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명빈 김씨(明嬪 金氏)

페이지 정보

김은회 작성일07-09-18 18:28 조회1,493회 댓글1건

본문

3대 태종 방원 (太宗 芳遠 1367-1422)
     왕비 :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 閔氏 1365~1420)

              1365(공민왕 14)∼1420(세종 2). 조선 태종의 비(妃). 본관은 여흥(驪興). 여흥부원군

              (驪興府院君) 민제(閔霽)의 딸로 여흥에서 출생하였다.
              1382년(우왕 8)에 방원(芳遠)에게 출가하였으며, 1392년(태조 1)에 정녕옹주

              (靖寧翁主)에 봉해졌다.
              제1차왕자의 난 때 부군(夫君)을 도와 공이 출중하였으며, 1400년(정종 2) 2월에

              방원이 왕세자에 책봉되자, 세자빈이 되어 정빈(貞嬪)에 봉해졌다. 이해 11월에 방원이

              정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자 왕비에 책봉되어 정비(靜妃)의 칭호를 얻게 되었다.
              1398년 8월에 정도전(鄭道傳) 등이 주살될 때에 그는 미리 변이 일어날 것을 예측하고,

              때마침 태조가 몸이 불편하여, 여러 왕자와 숙직하고 있던 방원을 몰래 불러내어 주의를

              환기시켰으며, 또한 10여일 전에 여러 왕자가 거느리고 있던 시위패(侍衛牌)를 혁파하고

              영중(營中)의 군기를 모두 불태울 때 정비가 몰래 무기를 숨겨두었다가 일이 발생하던

              그날에 방원의 군사에게 내어주며 선수를 쓰도록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태종 초부터 궁녀문제로 불화가 일어났다.
              태종과 정비의 불화는 빈어(嬪御)문제로 인한 갈등에 그치지 않고, 1407년(태종 7)

              7월에 발발한 민무구(閔無咎)형제의 옥사를 계기로 하여 더욱 더 심각해졌는데,

              민무구형제는 이미 태종 2년에 왕이 창종(瘡腫)으로 심한 고통을 받고 있을 때,

              시녀를 끼고 왕의 병세를 염탐하며 은근히 협유집권(挾幼執權)의 기회를 노렸다는

              의심을 받아왔다.
              정비가 직접 참여한 것 같지는 않지만, 민무구형제가 끝내 대역(大逆)에 몰려 비명으로

              죽게 된 데에는, 정비의 정도에 지나친 투기와 불평으로 태종의 비위에 거슬린 것이 곧

              민무구형제에게 영향을 주어 태종과 틈이 더 벌어지게 하고, 그들의 방자한 행동을 도와

              주는 원인의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비는 민무구형제의 옥이 발발한 4개월 후 금령을 범하여 친정과 내통한 사실이

              드러나서 그들의 옥을 악화시키는 요인을 만들었다. 정비가 친정과 내통한 일이 있던

              직후, 민무구형제의 직첩(職牒)을 거두어 서인을 만들 정도로 정비의 무엄한 태도에

              태종이 격분하였던 것이다.
              민무구형제는 그뒤 태종이 정비의 면목과 장인 민제와 빙모 송씨(宋氏)의 생존으로 인하

              여 겨우 생명을 보전해나갔으나, 1408년 9월 민제가 죽자, 같은해 10월에 태종은

              그들의 열가지 죄를 열거한 교서를 반포하였고, 1409년 10월에 그들의 옥에 관련된

              이무(李茂)를 죽였다.
              그동안 정비는 민무구 등의 일로 태종에게 불손한 말을 자주 하여 왕의 분노를 여러 번

              사서 민무구형제가 죽은 지 1년 남짓 된 11월 9일에는 폐비의 위기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태종은 일빈이잉(一嬪二媵)의 빈어제도를 정하여, 같은해 10월 27일에 판통례문사

              김구덕(金九德)의 딸을 빈으로 삼아 명빈(明嬪)에 봉하고, 전 제학 노구산(盧龜山)의 딸

              과 전 지함주사 김점(金漸)의 딸을 잉실(媵室)로 삼아 각각 소혜궁주(昭惠宮主)와

              숙공궁주(淑恭宮主)로 봉하였다.
              1418년 세종이 즉위하여 후덕왕대비(厚德王大妃)로 봉하고, 1420년 7월 56세로 죽음.

              시호는 원경왕후로 창덕소열(彰德昭烈)이라는 휘호(徽號)가 추상되었다.
              소생은 세종과 양녕(讓寧)·효령(孝寧)·성녕(誠寧)의 3대군과 정순(貞順)·경정(慶貞)·

              경안(慶安)·정선(貞善)의 4공주가 있다. 능은 헌릉(獻陵)이다.


    후궁 : 명빈 김씨(明嬪 金氏) ??~1479

              안동김씨 김구덕(金九德)의 딸로 1411년(태종11) 11월 명빈으로 책봉되었다.

              소생으로 숙안옹주가 있다.

 

    태종의 부마/숙안옹주(淑安翁主)의 남편 황유(黃裕)(1421~1450)

 

    황유:자(字)는 맹용(孟容)이요.황자후의 아들이다.  나이12세에  태종(太宗) 후궁의 딸 숙안옹주와

            결혼하여,회천군(懷川君)에 봉하였는데, 35년 가정대부 회천군이 되고 44년사은사로 북경에

            다녀 왔으며 곧 봉헌대부로 승봉되고 48년에는 병을 칭탁하여 숙배하지 않아 봉헌대부를 파직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곧 직첩을 도로 받았으나 2년후 졸(卒)하니 .나이 30세였다.

           시호(諡號)는 양도(良悼) 이다.   4남을 낳았다.

댓글목록

김윤식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윤식
작성일

  대부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별고 없으시지요.