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사람들-이상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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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중 작성일07-02-08 14:53 조회1,334회 댓글0건본문
역사속의 영남사람들 .30] 이상룡 | ||||||||||||
"뭉치자" 독립운동 통합 앞장
"힘 길러 일제와의 전면전 승리해야"
망명지 서간도서 '독립전쟁론' 주창
이승만 하야후 최고지도자 되기도
34일간에 걸친 2천500리의 길고 긴 여정! 경북 안동에서 압록강 너머 서간도에 이르는 망명길은 참으로 형극의 길이자 고행의 연속이었다. 이상룡(李相龍)은 나라가 망한 경술년의 이듬해인 1911년 설을 쇠자마자 장도에 올랐다. 떠나기 전날인 2월2일 마을 잔치를 열어 친지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출발 당일 새벽에는 조상에게도 하직 인사를 드렸다. 그의 동생과 아들, 조카들을 비롯한 문중 인사들, 그리고 그의 매부와 사위도 그를 따랐다. 추풍령과 서울을 거쳐 신의주에 당도한 일행은 2월25일 마침내 압록강을 건넜다. 압록강을 넘으면서 나라 잃은 설움, 망명길의 고통, 그리고 조국 광복을 위한 일념을 담아 시 한 수를 읊조렸다. 삭풍은 칼보다 날카로와/ 나의 살을 에이는데 살은 깎이어도 오히려 참을 만하고/ 창자는 끊어져도 차라리 슬프지 않다 이미 내 집과 토지 다 빼앗고/ 내 처자도 넘보는데 이 머리 잘릴지언정/ 무릎 꿇어 종이 될 수는 없다 서간도에서의 이동 여정은 참으로 혹독했다. 살을 도려내는 듯한 모진 추위와 극심한 굶주림이 가장 큰 고통이었다. 만주 벌판을 거세게 몰아치는 눈보라에 갇혀 마차 안에서 뜬 눈으로 밤을 지새는가 하면, 식량이 없어 끼니를 거르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러한 고통 속에서 옛 고구려인의 기상을 담고 흐르는 혼강(渾江)을 따라 계속해서 북상한 끝에 3월7일 드디어 회인현(懷仁縣) 항도촌(恒道村)에 도착하게 되었다. 독립투사로서의 파란만장한 삶이 눈앞에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이상룡의 망명에는 처남 김대락(金大洛)을 최고 어른으로 한 내앞(川前)의 의성 김씨 문중, 황호(黃濩)를 원로로 하는 평해 사동리(沙銅里)의 평해 황씨 문중 인사들도 함께 했다. 이들의 일행은 수십 명에 달했다. 일행 가운데는 만삭이던 김대락의 손부(김창로의 처)와 손녀(황병일의 처)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의 망명 의지가 어떠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김대락의 손부와 손녀는 결국 망명지 항도촌에서 차례로 해산하게 된다. 안동이 낳은 독립운동계의 거목 이상룡은 자를 만초(萬初), 호를 석주(石洲)로, 고성을 본관으로 하는 안동의 명문 임청각(臨淸閣)의 종손으로 1858년(철종 9년) 법흥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종외조부 김흥락(金興洛)과 종고모부 김도화(金道和)와 같은 안동을 풍미한 당대 학자들의 문하를 출입하면서, 명가의 후예로서 그리고 정통 유학자로서 학문을 연마했다. 임청각에서 서책을 벗삼아 지내던 청년기는 그의 일생에서 가장 순탄했던 시기였다. 이상룡이 독립운동에 처음 투신한 것은 1894년 청일전쟁 이후 일어난 의병 투쟁 때였다. 그는 한 때 가야산을 근거지로 하여 대규모 항일전을 펼치고자, 거금 1만5천원을 군자금으로 투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패로 끝났고 그로서는 처음으로 깊은 좌절을 맛보게 되었다. 무장 투쟁의 한계를 절감한 그는 이후 새로운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계몽주의자로의 변신이 그것이었다. 때마침 유인식, 김동삼과 같은 안동지역 혁신 인사들이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세워 근대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에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계몽 운동에 적극 동참했다. 이후 그는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설립, 지회장으로서 애국 강연이나 회보 발간 등을 통한 자강 운동을 활발하게 펼쳐 나갔다. 그렇지만 1910년의 경술국치는 민족적 양심을 수호하려 노력한 그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이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조국 광복의 일념으로 국외 망명을 결행하게 되었다. 이상룡은 망명지 서간도의 한인 사회를 이끌면서 '독립전쟁론'을 실천하기 위한 갖가지 노력을 기울였다. 독립전쟁론이란, 우리 민족이 힘을 길러 일제와 전면전을 벌여 승리할 때에만 독립이 실현된다는 이론이었다. 해외 각지에 독립운동 근거지를 건설하는 일, 한인 사회를 영도할 자치 기구를 조직하는 일, 언론·교육을 통해 항일 민족
이상룡의 진면목은 무엇보다도 복잡다기한 독립운동 세력 간의 대동 단결을 위해 부단히 노력한 점에 있었다. 그는 1920년 초 베이징에서 조직된 군사통일촉성회에 참가하여 박용만 등과 함께 군사 기구의 통합을 협의했다. 22년에는 만주의 다양한 독립운동 세력을 통합하고자 통의부(統義府)를 조직했으며, 23년의 국민대표회의에서도 여러 운동 노선의 통합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노력 덕택에 그는 대통령 이승만이 탄핵당한 1925년 9월 이후 일시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임시 정부의 최고 책임자로 선임될 수 있었다. 내각책임제 형태인 국무령제 하의 초대 국무령(國務領)에 취임한 것이다. 그렇지만 여러 가지 난관에 봉착해 있던 임시 정부라는 제한된 공간 속에서, 자신의 이상과 포부를 실현하기에는 수많은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다. 이러한 난관들을 혼자의 힘으로 극복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그는 주저없이 임정의 국무령 직을 사임하고 만주로 되돌아갔다. 만주로 돌아간 이후에도 그는 그곳에서 다양한 독립운동 세력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일에 전심전력을 다했다. 그러나 지역과 인물에 따라 독립운동의 조건과 노선이 서로 다른 상황에서 전선의 통합과 통일은 실현이 불가능한 과제였다. 그는 이러한 문제점들의 해소라는 과제를 미완으로 남겨둔 채 결국 74세를 일기로 1932년 5월12일 지린성 서란현 소성자에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했다. 이은상은 1963년 대구 달성공원에 건립된 이상룡의 구국 기념비에서 '칼보다 날카로운 삭풍'같은 그의 투혼을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노래했다. 사직이 무너지자 압록강 울며 건너 찬 바람 만주벌에 흰머리 날리시며 한평생 조국광복을 꿈 속에도 비시더니 거기가 어디관대 그 땅에 묻히신고 그 소원 이룬 오늘, 님은 정작 안 계시네 혼을랑 돌아오소서 길이 여기곕소서 *토지 팔아 軍자금 사용 석주 집안은 영남 남인의 본거지로 소문난, 안동에서도 이름난 명문가였다. 퇴계학맥의 정통을 계승한 거유 서산 김흥락(西山 金興洛)은 부친 이승목(李承穆)의 외삼촌이었고, 또 척암 김도화(拓菴 金道和)는 부친의 고모부였다. 안동 의병장 권세연(權世淵)은 외삼촌이었으며, 내앞의 의성김씨 종손 김대락은 그의 처남이었다. 석주의 장래는 그만큼 보장되어 있었고, 인생을 향유할 수 있는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던 셈이다. 한편 석주 집안은 상당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인근 뿐만 아니라 멀리 예천까지도 토지가 분포했던 것으로 알려질 정도로, 그의 집안은 대지주였다. 그렇지만 석주 집안의 재산 대부분은 독립운동 자금으로 처분되었다. 석주는 가야산을 근거지로 대대적인 항일 의병을 일으키고자 계획했던 한말에 이미 1만5천원이라는 거금을 투입했을 뿐만 아니라, 망명 당시에도 많은 전답을 처분하여 서간도로 떠났다. 망명 이후에도 고향의 재산은 여러 차례에 걸쳐 매각되었다. 그는 1913년 아들 준형(濬衡)을 국내로 잠입시켜 그나마 남아 있던 가옥과 토지를 팔아 군자금을 마련할 정도였다. 2000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는 석주 집안의 고문서를 정리하여 '고문서집성'으로 간행한 바 있다. 이 자료에는 당시 석주 집안이 군자금 마련을 위해 노력했던 각고의 흔적들이 생생하게 배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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