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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사람들-이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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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중 작성일07-02-08 16:59 조회1,47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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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30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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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영남사람들 .2] 퇴계 이황

김종석<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 writer_icon.gif기자가 쓴 기사 더보기

“마음을편안하고 고요하며 담박하게(恬靜苦淡)” 이 말은 퇴계가 맏아들 준(寯)이 집경전 참봉이 되어 벼슬살이를 하고 있을 때, 그에게 주었던 목민관의 마음가짐에 관한 말이다.

P준은 녹봉 가운데 쓰고 남은 것을 가지고 몇 가지 물건을 사서 아버지에게 보내 드렸다.

P이것을 받은 퇴계는 아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P“관아라는 곳이 본래 빠듯하여 지급받은 녹봉이나 식물(食物)이 남는다 해도 결코 많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이렇듯 물건을 사서 나에게 보냈으니 마음이 매우 편치 못하다. 사소한 것이라도 물건을 보내는 것은 벼슬하는 사람의 도리가 아니다. 이것이 습관이 되면 후일 수습하기 어려울까 두렵구나.”

P퇴계가 특히 경계한 것은 국록을 먹는 공직자의 부정이었다.

P공직자의 부정은,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통합을 지향하는 국민의 희망과 기대심리를 일시에 와해시킨다는 점에서 심각한 것이다.

P퇴계는 공직자가 부정을 저지르는 가장 큰 원인을 부모와 처자식에 대한 분별없는 사랑 때문으로 보았다.

P사랑 자체는 선한 것이지만 분별없는 사랑은 사회에 대한 심각한 악이 될 수도 있다.

P따라서 그는 아들 준에게 이 점을 누누이 강조했다.

P공직자가 가족에 대한 이기적인 사랑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 그것을 퇴계는 염정한 마음가짐과 담박한 생활 태도라고 일렀다.

P퇴계 이황(退溪 李滉:1501∼70)은 경상도 예안현 온혜리에서 아버지 이식(李埴)과 어머니 춘천 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P이식의 전처 의성 김씨와 후처 춘천 박씨 사이에서 태어난 7남1녀 가운데 막내로서, 특별한 스승없이 삼촌 이우(李?)와 모친 박씨의 독려 속에서 가학(家學)을 이었다.

P퇴계는 34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한 초기에는 임금의 부름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벼슬에 나아가는 편이었다.

P그러나 후기에는 부름이 있어도 사양하였으며 비록 나아가더라도 오래 머물러 있지 않았다.p 후학들은 그의 이러한 자세를 “나아가기는 어럽고 물러나기는 쉽다(難進易退)”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P퇴계는 벼슬살이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았다.

P오히려 “만약 홀로 선(善)을 지키고자 세상을 잊는다면 하늘의 이치를 누가 밝히며 사람의 도리는 누가 바로잡겠는가”라고 하여, 입신출세를 일부러 회피할 필요는 없다고 보았다.

P실제로 그는 작고할 때까지 약 90종의 관직에 140여 회에 걸쳐 임명되었다는 통계가 있다.

P

Pp 그러나 중년 이후의 정치 현실은 윤원형, 이기 등 노회한 무리가 조정을 장악하고 있어서 정치적 이상을 실현시킬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P친형 해(瀣)와 장인 권질(權 )을 비롯한 가까운 사람들이 정치적 희생물이 되어 비명에 죽었으며, 그의 온건한 성격이나 병약한 체질도 벼슬살이에서 마음이 멀어지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P이러한 우여곡절 속에서 퇴계는 자신이 여생을 바쳐 힘써야 할 과업은 바로 제자를 기르고 학문을 강론하는 데 있다고 판단하였다.

P그리고 여생을 시종일관 “나아가기는 어렵고 물러나기는 쉬운” 학자의 길을 걸었다.

P따라서 퇴계에 대한 역사의 평가도 조선 성리학을 집대성하고 영남유학의 방향을 설정한 학자로서의 업적에서 그 의미를 찾는 것이 보통이다.

P실제 퇴계가 관직에 머물렀던 기간은 결코 짧지 않았고, 왜국 사신을 물리치지 말 것을 청하는 상소나 무진년에 올리는 여섯 조목의 상소와 같은 뛰어난 정치 감각을보여주는 글도 적지 않다.

P그렇지만 대개는 퇴계를 정치가보다는 학자와 교육자로서 기억한다.

P퇴계가 제자를 기르고 학문을 강론하는 삶을 살기로 확실하게 마음먹은 시점은 풍기군수 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온 50세 되던 해였다.

P이후 많은 문인학자들이 그의 문하에 모여들어 도학과 문장을 논하였으니, 조선중기 유학계의 중요한 학술적 단서가 이로써 형성되었고 지금까지 전해오는 수많은 일화와 미담이 이로써 생겨났다.

P그 가운데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전라도 광주 출신으로 26세 연하의 선비 고봉 기대승(高峯 奇大升:1527∼72)과의 성리논쟁이다.

P퇴계가 59세 되던 해에 시작되어 8년간에 걸쳐 계속된 이 학술논쟁을 통상 ‘사칠논쟁’이라고 부른다.

P좀 어려운 말로 표현하면 인간에게 순수한 도덕적 품성(四端)과 인간적 감정(七情)이 어떤 관계에 있으며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관한 고도의 철학적 논쟁이다.

P이 논쟁은 또한 인간을 순수한 도덕 실천자로 볼 것인가, 아니면 인간적 감정의 소유자로 볼 것인가 하는 인간관의 문제이기도 했다.

P이 논쟁을 통하여 사단칠정 이외에도 주요 철학적 주제들이 두루 언급됨으로써 이후 한국 성리학의 전개와 흐름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P그런 점에서 사칠논쟁을 한국학술사에 있어서 최대의 논쟁이라고 부른다.

P두 사람 간에 오갔던 토론의 내용은 ‘양선생왕복서’라는 이름으로 책 한 권 분량으로 남아있다.

P사칠논쟁의 의의는 논쟁하는 자세에서 모범을 보였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의가 있다.

P퇴계와 고봉은 흔들림 없이 주관을 견지하였지만, 논쟁이 가열되면 될수록 더욱더 상대방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자세를 잃지 않았다.

P그 결과 논쟁을 진행하면서 두 사람은 나이 차이를 잊고 인간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서로를 깊이 인정하고 신뢰하게 되었다.

P그렇기 때문에 국왕 선조가 퇴계에게 유능한 인재를 추천하라고 했을 때, 그는 고향의 수많은 제자를 제쳐두고 기대승을 첫번째로 천거했던 것이다.

P퇴계는 제자들에게 꾸준히 공부할 것을 주문하였다.

P자신도 34세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니 빠른 편이 아니었다.

P그는 천성적으로 성실하게 공부하는 스타일이었다.

P공부할 때도 양반다리를 하고 앉는 것보다는 꿇어앉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P그렇기 때문에 단번에 익히려고 하거나 애쓰지 않고도 알 수 있다고 하는 학설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었다.

P당시 중국과 조선에서 한창 주목을 받고 있던 왕양명(王陽明)의 ‘지행합일설’을 퇴계가 강력하게 비판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P퇴계의 제자들은 향리인 예안과 안동을 중심으로 서울, 경남, 호남, 호서 등 전국에서 모여들었다.

P이처럼 그는 생존시에 거국적인 존경을 받았으며, 동서 분당 이전에 생애를 마쳤다.

P따라서 이른바 ‘영남학파의 영수’라는 칭호는 엄격히 말하면 그가 죽은 후에 벌어진 정치적 상황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P이러한 거국적 존경은 높은 학문적 성취뿐만 아니라 스스로 스승으로 자처하지 않았던 겸손하고 원만한 인품에서 기인한 것이다.

P우리는 사칠논쟁이 한창이던 때 기대승에게 했던 다음 말에서 그의 이러한 면모를 살필 수 있다.

P“진정한 강함과 진정한 용기는 굳센 기운이나 억지 주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잘못을 고침에 인색하지 아니하고 옳은 말을 들으면 즉시 승복함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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