善)에 임명되어 장헌세자의 교육을 담당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집안 내력 때문에 유치명은 장헌세자가 태어난 '을묘년'을 맞이하여 장헌세자의 추존을 건의하는 상소를 올렸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노론의 공박을 받고, 결국 전라도 지도(智島)에 유배되어 6개월간 유배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상소를 계기로 영남에서의 유치명의 학문적, 정치적 위상은 더욱 높아져갔다. 정재(定齋) 유치명은 이상정(李象靖)의 외증손으로 정조 1년(1777) 10월13일에 안동 소호리(蘇湖里) 외가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태어나면서 전주 유씨 본가 뿐만 아니라 외가인 한산 이씨로부터도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이상정은 유치명의 증조부 유통원(柳通源)에게 편지를 보내 새로 태어난 아이의 골상이 비범하다고 하면서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축하하고, '치명(致明)'이라 이름 지어주었다. 유치명은 이듬해 5월에 어머니 한산 이씨의 등에 업혀 한들 본집으로 돌아와 성장하였다. 유치명은 열세 살부터 스무 살까지 집안의 큰 학자이자 이상정의 우뚝한 제자인 유장원(柳長源)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이어 서른세 살까지는 역시 이상정의 제자인 남한조(南漢朝)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이상정은 18세기 후반 영남을 대표하는 성리학자로 퇴계학을 집대성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그를 '소퇴계(小退溪)'라고 불렀다. 그가 살던 마을이 소호리여서 후세 사람들은 그의 학문을 '호학(湖學)'이라 명명하였다. 유치명은 두 스승인 유장원과 남한조로부터 이 '호학'을 전수해 발전시켜 나갔다. 유치명은 1805년(순조 5년) 문과에 급제한 이래, 고위 직급인 병조참판에까지 이르렀다. 그는 63세가 되던 1839년(헌종 5년) 겨울, 초산부사에 임명되었다. 초산은 고향 안동에서 1천800리나 떨어진 먼 지방이었다. 그는 추운 겨울 친척과 벗, 제자들의 전송을 받으며 노구를 이끌고 초산으로 향하였다. 초산부사로 재임하는 동안 그는 초산 백성들을 어린아이처럼 보살피고 가르쳤다. 그래서 '초산부모(楚山父母)'요 '관서부자(關西夫子)'라는 칭호를 그곳 백성들로부터 들었다. 그가 떠나올
그렇지만 그는 학자로서 명망이 더 높았다. 1846년 9월 유치명은 고산정사에 수백 명의 유생을 불러 모아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하였고, 이때 인(仁)·의(義)·예(禮)·지(智)에 대해 강론하였다. 그리고 1856년 11월 호계서원(虎溪書院)에서 수백 명의 유생들이 운집한 가운데 대규모 학술 모임을 개최했다. 이듬해 5월에는 유치명의 학덕을 기리는 만우정(晩愚亭)이 세워졌다. 이곳에서는 주로 이황과 이상정의 학문에 대한 활발한 학술 토론이 이루어졌다. 유치명은 자기 집 '정재(定齋)'와 정자 '만우정'을 중심으로 많은 제자를 길렀다. 그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은 학자들은 19세기 후반 영남에서 전개된 위정척사운동과 의병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김도화(金道和)와 권세연(權世淵)은 1895년 을미의병 때 의병대장으로 활동하였고, 김흥락(金興洛)과 유지호(柳止鎬)는 배후에서 의병 운동을 지원하고 있었다. 유치명은 1861년 10월6일 85세를 일기로 작고하였다. 이듬해 4월에 거행된 장사 때에는 경상도 전역에서 몰려온 900여명의 유림들이 애도를 표하였다. '소퇴계'라는 칭호를 듣던 이상정의 외증손자로 태어나 퇴계학과 '호학'을 충실히 계승한 유치명 서거 이후, 조선은 안팎으로 환란에 시달렸다. 안으로는 유생들의 학문 활동의 요람인 서원이 훼철되는 사건이 발생했는가 하면, 밖으로는 일본과 서구 열강의 침략에 직면해 있었던 것이다. 이제 유치명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은 많은 제자들은 자신들의 생활 근거지를 지키고, 일제와 서양 열강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내기 위해 위정척사운동과 의병운동을 줄기차게 전개하기 시작했다. 유치명의 제자들은 나라의 위기를 맞아 일신의 안위를 생각지 않고 애국적 운동에 매진했다. 스승으로부터 인의(仁義)에 대한 가르침과 실천적 삶에 대한 교육을 철저하게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호가 왜 '정재(定齋)'일까 "만물이 적재적소에 있어야 안정"…문중자제·제자들 '만우정'건립 도움 유치명은 호를 '정재(定齋)'라고 했다. 많고 많은 글자 중에 하필이면 정(定)자로 호를 정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임금은 어짊에, 신하는 공경에, 아버지는 자애로움에, 자식은 효도에, 그리고 붕우는 믿음에 각각 목표를 정해야 한다고 믿었다. 만물이 각기 적재적소에 있을 때에만 천하가 안정(定)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그는 자신이 거처하는 집을 '정재'라 명명했다. 한편 그는 만년에 박실 고개 너머 우암(愚巖)에 '만우정(晩愚亭)'을 지었다. 이 정자는 전주 유씨 문중 자제들과 그를 충실히 따랐던 제자들의 도움으로 건립되었다. 나이 80이 넘어서야 자신의 정자를 갖게 된 그는 주변 도연폭포와 약산의 아름다운 산수를 벗 삼아 만년을 보낼 생각을 가졌다. 이 만우정이 그의 만년 학문생활의 중심지가 되었고, 특히 1871년 호계서원 훼철 이후 안동 동부지역 유림의 구심점이 되었다. 19세기 영남을 대표하는 학자 유치명의 정신이 살아 숨쉬는 곳이 바로 '정재'요 '만우정'인 셈이다. '정재'와 '만우정'은 퇴계학의 충실한 계승자인 한 학자의 평생의 지향점을 잘 말해 준다. 그것은 개인과 가정의 안정, 사회와 국가의 안정, 더 나아가 천하의 안정이 중요하다는 점, 그리고 어지러운 세상에는 영리하게 살기보다는 그저 어리석게 사는 것이 곧 지혜로운 삶이라는 가르침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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