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사람들-이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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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중 작성일07-02-08 14:54 조회1,531회 댓글0건본문
역사속의 영남사람들 .27] 이언적 | ||||||||||||
"벼슬이란, 임금 도와 태평성대 만드는 것"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1491∼1553)은 조선 전기 정치·사상사에서 자신의 성리학 이론을 숙성해 낸 첫 세대 학자이며, 동시에 이론의 정치적 실현을 위하여 일생 동안 노력한 인물이었다. 동시대의 서경덕(徐敬德)이 서민풍의 대표적인 재야 학자였다면, 이언적은 참여 정신에 투철한 관료 학자였다. 이언적은 조선 역사상 정치적 파란이 가장 심했던 시기인 16세기 사화기(士禍期)에 일생을 보냈다. 중종 9년(1514) 별시에 급제, 관직을 시작한 이언적은 당시 사회의 온갖 비리들은 왕권 중심의 공도 정치 실현을 통해서 개혁될 수 있다고 믿었다. 정통 성리학자답게 그는 참된 왕정 실현이 가능하리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벼슬길에 나아갔다. 그의 이러한 입장은 선배들인 기묘사림(己卯士林)과는 일정한 차이가 있다. 당시 훈구척신계(勳舊戚臣系)의 전횡으로 야기된 사회적 문제에 대해 사림파의 대응은 크게 두가지 방향으로 나타났다. 하나는 향촌 사회를 안정시키는 방도를 직접 강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성종때 김종직(金宗直)을 중심으로 한 향사례(鄕射禮)·향음주례(鄕飮酒禮)의 보급 운동으로 나타났고, 그 후 조광조(趙光祖)를 중심으로 한 기묘사림에 의해 향약(鄕約) 보급 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은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년)의 발발로 실패로 끝났다. 다른 하나는 중앙의 왕정을 바로 잡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연산군 대의 폭정을 경험하면서 구체화된 것으로, 천하의 모든 일은 임금의 마음에서 근본한다는 인식 아래 '대학(大學)'에 기초하여 군주를 성학(聖學)의 세계로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언적의 관심은 여기에 있었다. 이언적은 성학의 기초로 '소학(小學)'을 중시했지만, 치세(治世)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대학'에서 구했다. 21세 때인 중종 6년에 지은 '문진부(問津賦)'와 기묘사화 발발 2년 만에 국왕의 부름을 받고 이에 응하면서 지은 '이윤(伊尹)이 탕왕(湯王)에게 다섯 번 나아간 것을 논함'에서 그의 그러한 사상이 잘 드러난다. 즉 폭군 걸(桀)의 개과천선을 위해 나아가기를 멈추지 않은 이윤의 뜻을 새삼 헤아리면서, 이윤처럼 나의 군주를 요순(堯舜)이 되게 하고, 그 백성이 요순 시대와 같이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벼슬에 나아가는 도리라 믿었던 것이다. 이같은 그의 정치론은 여러 차례 국왕에게 개진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중종 34년(1539)에 작성한 '일강십목소(一綱十目疏)'였다. 중종이 "중국의 진덕수(眞德秀)도 이를 능가하지 못할 것"이라고 찬탄한 바 있는 이 상소에서, 그는 그간의 잘못된 정치는 국왕의 성학이 아직 지극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국왕의 학문적 성취에 가장 방해가 되는 요인으로 권간(權奸)과 궁금(宮禁)의 발호를 들고, 이들의 척결을 역설하였다. 이 상소는 '대학'에 본원을 두는 한편, 김안로(金安老)의 전횡에 휘말린 중종에 대한 엄격한 비판의 뜻을 담고 쓰여진 것이었다. 그는 김안로의 기용을 극력 반대하다가 파직되는가 하면, 천거과(薦擧科) 복설과 정치 기강의 쇄신과 같은 과감한 주장을 개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실천은 훈구척신계가 주도하는 현실 속에서 제대로 펼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명종 집권 초기 윤원형과 같은 척신들의 정국 운영에 정면으로 대응하기보다는, 군주가 공론에 입각하여 정국을 운영하도록 도와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훗날 인종이 되는 세자의 교육을 강조하고, 또 '소학언해본'을 간행하여 문정왕후(文定王后)와 국왕이 익혀야만 한다고 권면하였던 것이 그러한 사례이다. 이러한 그의 현실 인식은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년) 당시 사림파의 영수로서 훈척 세력에게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비판의 소지를 야기하기도 했다. 이언적은 사림파에 대한 척신계의 대대적인 탄압 국면에서 그것의 절차상의 잘못을 지적하고, 사림파가 인종에게 전심을 다한 것은 인신의 의리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들어 사화의 부당성을
훈구척신 주도의 정국 하에서 사림의 위학(爲學) 자세와 출처관은 일치하지 않았다. 이언적은 사림 정치의 이상 실현을 위해 노력한 이 시기 대표적인 관료 학자였지만, 김일손(金馹孫)·조광조 등과는 달리 온건한 자세를 끝까지 견지하였다. 그가 사화에 직면하여 처음부터 강경하게 대응하지 못한 것은 그의 온건한 성품 탓이지만, 설사 강경하게 대응했다손 치더라도 대세를 뒤집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실제로 사화기 그의 신중한 태도는 사림파의 피해를 축소시키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의 이러한 온건한 태도는 그가 이 시기 사림파의 영수였다는 점에서 일부 사림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정국에 대한 인식과 자세는 본질적으로 훈척 세력과는 양립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을사사화 직후인 명종 2년(1547)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이기·윤원형 등의 탄핵을 받아 함경도 강계로 유배가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언적은 유배지 강계에서 세상을 떠나는 명종 8년까지 6년여 동안 학문 연구에 주력하여 '구인록(求仁錄)'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와 같은 많은 중요한 저술을 남겼다. 그의 학문의 핵심은 주희(朱熹)의 주리론적 입장을 정통으로 확립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가 27∼28세 때에 조한보(曺漢輔)와 서신으로 문답한 '태극논변(太極論辨)'에서 이미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 논변은 훗날 이황(李滉)이 "우리 도의 본원을 밝히고 이단의 그릇된 주장을 물리쳤으며, 정미함을 꿰뚫고 상하를 관철하여 그 주장이 조금도 흠잡을 데 없이 바른 도(道)에서 나왔다"고 탄복한 탁월한 논문이었다. 이렇게 볼 때 그는 이미 청년기에 성리학 전반에 대해 깊이 이해를 하고 있었다. 이언적의 경학 연구에 있어서의 특징은 자주적·독창적이라는 점에 있다. 그는 주자의 설이라 할지라도 자기의 관점과 다를 경우 취하지 않았다. '대학장구보유'는 그 한 예이다. 그는 주자가 필생의 노력으로 편찬한 사서(四書) 주석서 가운데 하나인 '대학장구(大學章句)'를 자의대로 편차를 뜯어 고치고 새로운 해석을 내렸다. 이러한 활발한 저술 활동을 통해서 이언적은 경세가로서 뿐만 아니라 우주론·심성학(心性學) 등에서 자주적이고 독창적인 면모를 보인 16세기의 대표적인 철학자로 우뚝 서게 되었다. "방대한 저술…그에 짝할만한 사람 없어" ◇ 이황이 평가한 이언적 이황은 이언적의 행장을 쓰면서 그의 학문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선생은 따로 이어 받은 곳도 없이 스스로 이 학문에 힘써서 남모르는 사이에 날로 드러나고 덕행이 부합했으며 뚜렷이 문장으로 드러나고, 훌륭한 말을 후세에 남겼다. 이러한 분을 우리나라에서 구한다면 그에 짝할 만한 사람은 아마도 있지 않을 것이다."('퇴계집' 회재선생행장) 이황은 선배 학자인 조광조와 이언적의 행장을 쓰면서 학문적 저술이 없는 조광조에 대해서는 당혹감을 느낀 데 반해, 성리학에 관한 방대한 저술을 남긴 이언적에 대해서는 위와 같이 극찬하였다. 조선 왕조 사회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누렸던 퇴계 철학은 회재 철학을 기반으로 해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언적의 학문과 사상은 200여년이 지난 영·정조 대에 와서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특히 정조는 세손(世孫) 시절부터 '대학'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고 선현들의 관련 업적을 섭렵한 끝에, 이언적의 '대학장구보유'와 '속대학혹문(續大學或問)'을 높이 평가하여 존경의 뜻을 표시했다. 정조는 "(주자 이후) 후학으로 받들어 잇는 자들이 모두 반드시 주자의 견해를 얻은 것이 아니나, 선정(先正)의 '대학' 이해는 바로 주자를 선학(善學)했다고 할 수 있다"고 평했다. 정조는 옥산서원(玉山書院)에서 빌려온 '속대학혹문'을 돌려 보내면서, '회재 선생 속대학혹문의 서문에 제(題)하여'라는 글을 직접 지어 서원에 보관하게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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