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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온공 급제 기록을 통해 본 지제교공의 감시 급제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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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작성일07-03-11 14:37 조회2,373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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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온공 급제 기록을 통해 본 지제교공의 감시 급제 시기

- 한시 해석 부분은 틀린 곳이 많을 듯합니다.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주석은 아래쪽에 따로 모았습니다.

及菴先生詩集卷之二 / 律詩

奉和愚谷賀齊閔齊顏連擧進士 우곡이 제민·제안 형제의 잇따른 진사 합격을 축하한 시를 받들어 화답하며

文章孝印有玄孫 문장 김효인 공에게 현손이 있으니
人道將來兩壯元
길거리에 장차 두 장원의 행차가 오리라.
乃祖陰功猶未已
조상의 음덕이 아직 다 미치지 않았으니
我家餘慶尙何言
내 집에 경사가 더 남았다고 어찌 말하지 않으리오.
試期漸近崇文館
숭문관에서 시험 치를 날짜가 점점 다가오니
受勑行看講虎門
임금님 명령 받아 금호문에서 강경과 치르는 것을 구경하리라.
閭巷聚觀應歎美
여염 사람들 모여들어 구경하면서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는데
揷花飛蓋雁聯軒
어사화 머리에 꽂고 바람에 살랑이는 일산(日傘)을 받으며 형제가 잇달아 수레에 오르네.

문온공(휘 구용)의 국자감시와 예부시 급제 시기는 『척약재학음집』에 기록돼 있습니다.

至元戊寅十二月辛卯 先君生
至正十三年癸巳 年十六 宋天奉監試 中擧子科
新進士等詣闕肅拜 上親試賦牧丹詩 先君居其首 上奇之 賜職散員
十五年乙未安乙起榜 登科拜德寧府注簿
지원 무인년 12월 신묘일에 선군(휘 구용)께서 태어나셨다. 지정 13년 계미년 16세 때 송천봉이 주관하는 시험에서 거자과에 합격하셨다. 신진사 등이 궁궐로 들어가 임금께 사은례를 드릴 때 주상께서 친히 목단시로 부(賦)를 시험하셨는데, 선군께서 그 첫째에 들으셨다. 주상께서 이를 기이하게 여기시고 산원직을 내리셨다. (지정) 15년 을미년 안을기방에 등과하여 덕녕부 주부를 제수받으셨다.

이처럼 문온공께서는 공민왕 2년(1353년)에 국자감시를 거쳐 공민왕 4년(1355년)에 예부시에 등과하셨습니다.
또한 지제교공(휘 제안)께서는 고려사 열전과 『고려열조등과록』 등의 기록을 토대로 공민왕 6년(1357년 정유년)에 급제하셨음이 확인되었습니다.(우리 홈 게시판 <지제교공(휘 제안)의 급제 시기에 대하여> 참조)
그러나 예부시의 예비고시 성격을 갖고 있는 국자감시에 지제교공께서 합격하신 시기는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급암시집』을 다시 읽다가 위의 시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공민왕이 즉위하여 지제교공께서 예부시에 급제하신 1357년 사이에 시행된 국자감시는 다음과 같습니다.

■ 공민왕 2년(1353) 4월 - 시험관 : 집의(執義) 송천봉(宋天鳳) / 한달한(韓達漢) 등 82명 및 명경(明經) 5명 선발 (※문온공 16세, 지제교공 15세 이하)
■ 공민왕 4년(1355년) 정월 - 시험관 : 우대언 유숙(鏐淑) / 전익(全翊) 등 95명 선발
(※문온공 18세, 지제교공 17세 이하)
■ 공민왕 6년 3월(1357년) - 시험관 : 어사대부(御史大夫) 신군평(申君平) / 이준(李竴) 등 98명 선발
(※문온공 20세, 지제교공 19세 이하)

급암공의 시(詩)에서 나타나듯이 지제교공은 문온공께서 공민왕 2년에 진사(進士)가 되신 후에 잇따라 거자(擧子)가 되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지제교공께서는 공민왕 6년에 예부시에 급제하시므로 국자감시에 합격하신 해는 공민왕 4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공민왕 이전에 실시된 국자감시는 충목왕 3년(1347년 : 문온공 9세)이므로 지제교공께서 국자감시를 볼 연령대에 해당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 충목왕 3년 4월 - 시험관 : 대언(代言) 정사탁(鄭思度) / 시부과(詩賦科) 박형(朴形) 등 52명, 십운시과(十韻詩科) 김득제(金得齊) 등 46명 선발

또한 문온공께서 거자가 되신 연령은 16세이므로 지제교공께서는 15세 이하라는 뜻이 됩니다. 고려조의 국자감시 합격자 중 연소자(年少者)들을 살펴보면 목은(이색) 선생이 14세, 익재(이제현) 선생이 15세로 세상을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만일 지제교공께서 이들과 같은 연령으로 거자가 되셨다면 급암공께서 그 일도 시로 표현하셨을 것입니다. 이런 점을 미루어 보아 지제교공께서 공민왕 4년에 거자가 되셨을 당시 연령은 16세 또는 17세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따라서 현재 출생연도가 미상인 지제교공은 1339년 또는 1340년에 태어나셨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문온공 1338년(충숙왕 복위 7년)∼1384년(우왕 10년)
지제교공 ?∼1368년(공민왕 17년)

<주(註)>
◆우곡(愚谷) : 정자후(鄭子厚). 『익재집』의 주석 중에 ‘우곡’을 ‘정이오(鄭以吾)’로 잘못 적은 사례가 있습니다. 정자후는 『익재집』을 비롯해 고려조 문인들의 문집이나 글에 자주 등장하는데 그에 대한 자세한 소개가 없는 실정입니다.
이 시의 제목으로 보아 우곡 선생이 문온공(휘 구용)과 지제교공(휘 제안) 형제가 연이어 국자감시에 합격한 것을 축하하는 시를 급암공(휘 민사평)께 주자 그 화답시로 지은 것이 확실하나, 우곡 선생이 지은 시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진사(進士) : 고려시대에는 국자감시(國子監試) 합격자, 조선시대에는 진사시(進士試) 합격자를 부르던 칭호. 고려시대에는 비교적 엄격하게 구분하였으나, 국자감시와 예부시(禮部試)를 막론하고 과거 급제자에 대한 통칭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지방에서 선발한 진사[鄕貢進士]처럼 국자감시 합격자가 아닌 경우에도 진사라는 명칭을 부여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국자감시 합격자와 예부시 합격자를 구분할 경우에는 국자감시 합격자만 진사라고 불렀습니다.
이에 비해 당나라에서는 최종 시험인 예부시 합격자를, 명나라와 청나라에서는 과거 급제자에게 이 명칭을 사용했습니다.

◆국자감시는 선거지에 진사시(進士試)·남성시(南省試)로도 기록되었다. 합격자는 예부시의 응시자격을 가지며 진사라 불렸다. 『고려의 과거제도』, 허흥식, 일조각, 43쪽)

◆「吳元卿墓誌」, 『韓國金石文追補』, 173쪽, “赴成均試 得進士名”  - 『고려의 과거제도』51쪽에서 재인용

◆국자감(國子監) 시험(고려사 선거지 기록)
이는 곧 진사 시험인데 덕종(德宗)이 처음으로 설치하고 부(賦)와 6운(韻) 및 10운 시(詩)를 시험 쳤다. 그 후에는 이를 혹은 성균시(成均試)라고도 하고, 혹은 남성시(南省試)라고도 하였다.
충선왕이 국자감시를 폐지하였고, 충숙왕 4년(1317)에 구재(九齋)의 삭시(朔試 매월 초하룻날 실시)로 대신하였다. 충숙왕 7년에 이를 거자시(擧子試)라 하였다. 국자감시에서 뽑는 인원 수에는 제한이 없었다.
공민왕 17년에 왕이 경서에 정통한 자를 뽑아 시험관을 삼으려 했는데, 신돈은 감찰대부 손용(孫湧)을, 환자(宦者) 이강달(李剛達)은 판전교시사 이무방(李茂芳)과 권사복(權思復)을 추천하려고 하였다. 공민왕이 이들이 다투는 것을 미워하여 말하기를 “국자감 시험에서 선발하는 것은 대개 다 어린아이들이며 경서에 밝고 품행이 단정한 선비가 아니므로 국가에 이익이 없다.”며 이를 폐지하였다. 우왕 2년(1377)에 다시 국자감시를 실시하였다.
우왕 11년(1386) 3월에 윤취가 선발한 자가 모두 권문세가의 젖내 나는 어린아이들라 당시 사람들이 이를 ‘분홍방(粉紅榜)’이라 희롱하였다. 이것은 아이들이 분홍 옷을 흔히 입는 데서 나온 말이다. -『북역 고려사』(선거지) 제7권, 105쪽)

◆현손 : 문온공이나 지제교공은 상서공(휘 효인)의 ‘이손(耳孫)’이십니다. 급암공께서 착각하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將來兩壯元 : 급암공의 외손자인 문온공과 지제교공이 국자감시 합격 후 예부시에 좋은 성적으로 등과할 것을 기원하는 시적(詩的) 표현인 듯합니다.

◆과거 급제자들의 축하 행사
고려시대 급제자들이 벌였던 종합적인 축하 행사에 대한 기록은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여러 문집을 통해 단편적인 기록들은 살펴볼 수 있으며, 조선시대의 경우와 아주 유사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다음은 조선시대의 사례입니다.(『조선시대 문과급제자 연구』, 이원명, 국학자료원)
- 전략 -
어려운 과정을 통과한 합격자에게 급제 후 행사가 이어져 위로해 주었다. 즉, 급제자를 발표하는 출방(出榜)의식, 합격증인 홍패(紅牌)와 어사화 등을 하사 받는 방방례(放榜禮), 문무 대신들이 참석한 가운데 베풀어지는 축하잔치인 은영례(恩榮禮) 및 기쁨을 주위 친구들과 함께 나눌 수 있도록 배려하는 의미의 유가행진(遊街行進)이 펼쳐졌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먼저 국왕과 종친, 문무 백관이 참석한 가운데 근정전에서 의식인 창방의(唱榜儀)가 행해졌다. 시위병들이 둘러서서 엄숙한 분위기 속에 급제자들의 부모들도 참관할 수도 있었다. 주악이 울리고 호명에 따라 광화문으로부터 문과 급제자가 전정에 들어와 오른편에, 무과 급제자가 왼편에 늘어서서 국왕에게 4배례를 드린다. 그러면 이조정랑은 문과 급제자에게, 병조정랑은 무과 급제자에게 각각 홍패를 준다. 그리고 다시 국왕이 어사화(御賜花)와 일산(日傘)과 주과(酒果)를 내린다[생원·진사는 예조에서 백패(白牌)를 주고 어사화와 주과(酒果)를 하사]. 이때 어사화는 삼등으로 급제한 담화랑(擔花郞)이 일등을 대표하여 국왕 앞에서 모자에 꽂을 어사화를 받아서 여러 신은(新恩)들에게 나누어 주어 꽂게 하였다.
또 문·무과 급제자에게 조정에서 축하연을 베풀어 주는데 이를 은영연(恩榮宴)이라 하였다. 동쪽에 문과 급제자, 서쪽에 무과 급제자가 갑·을·병과의 순으로 앉아서 주악이 울리는 가운데 기생들이 술을 권하고 광대들이 여러 가지 재주를 보여 주었다. 은영연은 의정부나 예조에서 행하여졌다.
은영연이 끝난 다음 날에는 문·무과 급제자들이 모두 문과 장원의 집에 모여 예궐(詣闕)하여 국왕에게 사은례를 드린다(생원·진사시는 생원시 장원 집에 모인다). 그 다음 날에는 급제자가 함께 무과 장원 집에 모여 성균관 문묘에 가서 공자의 신위에 참배하는 알성례를 치른다(생원·진사시 합격자의 경우는 지사시 장원 집에 모인다).
또 문희연(聞喜宴)이라 하여 친척·친지를 불러 잔치를 열기도 하고, 회문연(回文宴)이라 하여 선배의 집을 찾아다니면서 평소의 지도에 감사하고, 자기를 뽑아 준 시관을 초대하여 은문연(恩門宴)을 열기도 하였다. 이는 고려시대 座主·門生禮의 유풍이다.
그리고 대·소과를 막론하고 급제자에게는 3~5일간의 유가행진(일종의 시가행진)가 허락되었다. 유가는 일종의 시가행진인데 말을 타고 어사화를 꽂은 급제자들을 천동(天童)이 앞에서 인도하고 악대의 음악을 연주하며, 광대가 춤을 추고, 재인(才人)이 잡희를 부린다.
그리고 세종 11년(1429년)부터는 지방 출신의 급제자들을 위하여 영친의(榮親儀)를 행하였다. 이때 급제자가 고향에 내려가는 날 그곳 수령과 향리들의 환영을 받으며 유가한다.
그러고 나서 향교에서 알성례를 마치면 수령이 급제자와 부모 및 동네 어른들이 참석한 가운데 공관에서 홍패를 모시고 일생의 만사형통을 비는 ‘홍패고사’와 주연을 베풀었다.
부모가 돌아간 사람은 관가에서 주는 제물을 가지고 가서 묘를 찾아가 참배하게끔 하였다. 이처럼 급제자의 배출은 개인과 그의 가문뿐만이 아니라, 그 지역의 영광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숭문관(崇文館) : 고려 때 문신 중에서 학문이 뛰어난 자를 뽑아 학사(學士)로 임명하여 임금을 측근에서 모시도록 설치한 관청.
초기에는 숭문관이라 칭하다가 995년(성종 14년) 홍문관으로 개칭되고 문신 중에서 학식이 뛰어난 자를 뽑아 학사(學士)로 임명하였다. 문종 때의 관제에 의하면 대학사(大學士)는 종2품, 학사는 정4품이었다.
이전에는 학사라고 하여도 대간(臺諫)·지제고(知制誥)가 아니면 시종할 수 없었으나, 1199년(신종 2년) 중서성의 상주로 모두 시신(侍臣)의 반열에 참여하였다.
1298년(충렬왕 24년) 충선왕이 즉위하여 홍문관에 학사·직학사(直學士)를 두었다가 다시 숭문관을 설치하여 학사를 두었다. 1367년(공민왕 16년) 공자(孔子)의 소상(塑像)을 모셔두기도 하였다. - 엠파스 및 네이버 백과사전

◆강(講) : 강과(講科), 강경과(講經科), 과거(科擧)를 뜻하는 말. 여기서는 경서에 정통한 사람을 뽑는 과거(국자감시)를 이르는 말로 쓰인 듯합니다.

◆조선조의 강경과(講經科) : 조선시대에 성균관(成均館)과 사학(四學)의 유생·생원·진사를 대상으로 하여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암송하게 하던 과거. 뒤에 전강(殿講)의 시초가 되었다. 전강은 1470년(성종 1년)에 선정전(宣政殿)에서 성균관유생들을 고강(考講)한 것이 시초인데, 『속대전』에 이르러 제도화되었다. - 엠파스 백과사전

◆호문(虎門) : 궁궐의 서쪽 문인 ‘금호문(金虎門)’을 줄여서 시적으로 표현한 말. 조선조 이궁인 창덕궁의 서문이 금호문인데, 정궁인 경복궁의 서쪽 문인 영추문과 같습니다. 주로 승정원의 승지나 홍문관, 교서관 등 궁중 안에 있는 관서(官署)에서 근무하는 벼슬아치들이 드나들던 문입니다. 현재의 경복궁 서문(영추문) 천장에는 서쪽 방위을 뜻하는 백호(白虎)가 그려져 있습니다.
고려 황성의 서문은 영추문(迎秋門)으로서 일반 관원들이 출입하던 곳입니다.(『고려의 황도 개경』, 한국역사연구회, 창작과비평사, 51쪽 참조)

◆고려조의 과거시험 의식
다음은 동시대 인물인 익재 선생의 과거시험 의식에 대한 기록입니다.
옛날 제도에는 이부(二府)가 지공거(知貢擧)가 되고, 경(卿)ㆍ감(監)이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보는 날에는 날이 밝기 전에, 지공거는 북쪽 의자에 앉아 남쪽을 향하고, 동지공거는 서쪽 의자에 앉아서 동쪽을 향한다. 감찰(監察)은 왕명을 받들고 와서 남쪽에 앉되 조금 서쪽으로 하여 동북쪽을 향하며, 장교(將校)는 기(旗)를 잡고 계단 아래에 나누어 선다.
과거 응시자들이 다 모이면 곧 문을 잠그고 공원리(貢院吏)가 응시자들의 이름을 불러서 동무(東廡)와 서무(西廡) 두 곳에 있게 한 다음에 동쪽과 서쪽에 나무를 세우고 그 나무에다 시험 제목을 써서 건다.
해가 사시(巳時)에 이르면 승선(承宣)이 금인(金印)을 받들고 도착한다. 동지공거가 그를 뜰에서 영접하여 서로 읍하고 나아가면, 지공거는 북벽(北壁) 뒤로 자리를 피한다. 승선은 동지공거와 함께 마루로 올라가 두 번 절하고 서로 안부를 물은 다음 또 두 번 절한다. 지공거가 나와서 북쪽 평상 아래의 자리 위에 앉으면 승선이 북쪽을 향하여 두 번 절하고 지공거도 두 번 절한다. 승선이 지공거의 앞에 나아가 엎드려 안부를 물으면 지공거는 앉은 자리에서 답례한다. 승선이 물러나 또 두 번 절하고 지공거도 두 번 절한다. 그렇게 한 뒤에 서로 읍하고 앉는다. 승선은 동쪽 의자에 앉아 서향하여 동지공거와 마주 대한다.
공원리가 응시자들이 바친 시권(試券)을 안고 와서 올리면 승선이 금인(金印)을 열어 그 시권에 인을 찍는다. 다음에 내시(內侍)가 임금이 내린 술을 가져오면 지공거와 동지공거가 승선과 함께 하사한 것에 대해 절하고 평상에 나아가 마시고서 또 절하며 사은(謝恩)한다. 승선이 돌아가게 되면 동지공거가 뜰에서 읍하여 보낸다. 삼장(三場)을 다 이와 같이 한다.
제1장ㆍ제2장에는 승선이 와서 인이 찍힌 시권을 열어 시원(試院)에서 방(榜)을 내고 제3장은 임금의 염전(簾前)에서 방을 낸다.  -『국역 익재집Ⅱ』고전국역총서 198, 민족문화추진회, 104쪽

◆비개(飛蓋) : 바람에 흔들리는 일산(日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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