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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양 자료-만운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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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7-06-25 09:00 조회1,40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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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운집>에서

 晩雲集附錄卷之三. 摭錄. 


破賊論略 荷潭 

适之反也。稱京城有變。領兵入援。分遣手下精勇者。召諸將。定州牧使丁好恕覺其有異。斬其使。領兵詣張晩。安州牧使兼防禦使鄭忠信。令肅川府使鄭文翼。守安州而自詣張晩。請從行。晩責其棄城。將罪而赦之。竟誅适。立大勳。余嘗從容問曰。公聞适叛。棄城而遁。何也。忠信曰。吾與李适交若兄弟。國人皆知。吾亦爲文晦等所告。幸蒙上恩。得免拿問。适叛而我在寧邊近。地爲人所疑。則我之素心。無以自白於天日之下。棄城而遁者。明吾本心。而人自信之也。适旣誅。張晩飭西來諸將。竢大駕還京。迎拜於江上。而忠信獨歸來。辭於李時發。時發曰。諸將皆留。公不可獨歸。忠信曰。忠信以西路將兵之臣。不能卽誅叛賊。使大駕播越。而逆兵入城。其罪大矣。何敢自若有功者。迎駕於江上。退歸本鎭。以竢朝廷處分耳。上還朝。聞忠信還歸。特下聖旨。召之。其明敏。如此。


  만운집:1894년 간


* 정충신(鄭忠信)

1576(선조 9)∼1636(인조 14).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가행(可行), 호는 만운(晩雲).

고려 명장 지(地)의 9대손으로 금천군(錦川君) 윤(綸)의 아들이다.

미천한 집에서 태어났으며 절도영(節度營)에 속한 정병(正兵)이었고, 부(府)에 예속된 지인(知印:通引)을 겸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종군하였다.

이때 권율이 장계를 행재소에 전달할 사람을 모집하였으나 응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17세의 어린 그가 가기를 청하여 왜군으로 가득한 길을 단신으로 뚫고 행재소에 도착하였다.

병조판서 이항복(李恒福)이 그에게 사서(史書)를 가르쳤는데 머리가 총명하여 아들같이 사랑하였다. 이해 가을에 행재소에서 실시하는 무과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1621년(광해군 13) 만포첨사로 국경을 수비하였으며, 이때 명을 받고 여진족 진에 들어가 여러 추장을 만나기도 하였다.

1623년(인조 1) 안주목사로 방어사를 겸임하고, 다음해 이괄(李适)의 난 때에는 도원수 장만(張晩)의 휘하에서 전부대장(前部大將)으로 이괄의 군사를 황주와 서울 안산(鞍山)에서 무찔러서 진무공신(振武功臣) 1등으로 금남군(錦南君)에 봉하여졌다.

이괄과 친분이 두터웠던 그가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 자신의 결백을 나타내기 위하여 성을 버리고 달아나 문회(文晦) 등의 고발로 체포되었으나 은혜를 입고 풀려났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부원수를 지냈고, 1633년 조정에서 후금(後金:淸)에 대한 세폐의 증가에 반대하여 후금과의 단교를 위하여 사신을 보내게 되자 김시양(金時讓)과 함께 이를 반대하여 당진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장연으로 이배되었고, 곧 풀려나와 이듬해 포도대장·경상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1636년 병이 심하여지자 왕이 의관에게 명하여 치료에 진력하였으나 효험을 보지 못하였다.

죽은 뒤에 왕이 내시로 하여금 호상하게 하고 어복(御服)을 주어 수의(襚衣)로 하게 하였으며, 관청에서 의로써 장사를 치르게 하였다.

키가 작으면서도 씩씩하였고 덕장이라는 칭송을 들었으며, 민간에 많은 전설을 남겼다.

천문·지리·복서·의술 등 다방면에 걸쳐서 정통하였고, 청렴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광주(光州) 경렬사(景烈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만운집》·《금남집 錦南集》·《백사북천일록 白沙北遷日錄》 등이 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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