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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사람들-김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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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중 작성일07-02-08 16:58 조회1,57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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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30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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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영남사람들 .5] 학봉 김성일

역사에 웬만큼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도 김성일(鶴峰 金誠一, 1538~1593) 이 임진왜란 당시 경상도 의병 활동의 총감독이자 연출자였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김성일은 임진왜란 직전에 왜국의 사정을 살피기 위해 통신사 부사(副使)로 파견되었다가 돌아와, 정사(正使)인 황윤길 과는 달리 왜적의 침략 가능성을 부인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보고와 는 달리 곧이어 왜적은 대거 침략해 왔고, 경상도의 여러 고을은 순식간에 무너졌으며, 국왕 선조는 의주를 향해 기약없는 피란길에 올라야 하는, 그야말로 조선왕조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를 잘 알고 있다. 아니, 이것만을 알 뿐이다.

김성일은 왜적의 침략과 더불어 경상도 초유사(招諭使)로 급파된다. 말하 자면 경상도에서 왜적을 방어하는 총책임을 떠맡은 셈이다. 그는 임지에서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는 한편 뜻있는 선비와 백성들에게 창의(倡義)의 대열 에 나설 수 있게 격려하고 지원하였다. 경상도에서의 임란 의병은 여기서 시작된다. 그러나 의병 활동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것은 왜적과의 싸움이 아니라 지방 수령들의 방해 때문이었다. 이들은 왜적의 침략에 싸우 지도 않고 도망하였다가 의병들이 공을 세우자 이를 가로채고 심지어는 역 적으로 보고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수령의 방해는 의병활동을 위축시키거나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하였다.

이러한 사정에도 불구하고 경상도 의병은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래서 우리는 의병을 임란 극복의 주역으로 첫손꼽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 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을까. 임진왜란이라는 역사 무대 위의 주연과 조연은 분명 의병과 관군들이었지만, 이들은 상호 협력하기보다는 대립·갈등 하고 있었다. 이들을 국난 극복의 주역으로 이끈 이가 바로 김성일이었다. 그는 의병진에 군량과 무기를 지원함은 물론 지방 수령들의 방해를 막아 주고, 나아가서는 갈등과 대립을 상호 협력하는 관계로 이끌어 나갔다. 이 로써 관군을 조연의 자리에만 머물게 하지도 않았고, 의병활동을 개별 분산 적인 것으로 방치해 두지도 않았다.

김성일은 지리산에 도망해 있던 판관 김시민에게 진주성의 전략적인 중 요성을 깨우쳐주고 죽음으로써 지킬 것을 명하였고, 곽재우·정인홍·김면 등 의 의병부대를 의령·합천·거창 등지에 포진시키고, 이정(李瀞)에게는 적진 쪽으로 나아가 함안에 전초기지를 구축하게 하였다. 이러한 그의 조치로 경 상도의 의병과 관군은 진주성에서의 1차대첩을 이끌어 낼 수 있었고, 낙동 강과 그 서쪽을 굳게 지킬 수 있었다. 이것은 왜적의 보급로 차단과 호남 진출을 좌절시킴과 동시에 이순신의 해상활동을 측면에서 지원한 것이기도 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연출자와 감독으로서의 그의 진면목을 보게 된다.

김성일은 왜적과의 항쟁이 치열하던 계사년(1593) 5월29일 진주 공관에서 아들 혁(奕)과 함께 전염병으로 별세하였다. 난이 평정된 뒤 그에게는 선무 원종공신 1등과 이조참판이 추증되고, 숙종 연간에는 이조판서와 문충(文忠) 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많은 사람들이 김성일의 이러한 임란 공적에는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 지만, 이른바 ‘거짓 보고’에 대해서는 맹목적으로 집착하고 있다. 따라서 이를 회피하고서는 그를 제대로 이야기할 수도 없다. 김성일이 왜적의 침 략 가능성을 부인하였던 것은 결과적으로 틀린 것이었다. 이를 두고 후대의 평가는 분분하다. 왜국의 실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우활(迂闊)함으로, 혹은 당파심에만 급급하였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 나지 않는다. 자칫 나라가 망할 뻔 했다는 패전의 책임론까지 거론된다. 이것은 이이(李珥)의 소위 ‘십만양병설’이라는 것과 뚜렷이 대비되면서 더 욱 증폭되었다.

우리는 많은 문제를 ‘당파싸움’으로 치부해 버린 채 역사적 진실에 대해서는 애써 외면해 왔다. 이 같은 역사 이해를 당쟁사관이라 할 수 있 다. 아무튼 우리는 여기에 오랫동안 길들여져 왔다. 그러나 조금만 논리적 으로 따져 보면 이 같은 인식이 얼마나 허황된 모순인지를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이제 이렇게 간단하게 반문해 보자.

김성일 또한 황윤길과 함께 왜적의 침략을 이구동성으로 떠들었다면, 어 떻게 되었을까. 우리의 상상대로 침략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을까. 오늘날 우리는 ‘전쟁’이라는 말 한마디에 벌컥 뒤집히는 세상에 살고 있 다. 그런데도 당시의 우리 선조들은 가렴주구를 일삼던 지배층을 믿고 한 치 오차도 없이 완벽한 전쟁 준비를 하였을 것으로 굳게 믿고 있다. 우리 가 오랫동안 배우고 익혔던 ‘충성’ 교육은 이를 큰 무리 없이 받아들이 게 한다. 그러나 이것은 진실이 아니다.

왜적이 쳐들어오기 전에 이미 많은 백성들은 제도의 문란과 관리들의 부정부패로 말미암아 유리걸식하는 상황이었다. 이미 이보다 훨씬 이전에 이 황(李滉)은 이것이 장차 나라가 망하는 화근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었 다. 이 같은 상황에서도 전쟁에 대한 준비가 가능했을까. 그것은 오직 백 성들을 혹사하는 일일 뿐이었다. 또 이로써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김성일은 정사 황윤길의 말이 너무 지나쳐 왜 적이 이르기도 전에 백성이 먼저 무너져 버릴 것을 우려하였다. 유성룡의 ‘징비록’에도, 이항복의 ‘당후일기’에도 그렇게 기술되어 있다. 아무튼 그의 이 같은 우려는 왜적의 침략과 더불어 현실로 나타났다.

더욱 중요한 것은 왜적의 침략에 대한 대비가 없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순신의 거북선도 그러하고,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한 대대적인 축성( 築城)과 병기(兵器) 수리가 그것을 증명해준다. 김성일은 이를 비판하면서 진정한 대비책은 민심을 얻는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국왕 선조 또한 무리한 전쟁 준비가 도리어 국력을 약화시키고 백성의 원성만을 초래하여 왜적과 의 싸움에 패배를 자초한 것이라고 자책하고 있었다. 임란 초기 관군의 일 방적인 패배는 바로 ‘민심’을 크게 잃었기 때문이었다. 민심을 잃고 무엇 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더구나 주연과 조연이 갈등하고 있는 오늘날의 역 사무대는 김성일과 같은 연출자와 감독을 더욱 절실하게 필요로 한다. 오늘 의 위정자들이여, 깊이 새길지어다. 정진영동명정보대학교 교수

*중국의 역사왜곡, 조목조목 비판의 글(저서 '해차록')

김성일의 저서 중에 ‘해차록(海차(木+差)錄)’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 은 임진왜란 2년 전인 1590년 통신사로 일본에 건너가 활동하던 7개월 동 안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 이 가운데는 중국 명나라 ‘대명일통지(大明一統 志)’의 우리나라 역사와 문화에 대한 기사를 조목조목 비판한 부분도 있다 . ‘대명일통지’는 중국 중심의 세계관 속에서 우리를 그들의 주변국으로 다루어 놓은 것이니, 무성의함은 물론이고 오류와 왜곡으로 점철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학자들은 왕조의 건국과정에 대한 긍정적인 기사에 만족하여 풍속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문제삼지 않았다. 그런데 일본의 종진(宗陳)이라는 학자가 김성일에게 ‘대명일통지’ 속의 조선관계 기사에 대해 질문을 했다. 그는 잘못된 부분을 일일이 지적해 주고 이를 기록해 두었다.

‘대명일통지’에는 조선은 주나라 기자가 세운 나라며,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할 때 그 지배에 들어갔으며, 위만과 한사군(漢四郡), 그리고 위진(魏 晉)을 거친 이후에야 고구려 땅이 되었으며, 이 역시 당이 쳐서 빼앗았다 는 등의 내용으로 전개된다. 김성일은 여기에 대해 이미 요 임금과 같은 시기에 나라를 세운 단군조선이 있었고, 진시황의 시대에는 결코 그 지배 하에 들어간 사실이 없으며, 위만과 한사군은 우리 영토의 일부에 불과하였 고, 당은 우여곡절 끝에 고구려의 평양성을 함락했으나 끝내 그 영토를 차 지하지 못하였음을 힘주어 역설하고 있다.

오늘날 중국의 ‘고구려사’ 약탈이 문제가 되고 있다. 그러나 ‘대명일 통지’는 왜곡에도 불구하고 고구려가 엄연히 중국이나 그 속국이 아님을 보여준다. 21세기는 문화의 시대라 한다. 이러한 시대에는 영토보다 역사의 약탈이 훨씬 더 매력적이다. 역사 전쟁은 앞으로 더 빈번해질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기에 대한 대비가 없다. 또 다시 누군가를 희생양삼아 우리 모두의 책임을 회피해 버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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