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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사공(휘 永綬) 경상지역 유적 답사기_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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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식, 발용 작성일07-02-16 06:27 조회1,743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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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사공(휘 永綬) 경상지역 유적 답사기_2

 

착잡한 발걸음

  08:45분 노곤한 몸을 편히 쉰 숙소에서 출발, 재원 종친의 차량을 따라 09:15분 목적지인 흥해읍 청덕사에 도착했다. 바닷가라 바람이 거세긴 했지만 남녘의 환하고 따뜻한 햇볕이 색다르다. 이정업 선생을 비롯한 흥해 유림의 어르신들과 권무정 관계자들이 청덕사에 모이셨다는 전화 연락을 받은 터라 발걸음이 여느 때보다 급했다.

  ■청덕사 가는 길

죽도어시장 → 해안도로 2번째 3거리에서 좌회전(오른쪽 부두에 경북항운노조 사무실) → 중앙초등학교 뒷길 → 옛 포항시청 방향으로 우회전 → 중앙로(직진) → 관청길(법원, 검찰청) → 대구ㆍ영덕 표지판 → 철길에서 좌회전 → 우방 궁전맨션 → 우현4거리 → 직진 → → 고갯길(소티재길, 오른쪽으로 굽은 완만한 고개) → 울진ㆍ영덕 표지판 → 선린대학(왼쪽) → 새로 개설된 성곡IC를 지나 직진(성곡IC로 진입하지 말 것) → 미래스포션& SK주유소 → GS칼텍스주유소 → 모나코여관(왼쪽) → 흥해 입구(바로 첫 3거리에서 우회전 후 직진) → 언덕 꼭대기(금성아파트 앞)에서 좌회전(경광등 있음) → 직진(300여m) → 우리홈마트(정면에 삼운회교통봉사대 컨테이너 가건물) → 우회전(작은 골목길) → 청덕사(흥해초등학교 52회 동기회 / 同心會 : 컨테이너 가건물)

  청덕사(淸德祠)는 대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고, 주택가로 변모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초행길에는 지나치기 쉬웠다. 이정업 선생이 우리홈마트 앞에서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다가 반갑게 맞는다. 자그마한 체구에 심지가 굳어 보이는 어른이다. 목소리가 카랑카랑하다. 인사를 나누고 청덕사 옆 동심회로 안내한다. 유종환(전 흥해읍장) 선생을 비롯해 권홍식ㆍ황성봉ㆍ정재학ㆍ이정희 선생 등 전ㆍ현직 권무정 사두(射頭 : 회장) 어른들께서 아침 일찍부터 기다리고 계셨다. 흥해 유림을 이끄는 어른들이 정중하면서도 따뜻하게 맞이한다. 통제사공의 후손들이라며 여간 반색이 아니다. 통제사공 직손과 함께 하지 못한 것이 아쉽기만 하다. 재원 종친을 필두로 간략한 소개와 함께 인사를 드리고, 사무실을 나와 고유제를 올릴 준비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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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덕사. 왼쪽 대나무 울타리에 기대어 구제기적비 등 대여섯 기의 비석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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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덕사 입구에는 왼쪽에 흥해구제기적비를 비롯해 옛 흥해군수들을 기리는 선정비들이 대나무 울타리에 기대 나란히 서 있다. 청덕사는 3칸×1칸의 맞배지붕의 익공집이다. 기둥은 두리기둥이다. 기와를 얹기는 했으나 전체 규모는 작은 편이다. 아담한 마당을 두고 사방에 담을 둘렀다. 청덕사 건물은 6ㆍ25전쟁으로 인해 반파되었는데, 남은 부재를 살려 복원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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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유제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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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덕사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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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덕사

  청덕사 내부에는 통제사공의 영정과 위패가 주벽으로, 그 오른쪽에 유응환(兪膺煥) 군수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통제사공의 위패는 ‘邑先生 金相公 神位’로, 유응환 군수는 ‘邑先生 兪公 神位’로 적혀 있어서 품계의 차이가 반영돼 있었다. 그 때문인지 통제사공의 위패를 받친 상(床)이 유응환 군수의 경우보다 1치 정도 높았다. 이런 차이로 보아 위패를 모신 것은 통제사공께서 ‘삼도수군통제사 겸 경상우도수군절도사’를 지내신 후에 다시 모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통제사공의 영정은 일반적으로 보아 온 극사실적인 영정이 아니라 다분히 민화적인 형태를 띠고 있었다. 언제 누가 그렸는지는 모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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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덕사 안에 모셔진 통제사공 영정. 누가 그렸는지 미상이다.

  청덕사 앞의 권무정(勸武亭)은 콘크리트로 목조 기와집을 흉내 내어 지은 정자이다. 3칸×1칸 크기에 팔작지붕의 겹처마 익공집이다. 같은 3칸×1칸이라도 청덕사보다 훨씬 크나, 콘크리트조 건물이라 그런지 옛 정취가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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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무정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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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콘크리트조 지은 권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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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무당은 통제사공께서 흥해군수로 부임하시던 1761년(영조 37년)에 무술 연마를 장려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그 2년 뒤 통제사공께서는 ‘권무당기(勸武堂記)’를 지으셨으니, 흥해읍민들 덕분에 통제사공의 친필 현판 권무당기가 잘 보존돼 있다.

  권무당기에 의하면 통제사공께서는 부임 후 맨 먼저 권학(勸學) 정책으로 인재를 뽑아 학당에서 가르치도록 하셨다. 아울러 마을 장로(長老)들로 하여금 일과(日課) 즉 행정업무를 담당토록 하고, 물자의 공급이 넉넉토록 조치한 뒤에 유비무환의 일환으로 무술연마를 위해 권무당을 지으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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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제사공의 친필 '권무당기' 현판

  권무당기 끝 낙관에는 ‘歲癸未季夏玉洞歸人識’라 적으셨으니, 고향 땅 ‘옥동’의 순박한 읍민들을 늘 염두에 두시고 선정을 베푸셨던 것이 아닌가 싶다. ‘내가 타향 땅의 목민관’으로 행정을 책임지는 것처럼 다른 누구도 ‘내 고향 땅의 다스리는 자’로 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고향의 부모형제와 친지들을 생각하면 이곳 흥해 읍민들에게 학정을 가할 수 없으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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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歲癸未季夏玉洞歸人識

  청덕사 앞에 서 있는 흥해구제기적비(興海九堤紀績碑)는 창녕인 성대중(興海郡守 昌寧 成大中) 흥해군수가 세운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방금 새긴 것처럼 자획이 완연한데 두어 자가 깨져서 알아볼 수 없다. 이 때문에 이정업 선생은 훼손된 글자를 확인하기 위해 오랫동안 노심초사했던 것 같다. 태영 종친이 비문이 적힌 자료를 말씀드리자 어린아이처럼 주먹을 쥐어 하늘로 뻗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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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해구제기적비와 유응환 군수 선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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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제기적비 전면

▲ 구제기적비 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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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덕사 주위를 둘러본 후 청덕사로 들어가 태영 종친이 정성껏 준비한 제물을 진설한 다음 제복으로 갈아입고 고유제를 올릴 준비를 마쳤다. 흥해 읍민들이 245년 동안 우리 할아버지를 잊지 않고 기념해 오는 동안 우리 일행이 처음이 아니기를 마음 속으로 간절히 빌면서 고유제를 모셨다.

  ▲헌관 : 초헌 태영, 아헌 윤식, 종헌 이정업
  ▲집례 및 독축 : 항용

  항용 종친이 여러 날 고심하며 지은 제문을 독축하자 장내가 숙연해졌다. 한글 제문이라 알아듣기 쉽고, 뜻이 바로 전달된 덕분에 젊은 참석자도 통제사공의 업적을 금방 이해하였으리라. 하지만 마음 한켠으로는 고유제 후가 걱정스럽기도 하다. 올해 중양절 향사에는 어이할 것인가, 또 내년에는, 그 다음 해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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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헌 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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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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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헌 윤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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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례 항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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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헌 이정업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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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복례

  예전에는 흥해군수가 초헌관으로 예를 올렸는데, 포항시로 통합된 후에는 주로 흥해읍장이 맡고 있다. 특별한 경우에는 포항시장이 참예하기도 한다고 한다. 청덕사 벽에 붙어 있는 분정 내역이 해마다 향사를 모신 내용을 고스란히 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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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덕사 벽에 걸려 있는 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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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유제 후 기념촬영. 뒷줄 가운데 계신 분들이 흥해 유림 유사이자 권무정 전현직 사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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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로부터 발용. 태영. 항용. 윤식. 재원

  청덕사와 권무정은 포항시에서는 ‘무(武)’를 상징하는 단 하나의 문화재적 가치를 갖고 있다고 한다. 아쉽게도 건물이 온전하게 전하지 못하고, 권무정은 근래에 지은 것이라 아직 문화재로 지정되지 못했다. 청덕사 관계자들이 꾸준히 노력하고 있고, 청덕사와 권무정의 가치를 지역방송 등에서 관심을 갖고 있으므로 곧 성과를 거둘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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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유제 후 권무정 어르신들과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눈 다음 11:35분 흥해궁도협회(권무정의 후신)로 향했다. 권무정 터는 1980년대에 주택으로 완전히 둘러싸여 멀찌감치 옮겨갔다.

  ■흥해궁도협회(新 권무정) 가는 길(소요시간 15분 내외)

삼운회교통봉사대 컨테이너 가건물 → 좌회전 → 좌회전 → 신광 표지판(4거리) → 세종황제맨션아파트 → 청룡각(우회전) → 농로 → 농로 끝에서 우회전 → 가건물(궁도협회 가건물)

  궁사들과 인사를 나누고 건물 안을 둘러보니 화살이 가지런하게 꽂혀 있다. 사무실에는 통제사공 영정을 사진으로 찍어 안쪽에 모셔 두고 상무정신을 받들고 있었다. 곧이어 권무당기 현판을 비롯해 상사답결추교구기, 영당향사중수절목과 현판 이름이 없이 기문만 적힌 4종의 현판을 친견하였다. 이 가운데 권무당기 현판이 통제사공의 초서체 친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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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무당기(통제사공의 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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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사답결추교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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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당향사중수절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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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방 붓에서 흘러나온 듯 자획에 날이 섰다. 그러면서도 온화한 느낌을 준다. 관덕정의 ‘탐라형승’ 친필 현판처럼 큰 글자뿐만 아니라 작은 글자에서도 힘이 넘친다. 온전하게 보관해 준 관계자들이 더없이 고맙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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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제사공 친필 권무당기 부분글씨

  친필을 감상한 후 아쉽지만 헤어져야 할 시간이다. 태영 종친이 정표로 간소한 선물을 이정업 선생에게 전한다. 재원 종친 차량을 따라 성곡IC 근처로 나가 다시 작별인사를 나눈다. 재원 종친이 통영 가는 길을 몇 번씩 일러준다. 그 덕분에 복잡하다며 길 잃지 말라며 신신당부하던 고속도로로 무사히 진입, 대구로 향할 수 있었다. 안심하시라고 전화를 드리려는 순간, 또 재원 종친의 전화가 왔다. 우리 일행의 진로를 확인하고서야 안도하셨으리라.

 

정동행성 옛 터

  통영으로 가는 도중 마산시의 정동행성 터를 답사하자는 항용 종친의 제의에 즉석에서 동의, 방향을 마산으로 변경하였다. 지금 아니면 언제 또 충렬공 할아버지 발자취를 따라가 보랴.

  북대구IC를 빠져나와 휴게소에서 점심을 먹고 13:56분 금호분기점을 거쳐 14:53분 동마산IC에 도착하였다. 서마산IC로 나와야 할 걸 길을 몰라 동마산IC를 택했다. 게다가 마산시립박물관 표지판도 거의 없어 마산 시내를 꽤 오래 오락가락했다. 물어물어 찾아갔더니 화가이자 조각가로 활동했던 문신이 만년에 칩거하면서 작품활동을 했던 ‘문신미술관’ 바로 옆이다.

  마산시립박물관은 마산항이 한눈에 들어오는 자리에 자리잡고 있다. 박물관 앞에 비림(碑林)이 원형으로 둘러 서 있어 금방 눈에 띈다. 고려조의 문장가 정지상을 비롯해 김극기, 채홍철, 안축, 이첨, 정이오, 박원형, 서거정, 김극성, 정사홍, 이황, 신지제, 정문부 등 조선조의 문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13사람의 시가 적혀 있다. 마산과 합포의 아름다운 경치를 읊은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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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산시립 박물관 ▲ 비림(碑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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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렬공 사위 채홍철 시비

  옛 합포 자리였던 마산항을 조망한 뒤 오래 참았던 생리현상을 해결하고, 약속한 송성안 박사를 만난다. 충렬공의 일본 정벌 전진기지였던 합포의 정동행성 터는 마산시립박술관 바로 뒷산이다. 송성안 박사는 근무 중이라 정동행성 터를 안내하기 곤란하다며 인근 지역에 얽힌 이야기를 자세히 설명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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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산시립박물관 송성안 박사로부터 정동행성 및 합포의 변천사에 대한 설명을 듣는 답사일행

  정동행성 터는 신라시대에 굴자군, 골포현, 의안군, 합포현 등으로 불리다 고려 충렬왕 8년인 1282년에 회원현으로 바뀌었다. 박물관 뒤쪽으로 석축을 쌓았는데, 본래는 토성(土城)이라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 성을 자산산성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충렬왕 당시 이 지역을 관장하던 현성(縣城)으로서 정동행성이 설치되었다. 수년 전부터 정동행성 실체를 파악하기 위한 발굴조사가 진행 중인데, 현재는 발굴작업이 중단된 상태로서 그 이유는 확인하지 못했다. 다만 여기저기 발굴조사를 알리는 안내 표지판이 설치된 것으로 보아 향후 발굴작업이 속개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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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벽은 야산 능선을 따라 축조되었는데, 동북쪽은 경사가 가파르고, 남쪽에 자산천이 흘러 자연적인 해자(垓字)를 이룬 천혜의 요새다. 무엇보다 발 밑으로 합포만(마산항)이 한눈에 들어오고, 섬들이 첩첩이 가로막아 웬만한 태풍은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는 군사항이다. 또한 섬들에 가려 있어 외해(外海)에서는 마산항의 움직임을 전혀 알 수 없는 것도 장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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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동행성 터에서 내려다본 마산항 서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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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용.          태영.
    윤식.          발용.

  마산항은 근대 이후 매립이 계속돼 거의 절반 정도는 뭍으로 변했다. 왼쪽의 작은 산들도 예전에는 섬이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정동행성 터에서 내려다보면 엄청난 천연항(天然港)이다. 일본 정벌 당시 900척 규모의 고려 전투함대가 충분히 기항할 수 있는 규모다. 제2차 일본 정벌 당시 고려 함대가 이곳 합포와 김해 두 곳에서 출발했을 가능성을 송성안 박사에게 넌지시 물었더니, 합포만의 규모로 봐서 충분할 것 같다며 가능성을 부인한다. 이 문제는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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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동행성 터에서 내려다본 마산항 동쪽. 멀리 진해로 나가는 길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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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00여척의 함선이 정박했었던 합포항의  현 모습

  일제 강점기로 들어서면서 마산항에는 왜인들이 대거 들어와 8,000여 명에 달했다. 이들은 마산 시내에 신시가지를 조성하고 정착했는데, 이들에게 식수를 공급할 목적으로 1932년에 정동행성 터인 회원현성에 정수장을 만들었다. 일본 정벌기지였기에 의도적으로 훼손한 것이다. 이 정수장은 1980년대 후반에 철거돼 당시 쌓아놓은 석축만 군데군데 남아 있다.

  정동행성 당시 유적은 남아 있지 않고, 옛 성터는 등산길로 변했다. 여기저기 흩어진 기와 조각들만이 그 시절을 짐작케 한다. 태영ㆍ항용 종친이 안사연 회원들에게 나누어 준다며 무늬가 선명한 작은 와편(瓦片) 몇 개를 줍는다.

  등산로를 따라 정상 부근으로 올라갔더니 한 길 정도 되는 둥근 바위들이 산재해 있다. 그 중 충렬공 할아버지께서 올라서서 합포만을 내려다보셨을 것 같은 커다란 바위에 다 같이 올라섰다. 눈앞이 시원하다. 현재 회원현성 인근에 남아 있는 정동행성 관련 유적은 4개의 몽고정뿐이라고 한다. 시간 관계상 확인하지는 못하고, 16:30분 박물관을 출발해 통영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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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김봉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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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충렬공의 역사적 사실을 찿고자 마산까지 방문하신 안사연의 탐구욕에 감탄을 보냅니다. 현재 마산에는 별다른 유적이나, 심지어는 구전조차도 찿을 길이 없어보입니다. 다행히 왜인들이 금지시킨이후 잃어버린, 회현성에서 행해지던 무속양식을 찿고자하는 행정적 뒷받침이 있어 복원 팀이 얼마전에 구성되었습니다. 그양식이 복원되다면 800년전 민간에 의하여 바다 해신으로 승화된 충렬공의 면모를 일부나마 엿볼 수있을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