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 사람들=류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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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중 작성일07-02-08 16:57 조회1,378회 댓글0건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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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영남사람들 .4] 서애 류성룡 | ||||
임진왜란의 와중에서 대북세력의 탄핵을 받아 영의정에서 물러난 류성룡 은 당시를 돌이킬 때마다 모멸감에 치를 떨곤 했다. 그가 왜적과 끝까지 항전할 생각은 않고 강화를 모색했다느니, 조선에 대한 명나라의 오해를 풀 기 위한 변무사(辨誣使)를 기피했다느니 하는 공격은 차라리 현실대응의 견 해차로 치부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언관들이 그가 안동 뿐만 아니라 단양·광주에 대규모의 농토를 매입했다고 모함하며 부정축재자로 몰아붙인 일은 참기 어려웠다. 그는 자신의 결백을 애써 항변하고 싶었지만, 평생 처신은 “항상 조용하고 묵묵하게 하여야 한다”는 좌우명으로 살아온 그 인 만큼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다. 대신 진실은 항상 밝혀지는 법이라는 말을 곱씹으며 혼자서 화를 삭였다. 그의 결백은 선조 34년(1601) 이항복 등의 추천으로 청백리(淸白吏)에 책록됨으로써 밝혀지게 되었다.
P류성룡은 21세 때 형 류운룡(柳雲龍)을 따라 도산서당으로 가 이황(李滉 )에게 처음 배웠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그는 뒤에 김성일(金誠一)과 함께 퇴계학파의 양대 산맥을 구축했다. 그가 학파 내부에서 서애계(西厓系)라는 독자적 계파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나름대로 확립한 차별화된 현 실인식과 대응방식이 크게 작용했다. 그는 당시 선배 조목(趙穆) 등 일련의 동문들이 ‘심학(心學)’의 탐구에만 매달리고 있는데 대해 못마땅하게 생 각했다. 물론 심학은 이황이 자신의 학문의 출발이라 표방했을 정도로 퇴계 학을 이해하는 필수적인 조건이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학문의 근원을 파악하는 단서일 뿐이라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여기에만 집착할 경우 자칫 원론에 치우쳐 현실적용에서의 유용한 측면을 간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P류성룡은 그 대안으로 ‘사학(思學)’을 제시했다. 생각[思]은 마음[心]의 밭[田]을 가는 것이다. 농부는 마음만 먹는다고 경작할 수 있는 것이 아 니다. 또한 농토만 경작한다고 수확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을 복합 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생각이다. 마음이 가슴이라면 생각은 머리 다. 가슴은 생명을 보장하지만, 머리는 손발을 필요에 따라 움직이게 한다. 가슴이 정적(靜的)이라면 생각은 동적(動的)이다. P요컨대 그의 ‘사학’은 바로 퇴계학의 근원의 천착에서 한걸음 더 나 아가 현실적용을 지향하고 있는 셈이었다. 현실적이고 실용적이며 합리적인 경세가로서의 그의 면모는 여기에서 확립되었다. 이황도 마음을 구하여 체험 해서 얻는 것이 생각이요, 가슴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는 마음을 바르게 드러내 밝히는 것이 생각이라 설명한 바가 있다. 따라서 조목이나 류성룡 은 다같이 스승의 학문세계를 충실히 계승한 제자였지만, 원론적 ‘심학’과 실용적 ‘사학’의 관점에서 추구하는 방향은 각기 달랐던 것이다. P류성룡은 온후하면서도 의연하여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기상을 갖추고, 엄하면서도 친근감을 숨기지 않는 등 전반적으로 온유한 풍모를 보였다고 한다. 그는 선악의 분별에 분명하면서도 극단적 언동을 자제했으며, 남의 잘못을 보고도 오히려 포용하려 노력했다. 이같은 그의 자세가 실용적이면 서도 합리적인 현실대응 자세를 형성하는 배경이 되었다. 특히 그는 중국 주나라의 신하가 되기를 거부하고 수양산에서 굶어 죽은 백이(伯夷)·숙제(叔齊)의 행위가 반드시 옳은 것만은 아니었다며 경직된 현실대응 자세를 비판 하기도 했다. P류성룡이 관직에 있을 동안 사림세력은 척신(戚臣) 정치의 잔재청산 방 법을 둘러싸고 강·온의 입장차를 보이며 대립하다결국 동인(東人)·서인(西人)의 붕당을 형성하며 분열했다. 그는 과거청산에 적극적인 동인에 속했지 만 척신뿐만 아니라 개혁에 미온적인 서인세력까지 싸잡아 소인으로 몰아붙 이는 강경론자들의 처사에는 동조하지 않았다. 거기에는 서인을 정계에서 축 출하고 동인의 배타적 독점 권력을 추구하려는 속셈이 엿보이기도 했기 때 문이다. 그러면 서인이 반발할 것이고 결국에는 정치적 파탄이 초래될 것은 뻔한 일이었다. 선조 22년(1589)의 기축옥사(己丑獄事)는 그렇게 해서 일어 났다. P대신 그는 동인·서인 가운데 소인은 배제하고 군자들만 상호 발탁하여 조제(調劑)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래야 정치적 건전성뿐만 아니라 정치세 력의 공존과 견제가 보장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른바 탕평책(蕩平策)을 제 기한 것이다. 이는 합리성과 실용성을 추구하는 그의 사학의 산물이기도 했 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오히려 강경론자들의 반발을 사 동인이 다시 남인 (南人)·북인(北人)으로 분화하는 촉매가 되고 말았다. P그의 공존을 지향하는 타협적 자세는 북인들이 임진왜란 당시 그를 “ 강화를 주장해 나라를 잘못 이끌었다(主和誤國)”고 몰아붙여 실각하도록 하 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물론 국난극복을 위해서는 죽음을 무릅쓰고 적과 싸우는 충의지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7년간이나 계속된 전란으로 국가가 파탄의 지경에 이르고 백성이 도탄에 빠진 상황이라면 전쟁만을 고집할 수 없는 노릇이다. 더구나 국가경영과 함께 전쟁수행의 책임을 진 영의정의 위치에 있다면 그것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P이러한 점에서 어쩌면 그는 충·역의 이분법적 논리만 지배해온 우리 역사의 또 다른 희생자인지도 모른다. 명실상부한 부국강병을 위해 이순신( 李舜臣)과 권율(權慄) 등 숱한 인재를 조정에 천거했던 그의 선견지명이나,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북인이 몰락한 뒤 서인과 공존 및 견제체제를 유 지한 남인의 생명력을 제공한 그의 정치철학의 합리성, 은퇴한 뒤에도 굶주 린 백성들의 처지를 함께 실감했던 그의 보국안민의 자세는 모두 역사의 뒤안길에 묻힌 채 말이다. P河上傳家 只墨庄 강기슭 집안에 전해오는 것은 서책뿐이고 兒孫疏려 不充腸 어린 손자는 나물밥으로도 배를 채우지 못하네 如何將相 三千日 어찌해서 오랫동안 정승 지위에 있었으면서도 倂缺成都 八百桑 후손에게 물려줄 재산조차 마련하지 못했든가 P정경세(鄭經世)가 관직에서 은퇴한 스승 류성룡을 찾아갔다가 손자와 마 루에 앉아 저녁을 먹는 선생의 모습을 보고 지은 시다. 이 시 내용의 사 실여부가 근래에 들어와 학계에 종종 논란의 대상이 되곤 한다. 의문을 제 기하는 측은 아무려면 정승이 받는 국록이 얼만데 영의정으로만 6년 남짓 재직한 사람이 그렇게 곤궁하게 살 수 있느냐는 것이다. 더구나 그가 상속 받은 재산만 해도 노비가 26명에 농토도 200마지기가 훨씬 넘었는데 말이다 . 그러니 류성룡이 죽을 먹으며 빈곤하게 살았다는 것은 과장이라는 주장이 다. P그러나 이러한 의문은 당시가 임진왜란 직후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쉽게 풀린다. 너나없이 굶주리고 있는 판국에 류성룡의 곳간이 찰리가 없다. 노비도 식솔이다. 그들도 먹여 살려야 한다. 누구에게나 산해진미는 그림 의 떡일 수밖에 없다. 정승을 지낸 류성룡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할아버지 와 밥상을 함께 했던 손자 류원지(柳元之)는 어릴 적 배고픈 기억을 그의 어머니의 고생에 투영해 회상하기도 했다. 백성과 배고픔을 함께 한 할아 버지의 모습을 되새기면서…. /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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