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구 내곡동 대모산에는 태종의 헌릉 옆에 순조의 인릉이 있습니다. 원래 인릉은 인조의 장릉 왼쪽 언덕에 있었는데, 불길하다고 하여 천장한 곳이 바로 지금의 자리입니다.
순조숙황제와 순원숙황후의 인릉
곡장 뒤에서 본 인릉
여럽게 탄생한 정조의 아들 순조숙황제와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창시자 순원숙황후
순조숙황제는 정조선황제와 경우궁 현목수빈 박씨사이에서 정조 14년(1790년) 6월 18일에 창경궁 집복헌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정조 24년인 1800년에 왕세자로 책봉이 되셨고, 정조가 승하하자 조선 제 23대 임금으로 즉위하셨습니다. 11살의 어린나이에 즉위하여 대왕대비인 정순왕후 김씨(영조의 계비)가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에서 물러나자 인동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습니다. 세도정치로 인해 과거제도의 문란, 매관매직의 성행 등 정치기강이 무너져 사회가 혼란하게 되었으며, 순조 자신또한 세도정치에 밀려 정치적인 영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였습니다. 1834년(순조 34년) 11월 13일에 경희궁 회상전에서 승하하시어 이듬해인 헌종 1년 4월 19일에 옛 인조의 장릉 왼쪽에 모셔졌으마 불길하다고 하여 철종 7년에 지금의 자리로 모셔지셨습니다.
순원숙황후 김씨는 본관이 안동인 영안부원군 김조순과 청양부부인 심씨사이에서 1789년(정조 13년) 5월 15일에 탄생하시어, 순조 2년에 왕비로 책봉되셨습니다. 왕비로 책봉되고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에서 물러나자, 왕후의 외척들을 모두 조정에 끌여 들여 안동김씨 세도정치를 본격화하였습니다. 순조가 승하하고 헌종이 8살의 나이로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하였고, 헌종 승하후 철종이 즉위하자 다시 수렴청정을 하였습니다. 철종 8년인 1857년 8월 4일에 창덕궁 양심합(양심각)에서 승하하시어, 같은해 12월에 순조의 인릉에 합장으로 모셔졌습니다.
인릉 혼유석
난간석만 두른 봉분
보기에는 단릉. 합장릉 형식.
정조의 건릉이전의 합장능은 혼유석이 두개인데, 건릉 이후의 합장능을 보면 혼유석이 하나가 아닌 두 개 입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면 단릉처럼 보이나 왕과 왕비께서 나란히 계시는 합장릉입니다.
헌릉 전경
헌릉 정자각
서울의 끝자락에 있는 왕릉.
헌인릉의 주소는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입니다. 즉, 서울의 끝자락에 있는 왕릉입니다. 이곳에는 조선초 왕권강화에 힘쓴 태종의 헌릉이 있습니다.
병풍석과 난간석을 두른 헌릉 봉분
헌릉의 문인석 (완벽한 쌍릉 형식)
조선초 왕권강화에 힘쓴 태종과 남편에 의해 친정집의 몰락을 겪은 원경왕후.
태종 이방원은 태조고황제와 신의고황후 한씨의 다섯째 아들로 1367년에 함흥 귀주동에서 탄생하시어, 1392년 아버지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건국하는데 큰 공을 세워 정안군으로 봉해지셨습니다.. 태조 7년인 1398년에 제 1차 왕자의 난으로 정권을 잡았고, 둘째 형 영안대군(정종)이 즉위한 후 정종 2년(1400년)에 제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후 왕세제로 책봉되셨습니다. 같은 해에 정종이 양위를 하여 조선 제 3대 임금으로 즉위하셨습니다. 태종은 초선초의 왕권강화에 힘을 썼고, 신문고 설치, 호패법, 조세제도 정비 등 조선왕조의 기반을 닦았으며, 외척의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 부인인 원경왕후 민씨의 집안을 몰락시키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1418년에는 첫째아들 세자 양녕대군이 세자지위에 부덕하다하여 양녕대군을 폐하고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한 후 8월에 양위를 하여 상왕으로 물러나셨습니다. 1422년(세종 4년) 5월 10일에 수강궁(현 창경궁)에서 춘추 56세로 승하하시어, 같은해 9월 6일에 원경왕후능 오른쪽에 모셔졌습니다.
원경왕후 민씨는 본관이 여흥인 여흥부원군 민제와 삼한국대부인 송씨 사이에 1365년(고려 공민왕 14년)에 탄생하시어, 1383년에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과 가례를 올리셨습니다. 1392년에 정령옹주에 봉해지셨고, 정종 2년(1400년)에 정빈을 거쳐 태종이 즉위한 후 정비로 책봉되셨습니다. 남편 태종이 외척의 세력을 억제하기 위한 방법으로 친정 하버지인 민제와 동생 민무구, 민무질이 죽는 등 친정집을 몰락을 겪기도 하셨습니다. 그 후 세종이 즉위한 후 후덕왕대비에 봉해지셨으며 1420년인 세종 2년 7월 10일 수강궁 별전에서 춘추 56세로 승하하시어, 헌릉에 먼저 모셔지셨습니다. 소생은 양녕대군을 비롯하여 효령대군, 세종대왕, 성녕대군, 정순공주, 경정공주, 경안공주, 정선공주 등 4남 4녀를 두시었습니다.
헌릉 신도비각 (앞에 신도가 깔려있다)
헌릉 정자각 동계
특징이 많은 왕릉.
헌릉은 특징이 많은 왕릉입니다. 첫째로는 신도와 어도로 나뉜 참도가 하나뿐인 없는 점이 특징이고, 참도로 걸어가 정자각 동계의 높이가 너무 낮으며, 정자각 뒤로 길 게 신로가 깔려있었습니다. 신로 오른쪽에는 비각이 있는데, 비석문은 없고 신도비만 두 개가 있습니다. 또한 헌릉은 쌍릉의 형식이 잘 돋보인 왕릉으로 문인석과 무인석이 좌우로 각각 네쌍씩 있고, 석양, 석호, 석마도 좌우로 각각 네쌍씩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