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관성씨순례3.(사천김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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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2-05-16 17:43 조회1,729회 댓글0건본문
● 분관성씨순례Ⅲ.(사천김씨)
정의공휘부사적(貞義公諱阜事蹟 : 상기족보 pp87∼88)
---우리 사천김씨(泗川김씨)의 시조는 정의공(貞義公) 휘부(阜)이시다. 경순왕 13
세손 삼중광평장사상락군 휘묘(昴)의 아들은 지제교판도판서 제안이고 공은 손
자이시다. 부이신 휘제안공은 고려 공민왕조때 병부낭중으로 있으면서 형이신
직제학 대사헌(주: 대사성의 오기) 휘 구용(제영, 주 : 제민의 오기)과 같이 밀직
사 전녹생 포은 정몽주 박상충 이숭인 이존오 등과 같이 道義講磨(도의강마)하
시다.
---공민왕은 어려서부터 원제에 볼모가 되시다시피하여 이국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다가 노국대장공주(위왕의 딸)을 아내로 삼고 귀국하여 원제에 대한 원한
과 실망을 가슴깊이 품고 조국에 대한 연민과 애정을 간직하여 당당한 독립국
가로 국위를 떨치고 정방을 폐지하고 목은 이색을 이부시랑 겸 병무랑중의 벼
슬을 주어 문관 무관의 인사를 취급하게 하여 나라의 기강과 정사가 승승장구
하다 왕비가 해산하다 죽자 왕은 비통하여 인간무상함을 탄식하고 불사를 더욱
혹신하여 국재를 낭비하는 때에 요승 신돈이가 들어와 정사를 맡기니 나라는
점점더 쇠퇴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극도에 이르니 부 휘제안은 밀직사 김정(주 :
수안김씨로 분관) 유사의 등 교우 7인이 요승 신돈(辛旽)을 모주(謨誅 : 베어 죽
일 계획)하려다가 사세되어 장유(杖流)당하시다 화(禍)를 당하게 되자 공도 그
영향으로 사천으로 유배되시다.
---공은 신장다력하시고 천자중후하시며 소학다능하시니 선경지명이 있으시여
당시 호불황폐시키고 국가를 동요시키는 승려가 많으니 나라의 안위를 바로잡
기 위하여 도학의 정치를 하는 한편 무과를 숭상하면서 안민을 꾀하시다. 정사
년(丁巳年)에 이르러 왜군이 창란하니 공이 수군장군(水軍將軍)이 되어 의병을
일으켜 왜병을 패하게 하고 정벌하는데 크게 공을 세운 바 신돈이가 시중(侍
中)으로 불렀으나 사양하다 공양조(恭讓朝)에 이르러 사성대원군(泗城大院君)의
봉작(군?)받고 정의공이란 시호를 받았다. 그러므로 사천김씨 관적의 시조가 되
었다.
---공은 아들 평장사 휘사이(思 )와 행금부도사 증대사헌공 휘유무(有武)와 병
조판서 오매당(寤寐堂) 휘만서(晩緖)공 형제분의 손자를 두었다. 수관조께서는
해변으로부터 침범하는 적을 선멸하고 사천에 성을 축성하시어 왜군을 정벌한
성터가 지분(只分)도 보존되어 그당시 궁기를 보관한 궁사와 훈련장으로 사용
하든 궁터가 그 고을 선비들이 보수하여 사용되고 있으며 전해오는 후문에 의
하면 수관조께서는 선목치민하시고 효자효부에게는 상을 꼭 내리셨다 하시며
정의공대원군의 유적과 묘소선정사적비 등이 임진왜란 때에 왜병들이 수장 또
는 파괴해 버렸다는 구전뿐 공의 묘소나 유적비 등을 발굴치 못하고 현조에 대
한 숭조경모의 뜻을 받들고 추보하고자 서기 1984년 8월15일 전북 진안군 상전
면 수동리 77번지 선인산하에 초혼설단으로 년시향을 모시게 되었을 뿐이다.
《다음은 분관성씨순례Ⅳ 청주김씨편 입니다.》
▣ 김태서 - 글 감사드립니다.
▣ 김항용 -
▣ 김발용 -
▣ 김주회 - 감사합니다.
▣ 김태영 -
정의공휘부사적(貞義公諱阜事蹟 : 상기족보 pp87∼88)
---우리 사천김씨(泗川김씨)의 시조는 정의공(貞義公) 휘부(阜)이시다. 경순왕 13
세손 삼중광평장사상락군 휘묘(昴)의 아들은 지제교판도판서 제안이고 공은 손
자이시다. 부이신 휘제안공은 고려 공민왕조때 병부낭중으로 있으면서 형이신
직제학 대사헌(주: 대사성의 오기) 휘 구용(제영, 주 : 제민의 오기)과 같이 밀직
사 전녹생 포은 정몽주 박상충 이숭인 이존오 등과 같이 道義講磨(도의강마)하
시다.
---공민왕은 어려서부터 원제에 볼모가 되시다시피하여 이국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다가 노국대장공주(위왕의 딸)을 아내로 삼고 귀국하여 원제에 대한 원한
과 실망을 가슴깊이 품고 조국에 대한 연민과 애정을 간직하여 당당한 독립국
가로 국위를 떨치고 정방을 폐지하고 목은 이색을 이부시랑 겸 병무랑중의 벼
슬을 주어 문관 무관의 인사를 취급하게 하여 나라의 기강과 정사가 승승장구
하다 왕비가 해산하다 죽자 왕은 비통하여 인간무상함을 탄식하고 불사를 더욱
혹신하여 국재를 낭비하는 때에 요승 신돈이가 들어와 정사를 맡기니 나라는
점점더 쇠퇴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극도에 이르니 부 휘제안은 밀직사 김정(주 :
수안김씨로 분관) 유사의 등 교우 7인이 요승 신돈(辛旽)을 모주(謨誅 : 베어 죽
일 계획)하려다가 사세되어 장유(杖流)당하시다 화(禍)를 당하게 되자 공도 그
영향으로 사천으로 유배되시다.
---공은 신장다력하시고 천자중후하시며 소학다능하시니 선경지명이 있으시여
당시 호불황폐시키고 국가를 동요시키는 승려가 많으니 나라의 안위를 바로잡
기 위하여 도학의 정치를 하는 한편 무과를 숭상하면서 안민을 꾀하시다. 정사
년(丁巳年)에 이르러 왜군이 창란하니 공이 수군장군(水軍將軍)이 되어 의병을
일으켜 왜병을 패하게 하고 정벌하는데 크게 공을 세운 바 신돈이가 시중(侍
中)으로 불렀으나 사양하다 공양조(恭讓朝)에 이르러 사성대원군(泗城大院君)의
봉작(군?)받고 정의공이란 시호를 받았다. 그러므로 사천김씨 관적의 시조가 되
었다.
---공은 아들 평장사 휘사이(思 )와 행금부도사 증대사헌공 휘유무(有武)와 병
조판서 오매당(寤寐堂) 휘만서(晩緖)공 형제분의 손자를 두었다. 수관조께서는
해변으로부터 침범하는 적을 선멸하고 사천에 성을 축성하시어 왜군을 정벌한
성터가 지분(只分)도 보존되어 그당시 궁기를 보관한 궁사와 훈련장으로 사용
하든 궁터가 그 고을 선비들이 보수하여 사용되고 있으며 전해오는 후문에 의
하면 수관조께서는 선목치민하시고 효자효부에게는 상을 꼭 내리셨다 하시며
정의공대원군의 유적과 묘소선정사적비 등이 임진왜란 때에 왜병들이 수장 또
는 파괴해 버렸다는 구전뿐 공의 묘소나 유적비 등을 발굴치 못하고 현조에 대
한 숭조경모의 뜻을 받들고 추보하고자 서기 1984년 8월15일 전북 진안군 상전
면 수동리 77번지 선인산하에 초혼설단으로 년시향을 모시게 되었을 뿐이다.
《다음은 분관성씨순례Ⅳ 청주김씨편 입니다.》
▣ 김태서 - 글 감사드립니다.
▣ 김항용 -
▣ 김발용 -
▣ 김주회 - 감사합니다.
▣ 김태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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