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제사공(휘 永綬) 경상지역 유적 답사기_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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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식, 발용 작성일07-02-15 05:42 조회1,528회 댓글3건본문
통제사공(휘 永綬) 경상지역 유적 답사기_1
◆일시 : 2007년 2월 2일~4일
◆장소 : 경북 포항시 흥해읍, 경남 마산시, 통영시 일원
◆참석 : 발용, 태영, 항용, 윤식(무순, 경칭 생략)
이번 답사는 추후 본격적인 통제사공 유적지 답사를 위한 사전조사 성격으로 추진되었습니다.
잘못된 내용은 바로잡아 주시기 바라며, 후속작업을 위해 경어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혜량해 주시기 바랍니다.
남자의 눈물
흐르는 눈물을 닦자마자 또 눈가가 흥건하다. 2006년 10월 28일, 경기도 파주시 방축리 옥동(玉洞),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경북 흥해(興海)에 거주하는 이정업(李正業 : 우계이씨) 선생이 눈물을 닦는다. 245년에 걸친 숭모(崇慕)의 정(情)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 소리없이 솟아나고 있었다.
선업(善業)은 다시 선(善)을 낳으니, 천리만리 머나먼 길이건만 245년 전의 아름다운 인연이 노년(老年)의 흥해인(興海人) 발길을 다시 통제사공 무덤으로 이끌었으리라. 사위가 운전하는 차로 한달음에 달려와 참배를 마치고 나니 초라한 통제사공(휘 영수)의 묘소가 눈에서 떠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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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제사공 묘소 | ▲ 통제사공 묘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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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계인(羽溪人) 이정업(李正業) 선생 | ||||||||
통제사공(휘 영수) 할아버지께서는 46세인 1761년(영조 37년 신사년)에 경북 포항시 흥해읍의 군수로 부임하셨다. 본디 흥해는 동해안에서는 땅이 너르고 비옥하기로 손꼽혔으나, 농사철에는 물이 부족하고 여름철이면 곡강천이 범람해 논밭을 휩쓸어 버려 고을 사람들의 큰 걱정거리였다.
백성이 잘 살고 그들의 근심 걱정이 없어야 나라가 부강한 법. 통제사공께서는 부임 이듬해인 1762년 흥해 곳곳에 저수지를 만들기 시작, 단 1년 만에 태평보(太平洑) 등 무려 11개의 보를 쌓아 흥해읍의 현안을 일거에 해결하셨다. 그 해 내내 통제사공께서는 옷가지와 신발을 공사현장 인근에 가져다 놓고 새벽 일찍 공사장에 나갔다가 별을 보고 들어오셨다. 흥해 읍민에게서 단 한푼의 기부금도 걷지 않고 오로지 현전(縣錢)으로 부지런한 자에게는 상을 주고, 일꾼들에게 술과 쇠고기를 먹였으니 그 누가 따르지 않으랴. 전장터에 비하면 용장 밑에 약졸 없는 경우와 마찬가지리라.
11개의 보 덕분에 생산량이 대폭 늘어나 풍년가가 울려퍼지자 통제사공께서는 태평들에서 물세 100석을 거두어 궁핍한 백성을 구하셨다. 그뿐인가. 따로 10석을 떼어내 민폐를 끼친 자에게도 고루 혜택을 주셨으니, 죄 지은 자까지도 진심으로 뉘우치게 만드셨다. 이런 모든 일은 흥해구제기적비(興海九堤紀績碑)에 자세하다.(우리 홈 <안동김씨 소개→역사적 주요인물→김영수>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에 앞서 통제사공께서는 흥해지역에 자주 출몰하는 왜적을 막기 위해 부임하시던 해에 권무당(勸武堂)을 짓고, 상사전(賞射錢) 오백민(五百緡)을 마련해 매월 1회씩 무술을 장려하는 궁도대회를 개최하셨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장수가 무인(武人)으로서는 가장 뛰어난 장수라 했듯이 유비무환(有備無患)으로 전란에 대비하셨으니 통제사공의 평소 전쟁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부임하시는 곳마다 무너지고 허술한 성(城)을 보수하고, 만반의 임전 태세를 갖추도록 한 사례에서 장병의 희생 없이 이기고자 하셨던 통제사공의 참다운 군인정신을 느낄 수 있다.
통제사공의 이런 공덕을 받들기 위해 흥해 읍민들은 1786년(정조 10년) 흥해구제기적비를 세우고, 1811년(순조 11년)에 청덕사(淸德祠)를 지어 통제사공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게 되었다. 이후 흥해 읍민들은 매년 중구일(重九日) 통제사공에 대한 제례를 오늘날까지 정성껏 모셔 오고 있다.
평소 통제사공을 흠모해 온 이정업(전 포항문화원 사업과장) 선생은 통제사공의 묘소를 찾기 위해 8년 동안 경북 안동시 인근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흥해구제기적비에 관향이 ‘安東人’으로, 권무당기(勸武堂記) 현판의 낙관서에 ‘癸未季夏玉洞歸人識’라 적혀 있는데, ‘옥동’은 안동시 남쪽에 똑같은 동명(洞名)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통제사공께서 쓰신 제주도 관덕정의 ‘耽羅形勝’ 낙관서에 ‘花山人’이라 적혀 있어서 안동시 풍산읍 일대를 샅샅이 뒤지기도 했다.
그러고도 끝내 통제사공의 묘소를 참배하고픈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2006년 7월 1일 태영 종친과 연락이 닿게 되었고, ‘옥동’이 경기도 파주시 방축리의 한 지명이라는 것을 알게 돼 천릿길을 달려오게 된 것이다. 통제사공께서 영면해 계신 방축리 묘소 앞에는 제법 큰 시내가 흐르는데, 개울 폭이 넓어 ‘너븐여울’이라고도 한다. 또 묘소 위쪽으로 예전에는 거울처럼 맑은 소가 있어서 ‘백경수(白鏡水)’라 불렀다. 세월이 흐르면서 아름답던 백경수와 옥동의 옛 정취는 잃었으나, ‘옥동’이란 지명은 바로 이 맑은 시내와 연관되었으리라.
인연 따라 가는 길
이정업 선생의 발길이 인연의 끈을 따라 파주에 이르렀듯이, 2월 2일(금) 오후 5:20분 우리 일행은 서울 길동에서 남쪽 흥해로 향한다. 야트막한 산기슭에 자리한 통제사공의 묘소를 뒤돌아보며 그가 간 길을 되짚어 간다.
청사(靑史)에 길이 빛날 공적이건만 그 동안 통제사공의 업적을 우리 자신도 제대로 몰랐으니 부끄럽기 그지없다. 묘소가 청빈하다 못해 초라하게 보일지라도 참다운 군인으로서, 자애로운 목민관으로서 그 정신은 영원히 빛나야 할 것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다행히 2003년 10월경부터 태영 종친을 비롯해 발용 종친 등이 통제사공에 대한 자료를 발굴ㆍ소개함으로써 통제사공의 업적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 과정에서 태영 종친은 2004년도에 제주문화원이 발간한 책자의 통제사공 관련 내용 중 오류사항을 바로잡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2006년 6월 2일에는 포항문화방송이 통제사공의 유적인 구제기적비 등을 방영하였는데, 경주에 거주하는 병호 종친이 이 내용을 우리 홈페이지(안동김씨대종회 홈페이지)에 알려옴으로써 통제사공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또한 2006년 2월 25일~27일 제28회 안사연 정기산행(제주지역 선조님 유적 탐방)과 5월 14일 제31회 안사연 정기산행(군사공파 파주지역 유적지 답사)을 통해 통제사공의 유적을 둘러보고 묘소를 참배하게 되었다. 한편, 발용 종친의 연락을 받은 포항의 재원 종친이 2006년 6월 30일 흥해읍의 청덕사와 권무정을 방문, 현지 사정을 우리 홈에 알려옴으로써 아름다운 인연이 다시 이어지게 되었다.
이 무렵 발용ㆍ태영 종친은 통제사공 관련 자료를 집중적으로 조사하고 있었다. 그 일환으로 2006년 6월 3일 발용ㆍ태영 종친은 인천에 거주하는 통제사공의 종손 성회 종친을 방문, 종손댁에서 소장하고 있는 통제사공의 교지를 촬영하여 우리 홈에 소개하였다. 그 뒤를 이어 2006년 12월 26일 주회 종친은 통영시의 통제사공 유적지인 제승당과 통제영 등지를 둘러보고 주요한 내용을 우리 홈에 알려왔다.
통제사공께서는 청백리 탁청헌(濯淸軒 : 휘 斗南)의 손자로서 계대는 다음과 같다.
▲칠양(군사공) → 진(塡) → 삼노(三老) → 우(瑀) → 윤강(允剛) → 하상(夏詳) → 양(壤) → 정일(鼎一) → 경(坰) → 인량(寅亮) → 지(址) → 두남(斗南) → 홍석(弘錫) → 3子 영수(永綬)
통제사공의 처음 휘(諱)는 영적(永績), 자(字)는 중약(仲若)이시다. 흥해군수를 비롯해 전라우ㆍ좌수사를 거쳐 함경도병사, 제주목사 겸 방어사, 홍충도(충청도) 병사를 역임하고 통제사로 부임해 통영 근무지에서 순직하셨다.
근무지에서 순직하실 정도로 자신의 임무에 최선을 다하셨던 통제사공인지라 흥해읍의 선정비(흥해구제기적비)를 비롯해 통영시 세병관에 타루비(墮淚碑)가 세워졌으며, 하세하신 후에는 두 번씩이나 청백리에 천거되시기도 하였다.
종손가에서 보관 중인 통제사공 교지는 무려 20여 점으로서 훈련원 주부(訓鍊院主簿)에서부터 용양위 부호군 겸 분오위도총부 부총관을 거쳐 제주목사, 충무위부호군(忠武衛副護軍) 등에 이르기까지 한 분의 교지가 이처럼 온전하게 대거 소장된 사례도 찾아보기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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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륭 11년 (1746년. 영조 22) 윤 3월 |
▲건륭 11년 (1746년. 영조 22) 9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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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륭 12년 (1747년. 영조 23) 10월 |
▲건륭 13년 (1748년. 영조 24) 4월 1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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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륭 13년 (1748년. 영조 24) 6월 21일 |
▲건륭 16년 (1751년. 영조 27) 정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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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륭 18년 (1753년. 영조 29) 5월 |
▲건륭 19년 (1754년. 영조 30) 12월 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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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륭 24년 (1759년. 영조 35) 3월 |
▲건륭 24년 (1759년. 영조 35) 7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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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륭 29년 (1764년. 영조 40) 3월 |
▲건륭 36년 (1771년. 영조 47) 4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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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륭 37년 (1772년. 영조 48) 2월 |
▲건륭 38년 (1773년. 영조 49) 3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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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륭 39년 (1774년. 영조 50) 12월 |
▲건륭 39년 (1774년. 영조 50) 12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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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륭 43년 (1778년. 정조 2) 9월 |
▲건륭 43 년 (1778년. 정조 2) 9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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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륭 46년 (1781년. 정조 5) 윤5월 |
▲건륭 46년 (1781년. 정조 2) 6월 (가로 : 72cm, 세로 : 53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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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륭 50년 (1785년. 정조 9) 7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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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륭 50년 (1785년. 정조 9) 초6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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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륭 41년 (1776년. 정조 원년) 8월 1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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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륭 50년 (1785년. 정조 9) 7월 초8일 | |||||||||||||
하지만 이 중에서도 으뜸인 교서로서 1785년(정조 9년)에 정조대왕께서 통제사공에게 내린 교서(敎 三道統制使兼慶尙右道水軍節度使 金永綬書)는 촬영할 수가 없었다. 이 교서는 12년 전 천안에 거주하는 종인 ◇◇씨 등 여러 명이 있는 자리에서 ◇◇씨의 아버지에게서 종인 ○○씨가 복사를 하고 돌려주겠다며 빌려간 것인데, 아직 회수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 교서 사진은 우리 홈에 1장이 있다. 교서를 빌려간 ○○씨가 찍어서 보내 온 것이다. 그러나 통제사공 현양사업의 일환으로 각종 자료를 수집, 책자 발간을 계획 중이라 사진 상태가 나빠 재촬영이 절실한 형편인데 촬영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훗날을 위해 이 교서는 종손가에 대대로 전해진 유품임을 종손 등 관계자의 증언에 의해 기록한다. 아울러 2007년 2월 13일 현재까지 교서의 정밀 촬영이 이루어지지 않아 교서의 내용을 같이 기록해 사진에 대신한다.
▲건륭 50년 (1785년. 정조 9) 12월 초3일
삼도통제사겸경상우도수군절도사(三道統制使兼慶尙右道水軍節度使) 교서(敎書)
敎 三道統制使兼慶尙右道水軍節度使 金永綬 書 王若曰 삼도수군통제사겸경상우도수군절도사 김영수에게 교하는 서(교서) |
이런 가운데 2006년 8월 5일 흥해읍의 이정업 선생은 그 동안 공들여 수집한 통제사공 관련 자료들을 자료집으로 엮어 태영 종친에게 우편으로 전달해 왔다. 수십 년에 걸친 공덕에 고개가 절로 숙여지는 순간이었다.
그 정성에 마음은 벌써 남녘에 닿았다. 17:30분 상일IC 근처에서 발용 종친과 합류해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대전에 도착, 새로 뚫린 내륙고속도로로 갈아타 한 걸음에 흥해읍으로 접어든다. 가는 길에 태영 종친은 대구의 정중 종친과 포항의 재원 종친에게 연락을 취한다.
20:38분 포항IC를 빠져나와 재원 종친이 알려준 약속장소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그 사이 정중 종친은 업무로 인해 저녁 늦게 합류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반가운 얼굴들, 재원 종친은 한동안 내외분이 병고를 치러 더욱 만나보고 싶다. 20여 분 뒤, 드디어 재원 종친이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나타났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그리운 얼굴’이다. 재원 종친의 안내로 죽도시장으로 향한다.
■포항IC에서 죽도시장 가는 길 ※포항시내는 주말이면 교통이 혼잡합니다. 다음은 죽도시장으로 들어가는 재원 종친의 초특급 길 안내입니다. |
재원 종친이 미리 정해 둔 숙소에 짐을 풀고 죽도어시장으로 들어가 허기를 달랜다. 자리에 앉자마자 대구의 정중 종친과 연락을 취하고, 한두 잔 술잔을 기울였는데 벌써 정중 종친이 도착했다. 눈 깜짝 할 사이에 날아오고픈 그 마음이 넉넉히 짐작된다. 맛있는 해물 하나라도 더 들게 하려는 재원ㆍ정중 종친의 배려로 남쪽 바닷가에 부는 바람이 따뜻하게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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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항 죽도시장 |
▲ 죽도시장 횟집(좌로부터 태영. 정중. 윤식. 항용. 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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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01:00경 재원 종친은 다시 야간업무로 자리를 뜨고, 우리 일행은 재원 종친이 미리 잡아 둔 모델로 들어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홈페이지 수정작업으로 연일 밤샘을 한 항용 종친, 낮부터 운전 때문에 애쓰신 태영 종친은 달콤한 꿈나라로... 발용ㆍ정중 종친과 윤식은 그 동안 밀린 이야기로 03:30분에야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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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소(좌로부터 태영. 항용. 윤식. 정중. 발용) |
죽은 듯이 자고 났더니 어느새 정중 종친이 태영 종친에게 금일봉을 전하고 대구로 떠났다. 근무시간에 맞추어 06:00시에 출발했으니, 무사히 도착하셨는지 마음이 쓰인다. 겨울철이라 해돋이가 늦다. 07:00경 모텔 창문 너머로 동해의 해돋이를 본 다음 08:00시 숙소 인근에서 아침을 먹고 돌아와 08:30분경 재원 종친과 합류하였다. 새벽까지 근무하시느라 눈이나 제대로 붙이셨는지 걱정스럽다. 아이쿠, 재원 종친이 숙박비를 치른 것을 뒤늦게 알았다. 지방에 오면 늘 종친들의 환대와 폐를 끼쳐 송구스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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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김발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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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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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사진을 클릭하면 큰 사진을 보실 수 있습니다.
김상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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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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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혀있던 통제사공 선조님의 뒤늦은 현양사업을 위해 참으로 모든 분들이 애쓰신 흔적들이 공의 임지마다 고스란히 스며있음을 느끼며 특히 우리문중의 발용님과 태영님 그리고 이정업 선생님의 남다른 애정,일련 행사와 관련한 전말을 상세하게 전해주신 윤식님께 그간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현지 인근 대구에서 열일을 마다하시고 달려오신 정중님과 언제나 정성을 다해 보살펴 주시는 포항의 재원 형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리며 늘 강건하시길 바라옵나이다.
김정중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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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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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역사를 쓰시는 우리 문중의 보배들.. 이 행차의 기록이 만인의 교과서가 될 것 입니다.
모두 설날 잘 보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