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보광산의 맺힘과 풀림(2)-참판공의 별세와 행장

페이지 정보

김항용 작성일07-07-26 07:27 조회1,989회 댓글0건

본문

2. 참판공의 별세와 행장

 331년 전인 1666년 음력 6월 11일, 서울 남산 아래 주자소 근처의 남산골(현 남산 아래 충무로 2가 극동빌딩 근처)에 사셨을 것으로 추정되는 나의 13대조 할아버님이신 참판공(휘 素)께서 돌아가셨다. 1년 전에 양주 목사로 나가셨는데 병이 일어 사직하고 돌아와 계셨다가 당한 일이었다. 

01joojadongji_kimsihoon01.jpg 02joojadongji_kimsihoon02.jpg

    <薰陶坊鑄字洞志(훈도방 주자동지)>(權僖 편,1621년(광해군13)간.1책33장)


 1602년(선조35)에 출생하신 참판공의 자(字)는 지백(知白), 호는 양졸와(養拙窩)이시다. 충북 괴산군 사리면 사담리 하도(荷島)에서 제학공(휘 益達)의 9대손이요, 양덕공(휘 時說)의 장자로 출생하셨다.      

 우리 집안이 하도(荷島)에 살게 된 것은 참판공의 부친이신 양덕공께서 1589(선조22)년경 이곳에서 약 10여리 떨어진 사리면 수암리의 황산에서 이곳 괴산군 사리면 사담리 하도의 구례손씨 휘 록경(祿慶)공의 따님과 혼인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집터는 현재 사담리 하도의 정원사 절과 그 앞 밭 일대이다.(현지인 손석복 談. 1987년 필자 조사, 채록)

kimso51.jpg

                         <참판공 생가지>(정원사 앞)   

 

kimso48.jpg

         <참판공댁 주춧돌>(동네 담장 밑돌로 사용)


 참판공께서는 1630년(인조8.29세)에 진사시에 2등으로 급제하고 음보로 무사참봉(巫仕參奉-종9품)을 받은 후, 의금부 금오랑(金吾郞-종5품), 호조좌랑(戶曹左郞-정6품)이 되셨다. 1635년(인조13,34세)에는 알성문과에 급제하고 이듬해 정랑(정5품)이 되셨다. 그 해(1636년,35세) 후금(청나라)의 침범이 예상되자 공은 문무를 겸비한 자로 선발되어 해주판관(海州判官)이 되셨다.

  1637(인조15.36세) 병자호란에 패하여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 심양으로 볼모로 끌려가게 되자 공은 세자와 대군을 청나라까지 아우인 안주공(휘 繁)과 함께 모시고 갔다가 돌아오시기도 했다. 이때 아우는 세마(洗馬)로서 청나라에 남아 두 왕자를 모셨다. 군자감정(軍資監正-정3품), 강릉부사(江陵府使), 함경도병사(咸鏡道兵使-종2품), 종성부사(鍾城府使), 함경남도병사(부친 노환으로 사양)를 거쳐 1644년(인조22,43세) 호조참의(戶曹參議-정3품)가 되셨다. 그 해 겨울 성절사(聖節使-중국에 새해 인사차 가던 사신)로 청나라에 갔다가 귀국길에 볼모로 있던 소현세자에게 들려 아껴 쓰고 남은 공금을 세자의 귀국을 위한 말 준비 비용으로 드리기도 하였다.

kamsa1.JPG kamsa2.JPG

       <진사급제 교지(백패)>                            <문과 급제 교지(홍패)>


 이어 경주부윤(慶州府尹-종2품. 부친 노환으로 사양), 형조참의(刑曹參議-정3품. 잠깐 있다가 부친 노환으로 사양), 승정원(承政院) 부승지(副承旨-정3품), 진주목사(晋州牧使)를 거쳐 1648년(인조26,47세) 충청도 관찰사(觀察使-종2품)가 되셨다.

kimso26.jpg

                                  <친필 서찰1> 

 

kimso56-1.jpg

                               <친필 서찰2>


  그 후 영흥부사(永興府使), 승지(承旨), 형조참의(刑曹參議), 호조참의(戶曹參議), 황해도관찰사, 광주목사(光州牧使), 장단부사(長湍府使), 판결사(判決使), 양주목사(陽州牧使)등을 역임하셨다. 참판공께서는 47세(1648년)에 충청도관찰사(공은 정3품의 품계에서 종2품인 관찰사를 守職으로 받으심)를 지낸 후 무려 18년간이나 정3품의 품계에서 승차(陞差)하지 못하고 계시다가 당하신  별세였다. 이는 아마도 당시 열세당인 남인(南人)에 속하셨던 공께서 우세당인 노론과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었던 시기요, 더욱이 노론의 영수였던 송시열(1607--1689)이 강력하게 활동하던 때였기에 겪은 피해였으리라.

kamsa9.JPG

                        <충청도 관찰사 유서>

 

kamsa4-1.jpg

                         <충청수사 유서>

 

jeonseo0080.jpg

                 <공주 공산성의 관찰사 불망비>(좌측부터-素, 時獻, 億齡, 悌甲)


 임금(인조)은 충청도 관찰사에 나아가는 공에게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리기도 했다.

----------------------------------------

1. 제작일시 : 1648(인조 26. 47세). 7.

2. 수령자 : 金素

3. 출전 : <상락가승> (1895년. 고종 32년 간. 金龜浩 著. 金恒鏞 소장본)

4. 정리 및 번역 : 1차-2004. 11(김항용). 2차-2005. 1. 11(김익수 감수)

 

sangrak(so)01-1.jpg

sangrak(so)02-1.jpg

sangrak(so)03-1.jpg

 

5. 원문

  敎書

敎守洪淸道觀察使 兼 兵馬水軍節度使 巡察使 金素 書

  <이하 생략>

6. 역문

 홍청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순찰사인 김소에게 내리는 임금의 교서

 왕께서 이르시길 오직 국가의 근본이 되는 곳은 충청도이다. 그러므로 중신(重臣:관찰사)에게 권한을 맡길 적에는 반드시 내 뜻을 정승들(四嶽)에게 물어보는데, 내가 먼저 정한 뜻과 중의(衆意)가 서로 같도다.

 돌아보건대 저 백제의 옛 강토는 실은 우리 삼한의 중요한 관문이다. 길은 호남과 영남의 兩道로 통하고 郡邑은 오십삼구역이요, 땅은 경기도와 연하여 동서로 칠팔백리이다. 세상이 어지러울 땐 중국의 양자강과 회수처럼 진영을 보호하고, 때가 평온할 때는 형초(荊楚:지금의 중국 호남성과 호북성 일대. 楚의 영토)의 門과 뜰과 같이 겉과 속이 되는 물과 산인 錦江과 鷄龍山의 험함과 굳건함이 마치 궂은 비 내릴 때 미리 준비함과 같도다. 軍營의 단단히 무장한 군사와 말들은 날래고 강하여 스스로 부역을 한다.

 그동안 가뭄과 홍수가 온 후에 이어서 기근이 거듭해 왔으며 더욱이 큰 사건(병자호란)이 있은 후가 되니 불안함을 스스로 안정하게 하고 진정시켜 어루만져 줄 방책에 있어 지금 소홀함이 있다. 어루만져 편안히 다스려줄 임무를 맡을 자는 그대 말고 그 누가 있겠는가? 오직 그대라면 훌륭한 재주를 갖고 있어 큰일을 맡길 만한 데, 이것은 저 숙부[하담공-김시양]와 너무나 흡사하여 옛날 晋나라의 사안(謝安:주1)과 사현(謝玄:주1)의 관계와 같도다. 반열(班列) 중에 아주 뛰어난데 글 솜씨도 뛰어나고 무예도 뛰어나도다. 그 마음가짐이 옥과 같이 희고 모든 일을 시행함에는 칼놀림처럼 여유가 있도다.

 처음에는 호조(戶曹)의 낭관(郎官)이었는데 나중에 대신(大臣)의 추천으로 해전(海甸:바다에 인접한 고장. 해주)의 큰 고을 관리(해주판관)로 발탁됨을 입었는데 과연 한 지역이 태평하게 되었고, 강원도(강릉부사)에 발령 받아서는 치적이 제일이었다. 갑자기 북쪽 요새(종성부사)에 발령되어서는 명예로운 칭찬이 무쌍하였으며, 이미 요새에서는 마음과 힘을 다하였고 내전(승지)에서는 왕명의 출납을 맡았었다.

 생각건대 전후 내외직을 역임하면서 始終의 공을 쌓은 능력은 참으로 볼 만하였도다. 연경(燕京)의 사천리길(성절사)에서는 조벽(趙壁)과 같이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돌아왔으며, 진양(晋陽-진주목사)의 수만호(戶)는 윤탁(尹鐸, 주2)과 같은 어진 그대에게 모두 따랐으니, 지금 충청도를 관리할 자리가 비었는데 누가 감히 대신할 수 있겠는가? 오직 영남에서 높은 직위에 오른 그대가 합당하다는 의론이다. 이에 그대에게 충청도 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순찰사 직을 수여하노라.

 경은 마땅히 가서 곧바로 봉서(奉書)를 하여 그 직이 정지되지 않게 하라. 휘장을 걸고 관모를 벗어 공명한 치적에 어떻게 발자국을 남길까 하고 힘쓸 것이요, 천하를 맑고 깨끗이 하려는 뜻이 고을에 가득 넘치게 떨치라.

 정사(政事)에 임할 때는 관대함과 엄격함을 아울러 하고, 관리의 성적을 평가하여 승진과 강등을 함에 있어서는 사사로움이 없게 할 지어다.

 하은주(夏殷周) 삼대처럼 인륜을 가르쳐 밝게 하고 풍속과 교화를 잘 펴도록 하라. 조그만 고을에도 忠과 信을 더욱 크게 일으키라. 자신을 잘 다스려 관원들의 근본이 되게 하며, 진실로 성실히 업무에 힘쓰고, 범죄자를 가둘 때는 법령대로 시행하여 허점에 빠짐이 없도록 신중히 하라. 모름지기 가난하고 불쌍한 무리들이 기회를 보며 인수(印綬-주3)를 풀려 하거든 빨리 백성들의 어려움을 풀어 주어 수령의 은혜가 가득 내리도록 하라. 하물며 금년의 바람과 우박의 재앙은 옛날에도 듣지 못한 것이로다. 비록 가을의 풍년을 만났다 해도 가을 조세를 행할 가망이 없으니 이런 생각으로 새로이 교화를 해야 한다.

 그런 때에 좋지 못한 습관을 개혁하기 위해 소요죄에 대해 사형을 품달하는 것은 무슨 염려가 있겠는가. 내가 통훈대부의 관직을 주어 경이 스스로 이를 결정하도록 맡기노라. 

 아아! 사태가 매우 험악하니 책임과 기대가 아주 무겁다. 소유문(蘇孺文 : 주4)의 법에 따르고자 함이 어찌 사사로운 은혜에 대해 조금이라도 굽힌 것이 되며, 이덕유(李德裕: 주5)가 선택한 노래는 여러 악습을 어찌 크게 변하게 하였겠는가?

 오래도록 외방에서의 노고로 현관(賢官)을 갈망한다는 감탄의 소식을 모르지 않는다. 장차 앞에 많은 일이 놓여 있더라도 다스리고 이바지함에 본보기로 삼고자 하여 이에 교시하는 것이니 생각건대 모름지기 이 모든 사실을 잘 알도록 하라.


*주 풀이

주1. 사안(謝安)과 사현(謝玄) : 중국의 사안은 사현의 숙부로 前 秦의 苻堅이 공격해 왔을 때 사안은 사현을 보내 肥水에서 대파하여 晋의 太保가 됨. 모두 문인이며 특히 사현의 손자가 유명한 시인 謝靈逢이다. 여기서는 김시양과 김소가 숙질간임에 비유한 말이다. 


주2. 윤탁(尹鐸) : 중국 춘추때 晋사람. 趙簡子가 晋陽을 다스리게 하면서 백성에게 세금을 거두라고 요청하자 호구수를 줄여서 백성에게 득이 되게 하였다. 여기서는 김소가 진양(진주)의 목사로 재직하였던 것을 비유함이다.


주3. 인수(印綬) : 관인(官印)의 꼭지에 다는 끈


주4. 소유문(蘇孺文) : 미상. <오유란전(烏有蘭傳)>에, 세조 임금 때에 한양 땅에 두 재상이 있었으니, 한 재상의 성은 김씨요, 또 한 재상의 성은 이씨라 했다. ... "오늘은 소유문(蘇孺文)이 되어 친구와 더불어 술을 마시고, 내일은 겸주자사(兼州刺史)가 되어 일을 살핌은 마치 나를 두고 이름일세." ...라는 구절이 있다.


주5. 이덕유(李德裕) : 당의 楚皇 사람. 자는 文饒. 젊어서 학문에 힘썼고 큰 절의가 뛰어났다. 敬宗 浙西觀察使가 되었는데 당시 황제가 소인들과 친하여 遊樂을 좋아하므로 붉은 병풍에 쓴 여섯 잠언 <丹屛六箴>을 올렸다. 여기서는 김소가 관찰사가 된 것을 비유함.

--------------------------------------------------


 또한 공이 몰하자 현종은 다음과 같은 치제문을 내리기도 하였다.

-------------------------------------------

sangrak(so)03-1.jpg

1. 작성일시 : 1666(현종 7). 9.

2. 수령자 : 김소

3. 출전 : <상락가승> (1895년(고종 32) 간. 金龜浩 저. 김항용 소장본)

4. 정리 및 번역 : 1차-2004. 11(김항용),  2차-2005. 1(김익수)

5. 원문

 致祭文

 國王遣禮曹佐郞兪夏益 諭祭于卒前監司金素之靈--

  (하략>

6. 역문

 국왕은 예조좌랑인 兪夏益을 보내어 죽은 전 감사 김소의 영혼에 고하여 제사하노라.

 삼가 영령은 순박하고 충성스러우며 그 바탕은 크고 건장한 인재였다. 참되어 딴 마음이 없었으며 자기의 위치를 지켜 순리를 어기지 않았다. 귀한 자리를 차지해도 다만 순실하기에 힘썼으며, 말단의 자리를 차지한다 해도 겉모습으로 나타내지 않았다.

 벼슬길에 나아가 임용된 것이 지금까지 3대의 조정에 이르렀는데, 오직 평화로울 때나 험난할 때나 현명하게 노력하였고, 충청도의 각 현들을 안찰하며 선정을 펴고 은혜를 베풀지 않았다면 어찌 왕화(王化)를 추구함에 그윽함을 띨 수 있었겠는가?

 북쪽과 남쪽을 지켜내고, 뛰어나고 절개 높은 장수들에게 분부하여 적들의 투구를 벗김으로써 우리의 변경을 평온하게 하였다. 승정원에서 왕의 출납을 맡거나 장례원에서 공정한 판결을 함에 있어 신실하고 명료하게 하여 그 직책에 잘못함이 없었고, 내외직을 지내오면서 매양 드러나게 공을 세웠다. 내가 경의 충직함을 믿어 격려하였고 경은 도성과 가까운 지역에서 충성을 다하고 기강을 드날렸다.

 오직 다스리기 어렵다고 말하면 경을 빌려 거듭 가도록 하였다. 경륜이 이러하니 백성은 큰 은혜를 입었으며 옛날의 걱정이 지금은 기쁨이 되었다.

 장차 임금이 경을 불러 보아도 천하에는 슬픔만이 남았도다. 하물며 병이 더욱 깊어져 멀리 내다 볼 계책이 급한데 조정의 반열을 돌아보아도 누가 운명의 날에 나라를 충성스럽게 담당할 자가 그대와 같겠는가? 막히어 병들어 시들어 빠지게 될 것이다.

 아! 과인은 사리에 밝지 못하고 통절하기에 이 마음 펼침을 위임하며 옛 규정과 의식에 따라 제를 지내고 문상하니 이 내 마음을 알아주오.

 통정대부 장예원 판결사 지제교 睦來善 지어 올림


*주풀이 

주1. 소결(疏決) : 공정하게 처리하여 판결함.

주2. 변위(邊圍) : 변경

주3. 후사(喉司) : 승정원

주4. 비궁(匪躬) : 충성을 다함.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